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그와 작별했습니다.

by 헤일리 데일리

참 굴곡진 인생을 살았던 이가 있습니다.


홍길동도 아닌데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했고,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마저 병으로 떠나보낸 남자.


그는 거처도 연고도 없이, 산속을 헤매었습니다.

존재에 대한 회의감, 삶에 대한 무의지.

그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명석하고 비범했던 탓에 지인들의 권유로

목숨을 건 나랏일을 도모하게 되죠. 그로썬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다는 심산이었나 봅니다.


국내외를 떠돌며 바람처럼 살아온 그.

결국 독방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맙니다.




혹시 소설 속 인물에게 애정을 느껴보신 적이 있나요?


지금까지 말씀드린 그 사람은 소설 <토지> 속 주인공 중 한 명인 '김환'입니다. 책을 읽는 내내 저에겐, 방랑자이자 방랑을 마치고 돌아온 탕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이복형이지만 그래도 형수인 사람을 데리고 도망갔기 때문이죠. 그 일로 인해 어린 조카는 이유도 모른 채 엄마를 잃어야 했고요.


하지만 한편으론 그가 안쓰러웠습니다.


어쩌다가 바람에 날린 솔 씨 하나,
석벽에 떨어져서 움이 트고
애처롭게 자란 한 그루의 소나무
(토지 1부 2권 제3편 3장 중에서)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으로 이 세상에 태어난 그는 정말 어쩌다 바람에 날려 척박한 곳에 자리 잡은 소나무 씨앗 같았거든요.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못하며 살아간 세월들, 그리고 한 획을 긋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아버지. 그에겐 애정을 나눌 가족이 없었으니까요. 중간중간 언급되는 그의 마음속 존재에 대한 회의감, 한(恨) 맺힌 절규를 보면서 '사람의 뿌리란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를 참 많이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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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외로움과 고독 속에서도 그는 그저 야인처럼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다 비로소 현실에 꺾이고 희망을 잃게 되자 어머니 제삿날 무덤 앞에 찾아옵니다. 절을 올리고 나서는 그 시각 제사상이 차려져 있는 조카의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유일하게 남겨진 혈육이니까요. 하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에 그는 돌아섭니다.


그가 동학에 적을 두고 독립운동을 한 탓에 머지않아 경찰에 붙잡히고, 감옥에서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본인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연루되고 비밀 활동이 드러날까 봐 본인 인생의 마지막 장을 스스로 덮고 말지요.



이제 작별하였던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나 그리움 하고도
작별을 해야 하는 것이다.
(토지 3부 3권 제3편 18장 중에서)



그런데 그의 죽음이 왜 이렇게 허망하고 제 마음 한 구석에 구멍이 난 것 같을까요? 저는 지금 따뜻한 방 안의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마음에는 공허한 바람이 드나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와 작별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고 허망할 뿐입니다.


아마도 지난해 8월부터 연달아 11권을 읽어오면서 '김환'이라는 캐릭터에 정이 단단히 들었나 봅니다. 소설 속 인물과의 정이라니?! 저도 이 상황이 약간은 웃기고 민망하고 당황스럽습니다. 그런데도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건 어쩔 수 없네요. 아마 11권에는 예기치 못한 캐릭터들의 죽음이 계속 이어지고 있어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이야기 하나하나가 제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있는데 말이죠.


비록 그는 11권에서 우리에게 작별을 했지만 소설은 20권까지 남은 이야기를 계속 들려줄 것입니다. 서사와 역사와 시간은 계속 흐르니까요. 왠지 모르게 가수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라는 노래가 떠오릅니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 있다
내게는 천금 같았던 추억이 담겨져 있던
머리 위로 바람이 분다
눈물이 흐른다

- 이소라, '바람이 분다' 가사 중에서



제가 좀 오버스러운가요? 저도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토지>라는 소설이 주는 위력이 이런 것 같습니다. 우리네 역사 속 그들의 스토리를 한 땀 한 땀 정성스레 들려주는 책이랄까요? 아마 우리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의 이야기일지도 모르는 그런 이야기들이죠. 때로는 너무 현실적이고, 때로는 너무 아름답고 정겹고, 그러다 때로는 너무 잔혹하기도 한... 그런 서술과 묘사가 독자들과 밀당을 벌입니다. 한 번도 읽지 않은 사람은 많아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은 없을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안 읽어보신 분들께 꼭 추천을 드리는 이유입니다.


20권이라는 대장정에서 저는 이제 겨우 절반을 넘겼습니다. 이어질 내용을 기다리는 저는 이 지점에서 환이를 미련 없이 보내주며 작별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멋진 이야기 들려주어서 고마웠노라고요. 굴곡진 인생사를 뒤로 하고 사라지는 그를 생각하니 또다시 제 마음에 바람이 붑니다. 유독 눈보라가 치는 아침이네요.



출처: 밀리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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