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찬스로 에버랜드 티켓을 받았다. 날씨가 추워지기 전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아서 어느 더웠던 가을날 '환상의 나라'로 향했다.
나도 백만 년 만에 가는 거라서 무척이나 설렜다. 요똥(요리 똥손)이지만 가면 먹을 게 없다고 해서 과감히 도시락 싸기에 도전! 샌드위치와 과일을 간단히 싸서 새벽같이 집에서 출발했다. 호두는 한창 자고 있을 시간이었기에 그냥 둘러업고 나갔다. 그렇지만 잠자리에 예민한 그녀는 말똥말똥 눈을 떴고, 가는 내내 잠깐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이따가 재밌는 거 보려면 잠을 자두라고 했으나, 역시나 호두는 졸음을 이겨내고 에버랜드에 도착했다.
에버랜드 입구
오픈 시간은 10시. 우리는 한참 전에 도착했지만 이미 사람들은 입구에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캠핑 의자에, 어떤 이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오픈런 준비를 했다. 우리도 준비를 철저히 하고 왔어야 했는데, 다른 사람들에 비하면 맨땅에 헤딩이었다. 그나마 뜨거운 태양을 피하기 위해 양산을 펼치고 선크림을 바르며 인고의 시간을 보냈다. 호두는 유모차에 앉아서 과자를 먹으며 엄빠에 비해서는 호화스러운 웨이팅을 했다. 그러나 이내 지겨웠는지 집에 가겠다고 투덜거렸다. 몇 번이나 애를 어르고 달랜 결과, 9시 55분. 직원들이 춤을 추고 드디어 환상의 나라의 문이 열렸다. (휴, 살았다.)
에버랜드 입장 후 목적지로 향하는 사람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했던가. 입장하자마자 바로 어플로 해야 하는 것이 있었으니!
스마트 줄 서기
온라인 예약 시스템이다. 인파를 분산시키기 위해 도입된 제도로, 한 번에 한 곳만 예약이 가능하다. 예약한 곳의 이용이 끝나야만 다음 장소 예약을 할 수 있다. 오전에는 이렇게 어플로만 대기를 받는데, 이미 11시 정도가 되면 거의 모든 곳이 대기 마감을 한다. 그래서 2시부터는 진짜 줄을 서서 웨이팅을 해야 한다. 미리 말하자면 우리는 오전에 사파리 투어를 하고 나니 스마트 줄 서기가 전부 마감이었다. 그래서 점심을 일찍 먹고 2시에 오픈하는 곳에 미리 가서 대기를 했다. (2시에 오픈한다고 해서 진짜 2시에 가면 안 된다.)
출처: 에버랜드
줄 서기의 연속. 우리 집 같은 유모차 부대들은 전부 '주토피아'로 몰려갔다. 영유아들은 대부분 놀이기구 대신 사파리나 판다월드 같은 동물들을 구경하러 가야 했기 때문이다. (일부 어트랙션은 영유아도 탈 수 있다. 특히 아마존 익스프레스는 110센티미터 미만의 아이라도 보호자 동반 시 탑승이 가능하다.)
에버랜드 사파리 월드
우리는 맨 처음으로 사파리 투어를 했다. 이 투어는 버스를 타고 호랑이, 사자, 곰 등 육식동물이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무서운 동물들이라 겁이 났지만 가까이서 보니 신기했다. 나도 이렇게 동물원에 온 적은 엄청 오랜만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들뜨고 동물들이 반가웠다. 호두도 겁이 난 것 같았지만 신기해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호랑이는 야행성이어서 그런지 별다른 움직임이 없어서 아쉬웠다. (나이트 사파리에 맞춰 가면 호랑이들이 엄청 활동적이라고 한다.) 한편 사자들은... 짝짓기 철이었나 보다. 곳곳에서 민망한 장면들이 연출되고 있어서 눈을 둘 곳이 없었다. 호두가 아직 그쪽을 전혀 몰라서 굳이 설명해 주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었을 뿐이다.
사파리를 보고 나왔는데 딱히 구경할 거리가 없었다. 2시에 로스트밸리에서 초식 동물들을 볼 예정이었는데 점심을 먹어도 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다. 그래서 웨이팅 없이 관람이 가능한 뿌빠 타운에서 알파카, 원숭이, 각종 설치류 등과 이글쇼를 보고 나왔다. 아쉽게도 인기가 많은 판다월드는 못 볼 것 같아서 주변에 있는 동물들만 둘러보고 로스트밸리에 대기를 하러 갔다. 그런데 대기줄이 어마무시했다.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구불구불 끝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비교적 로테이션이 빠른지 쭉쭉 들어간 편이긴 했지만, 이제 관람인가 싶으면 다시 줄이 시작되고를 반복했다. 새벽부터 애를 안고, 목마 태워주고, 운전까지 한 남편은 벌써 체력이 방전됐다. 호두도 낮잠 시간이 겹쳐오니 비몽사몽이었다.
로스트밸리 내부 대기 중
이럴 수가.
기다리고 기다리다 진짜 우리 차례가 오기 직전! 호두는 유모차에서 잠이 들고 말았다. 로스트밸리에서 코끼리랑 기린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말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아이가 잠들어버린 것이다. 진작 점심 먹고 유모차에서 눈 좀 붙였으면 좋았을 것을. (타이밍이 야속하다.) 결국 자는 아이를 안고 버스에 탑승해서 구경을 했다. 기다린 시간이 아까워서 그냥 우리라도, 아니, 나라도 봐야겠다 싶어서 그냥 들어갔다. 기린을 가까이 봐서 너무 좋았다. 호두랑 같이 봤으면 더 좋았을 것을.
에버랜드 로스트밸리 기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다음을 기약하며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호두의 놀이공원 첫 방문치고는 순조로웠다고 평가하고 싶다. 비록 웨이팅이 너무 힘들었지만 덕분에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동물을 한꺼번에 본 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웃프네?
사실 어릴 적 사진을 보면 동물원에 많이 다닌 것 같은데 기억이 잘 안 난다. 같은 논리로, 남편은 호두도 기억이 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기억할 수 있을 때부터 여기저기 다니면 된다고 주장한다. 집돌이 아빠란!
에버랜드의 경우 36개월 이하의 아이는 입장이 무료다. 아직 호두는 31개월이기 때문에 남은 5개월 안에 한번 더 와야겠다. 날도 좀 선선하고, 무엇보다도 사람이 적을 때 오고 싶은데... 그러면 겨울인 건가? 호두는 추위를 잘 못 버틸 거고 괜히 감기라도 걸리면 큰일인데. 어렵다, 어려워. 일단 다음 달이라도 무조건 한번 더 와야겠다. 다음에 오면 회전목마. 범퍼카까지 타는 것이 목표다. 동물은 안 봐도 될 것 같다.Enough. 이번에 본 것으로 충분하니까.
그런데 정작 호두보다 엄마가 더 신난 것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호두의 첫 환상의 나라가 부디 좋은 기억으로 남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