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동그란 것이라면 덮어놓고 귀여워한다. 초등학교 시절 내가 다니던 학원에서는 친구를 소개하면 귀여운 인형 하나씩을 선물로 주었다. 동그란 눈의 다람쥐 인형이 갖고 싶어 나는 달마다 친구를 학원에 데려갔다. 사춘기가 절정이던 중학교 2학년 까지도 햄토리 스티커를 모으기 위해 엄마가 장 보러 갈 때면 마트를 따라다니며 소시지를 사달라고 졸랐다.
그런 내가 아기를 낳았으니 사랑에 빠지지 않을 리 없다. 신생아 시절 아기의 순한 성격을 설명하듯 연우의 뒤통수는 종잇장처럼 납작하고도 평평했다. 엄마, 아빠 둘 다 똑같은 모양의 절벽 뒤통수라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일찍부터 아이의 예쁜 두상은 포기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연우는 뒤집기를 하고 엎드려 자기 시작하면서 뒤통수가 봉긋하게 차올랐다. 기적이다.
작고 동그란 것에 따듯하기까지 하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다. 바로 아기의 볼이다. 계란을 손에 담듯 오목하게 모아 뺨 위에 가져다 대면 귀여운 볼이 양손에 가득 담긴다. 이제는 연우가 도망 다니기 시작해서 잘 때만 간신히 할 수 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갓 구운 모닝롤빵 같던 연우의 볼은 가끔씩 아플 때면 빨갛게 익은 홍시처럼 부풀어 오른다.
아기는 동그랄 리 없다고 생각되는 곳조차 동그랗다. 아기의 발이 그렇다. 한 손으로 발 중앙을 잡고 잘 살펴보면 아치도, 아킬레스건도 없다. 크기별로 이어진 발가락들만 나란히 놓여있다. 작은 알밤 하나와 완두콩 네 알이 사이좋게 붙어있는 것만 같다. 엄마 눈에 띄면 그땐 깨물지 않고는 못 배긴다. 저것도 뒤꿈치라고 해야 할까 싶은, 엄지 손가락 한마디도 안 되는 뒤꿈치도 있다. 엄마의 몸 중에 가장 거친 곳이 발꿈치라면 아기의 몸 중에서 가장 부드러운 곳 역시 발 뒤꿈치다.
동그란 것들만 모여 있는 아기의 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짐없이 둥글다. 팔, 다리 접히는 부위마다 동그란 살결이 삐죽 삐져나와있는 데다, 그렇지 않아도 동그랗게 나와있는 배를 더 크게 보이고 싶은 건지 항상 내밀고 다닌다. 아기와 어린이의 가장 큰 차이점이 배를 내미는가, 아닌가로 나뉜다는 말을 듣고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는 심지어 이름도 연우다. 이름 속에 동그라미가 두 개나 있다. 이쯤 되면 우리 아기는 엄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려고 존재하는 것만 같다. 나는 연우가 떼를 쓰고 울어도 남의 자식 귀여워하듯 예뻐만 한다는 남편이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연우가 못생겨도 이렇게 예뻐할 거냐고. 상상해 본 적은 없다. 이미 저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눈앞에 떡하니 있는데 연우가 아닌 내 아이는 상상으로도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도 눈을 꼭 감고 억지로라도 상상해 본다.
상상해 보았다. 정답은, 당연히 예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