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대물림된다

by 로엘라

출근준비를 서두르며 화장품을 얼굴에 두드리고 있는데 어김없이 연우가 달려와 다리에 매달린다. 자기도 화장품을 달라며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꼼지락거린다. 대충 마무리하고 뚜껑 닫은 팩트를 연우 손에 쥐어주니 열어달라고 큰 소리로 성화다. 아직 쓰지 않은 새 퍼프를 주니 그제야 만족한 표정으로 자신의 볼에 톡톡 두드리는 시늉을 한다.


연우가 휴대전화를 귀 옆에 바싹 대고 누군가와 통화하듯 외계어로 바쁘게 옹알거린다. 아기는 요즘 부쩍 엄마를 따라 하는 모방행동을 자주 한다. 분홍색 슬리퍼를 신고서는 엄마 핸드백을 메기 위해 아슬아슬 걷는다. 그 모습이 꼭 어릴 적의 나를 보는 듯하다. 요즘 애들은 뭐든지 빠르다더니 연우를 보면 정말 그렇다. 엄마의 목걸이를 하고 뾰족구두를 신으려 애쓰던 다섯 살의 나와 벌써 겹쳐 보인다. 어쩐지 연우가 곧 나인 것만 같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아직도 나는 엄마의 자식인 것만 같아서, 가끔 눈앞의 이 작은 아이가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싶을 때도 있다. 그 물음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어느새 나를 키우던 젊은 엄마의 모습을 떠올린다.


어릴 적 비가 오는 날이면 엄마는 항상 팬케이크를 구웠다. 먹음직스러운 갈색 빛이 돌기를 기다리다 보면, 집 안의 공기가 먼저 팬케이크를 먹어치운 것처럼 밀가루향이 가득했다. 팬케이크는 누가 먹든 상관없었다. 우리 자매는 그보다 위에 듬뿍 뿌려진 메이플 시럽을 먹기 위해 혓바닥을 부지런히 날름거렸다.


엄마는 겨울이 오기 전에 도톰한 털실로 우리가 입을 원피스도 짰다. 포크와 나이프 사용법을 알려주고, 오믈렛을 만들어 연습도 시켜주었다. 알파벳도 가르쳐주고 밀린 방학 숙제도 도와주었다. 엄마의 한결같은 사랑이 내가 자라는 동안 나의 주변을 따뜻하게 감쌌다. 엄마는 예나 지금이나 엄마라는 단어가 참 잘 어울린다. 물론 지금은 할머니라는 단어까지도.


나를 향한 엄마의 사랑은 당연히 커다랗고, 따뜻하고, 사라질 리 없는 풍경 같은 사랑이었다. 아기를 키우는 이 짧은 동안 나는 연우에게 큰 소리를 낸 게 벌써 셀 수도 없다. 그런데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우리에게 단 한 번도 큰 소리로 화를 낸 적이 없었다. 대신 감정이 가라앉길 기다렸다가 나를 불러 조곤조곤 설명해 주었다. 정말 화가 났을땐 편지에 급히 써 내려가며 한번 더 감정을 걸렀다. 지금껏 엄마에게 들었던 가장 심한 말이 ‘이 거지들아’였다. 방학 내내 이부정리는커녕 집을 돼지우리 만들어놓은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가 드디어 폭발했던 것이다. ‘거지들’이라는 한 마디를 읽고 언니와 엉엉 울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오냐오냐 곱게도 자랐다.


연우만 한 아기를 키우던 엄마의 나이는 지금의 나보다 열두 살이나 어렸다.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엄마의 역할을 잘 해냈을까 신기하다. 내가 기억 못 하는 시절동안에는 지금의 나처럼 폭풍 같은 감정이 휘몰아쳤을까, 아니면 원래 타고난 성정이 그런 걸까.


연우가 난생처음 체했던 날, 얼굴이 일그러지며 순식간에 아기 주먹만 한 치즈를 토해냈다. 조금씩 떼어준 것이 소화가 되지 않고 속에서 뭉쳐진 듯했다. 그때 거실 바닥, 연우와 나의 옷, 머리카락까지 온통 토 범벅이 되어 겨우 씻기고 나왔는데 갈아입힌 옷에 또 분수토를 했다. 그때, 신기하게도 귀찮다는 생각이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동안 말도 못 하고 불편했을 연우가 짠해 울면서 꼭 안아주기만 했다.


아이를 낳아야 부모의 마음을 안다더니 내가 그렇다. 어릴 적 고열을 앓을 때면 몸은 그대로 누워있는데 그네를 타는 것처럼 붕 뜨던 기분이 금방 쑥 꺼지곤 했다. 어떨 땐 빙글빙글 어지러워 멀미가 나는 것도 같았다. 소리 없이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으면 엄마는 같은 이불속으로 들어와 나를 세게 꽉 안아주었다. 그럴 때면 잠시나마 돌아가던 머릿속도 멈췄다. 숨 막힐 듯 세게 안아주는 그 느낌이 좋아서, 연우가 아플 때 나도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꼭 안아준다. 그 시절 엄마도 아픈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안쓰러운 마음에 그저 안아주기만 하지 않았을까.


주말에 외출해서 한바탕 놀고 온 연우가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 남편에게 안겨 집으로 가는 동안에도 깨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은 잠에 빠진 아기를 보니 그 잠이 더욱 달게 느껴진다. 아빠의 품에 안겨 가는 그 포근함은 나도 아는 맛이었다. 내가 일곱, 여덟 살까지도 차에서 잠이 들면 아빠가 나를 어깨에 걸치듯이 안고 집까지 가서 침대에 눕혀주었다. 집에 도착하기 전부터 진즉에 깼지만 일부러 자는 척을 했다. 아빠의 어깨에 눌려 걷는 걸음마다 내 몸이 같이 들썩거렸다. 불편했지만 그보다 더 안전하게 나를 안고 있다는 든든함이 더 크게 남았다.


아이는 기억 못 할 테지만, 내가 아는 그리운 품을 연우가 지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나는 지금 사랑이 대물림되는 현장에 있다. 그래서인지 내 앞에 있는 이 아이가 얼른 자라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론 벌써부터 연우를 닮은 손주의 모습이 궁금하다. 아마도 이건 젊은 할머니가 되고 싶은 늙은 엄마의 욕심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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