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의 주문

by 로엘라

개그우먼 장도연 씨가 예능이나 강연에서 종종 유쾌하게 쓰는 표현이 있다. ‘나 빼고 다 좃밥이다’는 말이다. 원래는 나만 잘났고 나머지는 다 하찮다는 뜻이지만 그녀가 사용하는 맥락에서는 나 자신을 믿는 태도에 대한 표현이다. ‘다 좃밥이다’라는 단어가 다소 거칠어 보여도 유쾌하게 자기 삶을 방어하고 자존감을 지킨다. 웃기지만 진심이 담겨 있다. 강연을 듣기 위해 모인 관객이 너무 많아서 긴장되는 순간, 다른 사람들은 다 잘 나가는데 나만 제자리인 것 같을 때 나를 안심시켜 주는 마법의 주문인 셈이다.


나에게도 그런 마법의 주문이 있다.


업무상 하기 싫은 전화를 해야 할 때, 새로 산 제품에 하자가 있어 따져야 할 때, 귀찮아서 미뤄둔 손빨래나 설거지를 할 때 주로 외우는 주문이다.


‘나는 연우엄마다’


비장한 문장에 비해 상황은 너무 가볍긴 하지만, 의외로 효과가 좋다.


나는 긴장감이 목소리로 나오는 편이다. 표정은 담담하게 숨길 수 있는데 입만 열면 달달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염소 울음소리 같은 목소리를 감추려 헛기침도 하고, 물을 여러 번 마셔도 내가 어쩔 수 없는 게 목소리였다. 그런 긴장되는 순간이 오지 않기만을 바랐다. 한동안은 그랬다. 육아만 하다 보니 매일 마주하는 건 말간 연우얼굴뿐이어서 긴장감보다는 아기가 주는 따뜻한 안정감 속에 살았다.


얼마 전 입사하며 업무상 고객에게 전화할 일이 생겼다. 예전 회사에 다닐 땐 거친 민원인도 잠재울 만큼 자주 했던 상담통화였다. 그런데 야생성이 바닥난 지금 다시 하려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몇 번이나 돌려봐도 할 때마다 떨리는 마음에 답답할 노릇이었다.


‘나는 연우엄마다. 나는 연우엄마다. 나는 연우엄마다.’


바삐 굴리던 머리를 멈추고 뜬금없이 주문을 외웠다. 호흡을 가다듬으며 몇 번쯤 되뇌자 웃음이 터졌다. 전화 한 통이 뭐라고, 자식 이름까지 올리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는 건지. 누가 보면 올림픽 대표라도 된 듯 각오를 다지는 내가 스스로 웃겼던 것이다. 어이없는 마음을 누른 채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염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이 주문을 제일 처음 써먹은 건 집 거실바닥에 매트시공을 했을 때다. 비싼 가격에 망설이다 견적을 받고 결정했는데 시공을 다하고 나서 실제 금액이 예상견적보다 훨씬 많이 나왔다. 예상과 조금 다를 수 있다고는 했지만 그 ‘조금’이 무려 80만 원 일리는 없었다. 그 돈이라면 안 했을 텐데 이미 작업이 끝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금액을 모두 지불했다. 예상보다 거실 면적이 커서 그렇다는 애매한 답변을 들으니 바가지를 쓴 것만 같아 더 속상했다. 평소 같았으면 애먼 남편한테 불평을 모두 쏟아냈을 거다. 그러면 다 듣고 난 남편이 비싸지만 아기를 위해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다며 나름의 논리를 내세우고, 난 거기에 설득되어 개운하게 발 뻗고 잤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택시 기사에게 아파트 안까지 들어가 달라는 말을 못 한다. 식당 가서 반찬 더 달라는 말도 용기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런 성격이 지금껏 불편하지 않았는데, 아기 엄마로 살기엔 불편해질 거란 예감이 들었던 것 같다. 이번엔 달랐다. 이미 잘못되었다고 느꼈는데 애써 합리화하고 싶지가 않았다. 연우 엄마라면 따질 땐 따질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했나 보다. 연우는 엄마처럼 물렁한 성격이 아니길 하는 바람이었다. 그러려면 나도 할 말은 하는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이 내 마법주문의 첫 시작이다.


‘나는 연우엄마다’를 장난스레 외치며 다음날 용기 내어 업체에 전화했다. 차분하게 업체의 미흡한 점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개선된 서비스로 처리하길 바란다며 마무리했다. 내가 생각해도 말 잘한다 싶을 만큼 그 순간은 똑순이 아줌마였다. 다행히 업체에서도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 착오 없도록 하겠다며 금액의 일부를 돌려주었다. 이제 나는 할 말은 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스파이더맨이 쫄쫄이옷만 입으면 영웅이 된다. 남들은 모르는 소심함을 품고 사는 내가 연우엄마라는 역할을 부여받을 때마다 근거 없는 자신감과 용기가 나온다. 나는 여전히 나지만, 엄마라는 이름 앞에선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심리를 활용해 요즘은 밀린 집안일을 할 때도 가끔 써먹는다. 구석에 밀어둔지 일주일은 됐을법한 연우의 얼룩 묻는 티셔츠를 손빨래할 때에도 마법의 주문이 유용했다.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도 ‘나는 연우엄마다’를 외치며 설거지하러 주방으로 향한다.


연우가 이런 나를 닮아 단순한 성격이라 해도, 그게 연우라면 참 귀엽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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