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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헤일리 Sep 28. 2024

접속사

오늘의 영감 문장

접속사를 꼭 넣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게. 없어도 사람들은 전체 흐름으로 이해하네.  - 노무현 -


나는 어렸을 때 아주 소심하고 내성적이었다. 말 수도 적었고 표현을 잘하지 않았다. 그런데 학창 시절이 지나고 보니, 그런 성격으로는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바꿔 보려고 무던히 노력한 결과 E(외향형)가 되었다. 이는 마치 진화론과도 같은 맥락이랄까? 살아남기 위해서 성격을 개조한 노력형 E다.


집에서도 무뚝뚝한 딸이었는데 이건 크게 변함이 없었다, '나집에서 외톨이' 생각 가진 후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뭔가 아빠, 엄마, 남동생은 셋이 똘똘 뭉치는데 나만 혼자인 느낌? 지금 생각하면 내가 자존감이 낮고 표현이 서툴러서 괜히 그렇게 느끼지 않았나 싶다. 그렇지만 그 당시에는 혼자 겉도는 내가 싫어서 빨리 이 관계를 벗어나고 싶었다. 내 편이 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친구나 남자친구 많이 기댔다. 집은 그냥 잠만 자러 오는 곳이었다.



서른 살이 넘어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게는 출생의 비밀이 있었다. 어느 날, 정말 뜬금없는 사건으로 인해 그 비밀이 밝혀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내가 느꼈던 소외감이 어느 정도는 틀린 게 아니었다는 걸 알았다. 물론 부모님은 내가 그 사실을 모르게 나를 잘 키워주셨다.  부모님이 사랑과 관심, 지원을 아낌없이 해주셨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았다. 노산 초보맘은 신생아를 어찌할 줄 몰라서 근처에 사시는 친정 부모님께 S.O.S를 무던히도 보냈다. 친정 엄마는 의 매일 왔다 갔다 하시며 호두를 돌봐주셨다. 마치 친딸처럼. 다행히 손녀를 너무 예뻐해 주셨고 함께 하는 시간을 기뻐해주셨다.


나와 사이가 제일 멀었던 친정아버지도 손녀 앞에서는 무장 해제가 되었다. 소적인 말투와 권위주의는 찾아볼 수 없었고 '손녀 바보'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상하게 호두는 뭐가 그리도 좋은지, 할아버지 목소리만 들어도 깔깔댔다. 그렇게 선물 공세를 해대었던 삼촌도 할아버지에게 밀리고 말았다. 할아버지는 별 노력 없이 호두의 최애가 됐고, 우리는 모두 의아했지만 받아들여야 했다.


그렇게 호두는 나와 친정 식구들을 이어주는 접속사가 되었다. 작은 조약돌 하나가 굴러와 오래된 틈을 메꾸어주었고, 삭막했던 나와 친정 식구들 사이웃음과 행복으로 연결됐다. 그래서 나는 호두에게 고마웠다. 못난 내미였는데, 딸 덕분에 효녀가 된 것 같았다.






지금도 나는 친정 부모님께 호두를 맡겨 놓고 그 옆에서 글을 쓰고 있다. 호두는 코딱지를 파서 할아버지에게 준다. (마치 고양이가 주인에게 애정을 담아 벌레를 잡아다 주는 것 같다.) 할아버지가 더럽다고 하면 장러기는 더 신이 나서 계속 장난칠 궁리만 한다. 옆에서 할머니는 연신 호두에게 "누구 딸?"이냐고 묻는다. 할머니가 원하는 답은 정해져 있다. 그것은 바로,


할머니 딸


할머니는 황혼 육아로 다시금 딸 키우는 재미를 맛보셨나 보다. 어느덧 밤이 되어 집에 갈 시간이 되었다. 호두가 졸린지 눈을 연신 비벼댄다. 할아버지는 애를 빨리 집에 데려가라며 호두의 양말을 직접 신겨주신다. 호두는 할아버지의 존심이자 불가침의 영역인 정수리를 만지며 묻는다.


할아버지는 왜 머리가 없어?



평소 같으면 발끈하셨을 할아버지는 허허 웃으신다. 오늘도 접속사는 종횡무진 제 몫을 다 하였다. 이제는 접속사라는 타이틀도 무색할 지경이다. 어느새 호두는 외갓집에 스며들어 전체 흐름을 주도하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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