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엄마가 씁니다

by 로엘라

서른여덟, 적지 않은 나이에 엄마가 되었다. 결혼이 늦은 탓에 아기는 먼 미지 세계 이야기처럼 들렸다. 아이 없이 둘이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아이 있는 삶을 그려본 적도 없다. 그러다 신혼여행을 떠나는 비행기에서, 우리 나이가 적지도 않은데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시기가 곧 닥칠 테니 하늘의 뜻에 맡겨보자 했다.


그렇게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다.


수술을 시작하고 2분 만에 뚝딱 나온 아기다. 진통도 없어서 내가 아기를 ’낳았다‘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그냥 초록색 천 아래로 아랫도리가 덜컹거리는 느낌만 잠깐 들었을 뿐이다. 누군가 아기를 내 머리맡에서 보여주었다.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양수에 퉁퉁 불어서 눈은 실처럼 가느다란 데다 머리숱도 얼마 없이 눈썹만 진했다. 누굴 닮았는지 어딘가 못생긴 이 작은 사람이랑 앞으로 함께 지내야 한다니. 기다려온 순간은 맞지만 기쁘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어딘가 잘못된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아무런 감정이 들지 않았다.


내 아기가 눈앞에 있는데도 자식처럼 여겨온 조카가 더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결혼 안 한 이모가 대부분 그럴 것이다. 살면서 이보다 더 사랑하는 존재는 앞으로 없을 거라 확신했다. 주변 사람들이 결혼해서 아기 낳으면 그런 말 못 할 거라며 놀렸지만, 나는 조카를 향한 내 사랑에 자신 있었다. 대신 죽을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했다.


그때 놀렸던 사람들을 다시 만난다면 그냥 머쓱하게 웃겠지. 그리고 과거의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딱 한마디 하고 싶다. 쯧쯧, 천지 모르는 천둥벌거숭이 같네. 그렇다고 조카를 그만큼 덜 사랑하게 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가진 사랑의 크기가 말도 안 되게 커진 것뿐이다.


결혼을 하고 아빠가 된 지 얼마 안 된 지인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아이를 낳을 게 아니라면, 굳이 결혼은 안 해도 되는 것 같아. 아이를 낳은 기쁨은 결혼 그 자체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했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땐 결혼의 목적이 자식이라는 이야기처럼 들려 거북하기까지 했다. 사랑 없는 결혼이라니. 어딘가 낭만이 쏙 빠진 이야기처럼 들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말이 꼭 틀린 것도 아니었다. 천둥벌거숭이가 지금은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소리를 하고 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아기와 친해지기까지 시간이 조금 필요하긴 했다.

하지만 이젠 그 시간이 무색할 만큼 연우 없이 살아온 이전의 삶이 아득하게만 느껴진다. 책의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아니라, 책 한 권을 덮고 새로운 이야기를 펼치는 기분이다. 1권은 주인공의 성장 배경에 불과했다. 이제야 진짜 모험이 시작된 셈이다.


그런데 이 모험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늦은 나이에 엄마가 되다 보니 산책길에 마주치는 젊은 엄마를 보면 괜히 마음이 복잡해진다. 나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엄마는 아기를 보며 지치지도 않을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 연우에게도 왠지 미안해진다. 나중에 혹시라도 연우가 커서 ‘늙은 엄마 싫어!’ 하면서 유치원에 못 오게 하면 어떡하지. 아이를 달래야 하나, 혼내야 하나. 벌써부터 고민이다.


반대로 늙은 엄마라 좋은 점도 분명 있다. 그간 사람들을 만나며 쌓아온 사회생활의 ‘짬바’가 있다는 것이다. 조금 더 있어 보이게 말하자면 시간이 준 연륜이다. 아기를 아기로 보기 전에 같은 인간으로 대하게 된다. 말 못 하는 아기라도 우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잠 아니면 밥. 전부 생존이 관한 일이다. 말 대신 울음으로만 표현할 뿐, 그렇게 보면 아기는 그저 조금 까다로운 고객일 뿐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이 까다로운 고객과 보내는 시간을 전보다 훨씬 진심으로 대하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은 더 빨리 간다고들 한다. 젊은 부모에 비해 자식과 함께 할 시간이 적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아쉽다. 그만큼 아기에게 더 잘해주고 싶다. 짧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건 가족이고, 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려 노력한다. 나는 나만의 시간을 이미 젊을 때 충분히 누렸다. 멋진 곳의 풍경도, 두 눈 번쩍 뜨이는 맛있는 음식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일 때 더 의미 있다는 걸 안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바라는 것 없이 사랑하듯 나도 연우에게 격대사랑을 주고 있다. 아이가 자라면서 숨겨졌던 엄마의 욕심이 같이 커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건 아이가 내 인생에 찾아와 준 것만으로도, 나는 지금 가장 행복한 시기를 살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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