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카보다 우리 아기를 더 사랑할 수 있을까

사랑은 전이가 아니라 확장

by 로엘라

아기를 낳기 전, 출산의 고통보다 두려운 게 하나 있었다. 바로 ‘태어난 아이보다 조카를 더 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었다. 나는 결혼 전에 태어난 조카를 정말 사랑했다. 그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는 앞으로도 없을 거라고 믿었고, 감히 장담도 했다. 당시 남자친구였던 남편도 내가 조카를 유난히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고민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기보다야 괜찮지만, 자기 아들보다 조카를 더 사랑하게 될까 봐 그 또한 진지하게 걱정했다.


그리고 마침내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를 품에 안으면 모성애가 샘솟을 거라는 기대와 달리, 병원을 나와 산후조리원에 머무는 동안에도 나는 여전히 조카의 사진첩을 뒤적거렸다. 빨갛기만 한 나의 아기를 예뻐할 자신이 없었다. 길고 뻣뻣한 몸은 내가 상상했던 작고 여린 아기와는 너무 달랐다. 어쩐지 말하지 않아도 내 마음을 읽은 듯한 남편은 더 안절부절못하는 눈치였다. 진통을 겪지도 않고, 산도를 통과하지도 않은 채 마취하고 2분 만에 ‘뿅’ 하고 나왔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조차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다니는 산후 마사지를 받을 때가 되어서야 제왕절개 흉터를 더듬거리며 ‘이곳을 통해 아기가 나왔다니’ 하고 신기해할 뿐이었다.


깨어있는 시간이 하루에 3시간은 채 될까. 집으로 돌아와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지만, 아기는 한동안 잠만 잤다. 배만 부르면 울지도 않고 잠만 자는 아기였다. 정을 붙일 새도 없었다. 나는 잠든 아기를 옆에서 살펴보는 대신 새로 이사한 아파트 인테리어를 검색하느라 바빴다. 조카의 새벽 수유를 도맡아 하던 3년 전의 나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새벽마다 젖병을 손에 꼭 쥐고 조카가 눈뜨기만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낑낑거리며 꼼지락거리는 발가락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창 밖으로 푸르스름한 빛이 돌던 날들이었다.


둘째가 태어나면 이런 대접일까. 조카가 이미 내겐 첫아들과 같아서 특별하거나 새로울 것이 없었다. 어느 배경에서 찍든, 어떤 각도로 찍든 아기는 늘 같은 표정이라 사진 찍는 것조차 심드렁했다.


서로 낯을 가리며 데면데면하게 지낸 지 두 달쯤 되었을 때다. 잠에서 깬 아기가 허공을 향해 팔을 휘젓는 중이었다. 배가 고픈가 하고 가까이 다가갔는데 아직 시력이 약해 흑백모빌만 보던 아기가 나를 보고 반갑게 웃었다. 얼마나 반가워하던지 팔다리를 더 바짝 들고서 열심히 파닥거렸다. 우리는 드디어 서로를 알아보는 사이가 된 것이다.


사랑은 상대가 귀여워 보이기 시작하면 끝이라는데. 태어날 때부터 눈썹이 진해 짱구 같던 아기가 점점 귀여워 보이기 시작했다. ‘짜식, 못생겼지만 귀엽네.’ 남편은 아기가 만화 드래곤볼의 캐릭터 크리링을 닮았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과연 닮았다.


출처 : 네이버



아기가 엄마아빠와 눈을 마주치고 방긋 웃는 시간이 많아지자 나는 다시 사진과 동영상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넉넉하다고 생각했던 휴대폰 용량은 점점 부족해져 가는데 더 이상 지울 사진이 없었다. 길고 긴 고민 끝에 사진첩의 80퍼센트 이상을 차지하던 조카 사진을 정리하기로 했다. 조카가 조리원에서 나올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이 모두 있었다. 아기의 사진을 찍으며 조카의 사진을 하나 둘 지우는데 조금 서글퍼졌다. 도저히 지울 용기가 없어 결국 예전에 쓰던 휴대폰에 그대로 남겨 두었다.


아기와 조금씩 가까워지고 친해지면서 이번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조카를 보는 내 태도가 미묘하게 바뀌진 않을까 걱정되었던 것이다. 언니네 가족이 연휴를 맞아 연우를 보러 오기로 한 날이 다가올수록 더 궁금해졌다.


연우와 세 살 차이인 조카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아기를 안기 위해 손을 씻었다. 감기를 옮길까 봐 불편한데도 끝까지 작은 마스크를 끼고 콜록거렸다. 그리고 연우를 위해 바운서를 흔들어주고, 그림책을 넘겨주었다. 아직 한글을 떼지 못해 비록 읽어주진 못했지만, 사뭇 진지하게 책을 넘겨주는 게 듬직한 형님의 모습이었다. 연우는 내 동생인데 왜 따로 살아야 하냐는 순수한 질문에 웃음이 터졌다. 요즘 밖에서 자기소개를 할 때면 자기 이름 다음엔 “저는 한 살 동생이 있어요. “를 꼭 덧붙인다던 귀여운 조카다.


언니네가 다녀간 후 나는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 그동안 내가 잊고 있던 게 있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제로섬이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하면 할수록 더 샘솟는다는 사실을 조카를 보며 한번 더 배웠다.


역시, 내 마음속 첫째 아들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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