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든 숨소리를 뒤로 한 채 방을 빠져나왔다. 거실엔 조금 전까지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었다. 아기의 작은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이라 장난감도 하나같이 조막만 하다. 허리춤에 손을 얹고 크게 숨을 한 번 쉰다. 다음날 아침에 괴롭지 않으려면 눈에 띄었을 때 바로 치워둬야 한다. 오분만 쉴까 하고 소파에 누웠다가는 휴대폰 삼매경에 빠져 세 시간이 훌쩍 지나버리기 일쑤였다.
호두알보다 작은 오색구슬을 하나씩 주워 담는다. 손바닥만 한 보드북도 책장에 꽂아 넣는다. 바구니에 장난감을 넣으려는데 기차 몸통 하나가 없다. 가족 시리즈 자석 중에 형아도 어디있는지 못 찾겠다. 그러고 보니 그 많던 구슬도 절반쯤 사라진 것 같다. 범인은 보나 마나 연우다. 얼마 전엔 냉장고 케첩통에 건전지를 넣어 두었다. 소파 사이에서도 동전 모양 장난감 세 개가 나왔다. 작은 틈만 보이면 꼭 뭔가를 끼워 넣곤 했다. 기저귀 때문에 불룩한 엉덩이를 씰룩이며 온 집안을 누비는 연우를 상상하면 절로 웃음이 난다.
언제 한 번은 장난감 도서관에서 빌려온 장난감 부품을 잃어버린 적이 있다. 기차 캐릭터에 여러 가지 도형의 블록들과 노란 무전기가 달린 장난감이었다. 며칠 동안 무전기가 보이지 않았지만 어딘가에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반납일이 다되도록 보이지 않았다. 연우가 숨길 만한 곳은 빤했다. 냉장고 밑, 소파 틈 사이, 커튼 바닥. 연우 침대 매트와 안방 침대 매트까지 들어 올려 확인했다. 밤마다 남편과 온 집안 구석구석을 뒤지며 무전기를 찾아 헤맸다. 무전기 하나에 이토록 간절해질 줄은 몰랐다. 못 찾아도 좋으니 어디 있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분명 연우가 쓰레기통에 몰래 넣었을 거라 생각했다. 지금쯤 쓰레기 매립장 어딘가에 묻혔거나 소각되어 사라졌을 거라 확신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 작은 집 안에서 그렇게 흔적 없이 사라질 수는 없었다. 장난감 도서관에서는 집에서 잃어버렸으면 언젠가 나올 거라며 변상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나는 속으로 그럴 리 없다며 중고거래 어플을 켜고 같은 장난감이 올라오길 기다렸다.
청소기를 돌릴 때마다 귀퉁이에서 찾지 않을까 기대하던 것도 일주일이 지나자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더 지나서야 장난감은 재활용 봉투 더미에서 발견되었다. 나는 남편에게 트로피를 자랑하듯 한 손으로 무전기를 높이 든 채 한참이나 웃었다. 그 작은 무전기에 연우의 장난기가 가득 스며있었다. 그때부터였나 보다. 이젠 어질러진 집을 보아도 연우의 바삐 움직이는 뒷모습을 떠올리며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아기의 흔적은 소란한 하루의 증거이자 사랑이 지나간 자리다. 예전엔 정리 안 된 집을 보는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의 기록이라고 여기며 미소 짓게 된다. 어린이날 선물로 큰맘 먹고 산 민트색 책장에는 한 달도 되지 않아 스티커 자국이 생겼다. 떼었다 붙였다 하는 바람에 페인트가 얼룩덜룩 지워졌다. 그런데도 요즘의 엉망진창이 오래가지 않을 거란 생각에 짜증 대신 애틋함이 밀려왔다.
회사에서 일을 하다 입술이 건조해 립밤 뚜껑을 열었더니 내용물이 눌려 찌그러져 있었다. 어쩐지 아침부터 연우 손끝이 기름이라도 묻은 듯 번들거렸다.
비닐도 뜯지 않은 새 오일병에 당근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누가 보면 미리 찜해둔 자기 물건인 줄 알겠다. 그 자국이 아직 말 못 하는 연우를 대신해 이야기하는 것 같다. ‘7월 2일. 연우 다녀감’
학창 시절 나는 문제집에 흔적을 남기는 게 싫었다. 밑줄은커녕 정답 체크조차 노트에 따로 했다. 새 책처럼 오래 쓰고 싶어서 책장을 세게 펼친 적도 없다. 그런 내가 지금은 연우가 책에 낙서하고 종이를 찢는 모습을 그저 바라본다. 기다란 색연필 대신 더 안전한 크레용을 쥐어주고 마루엔 스팀 청소기를 들였다.
첫아들처럼 마음으로 키운 조카가 크는 걸 보니 이 시기가 찰나라는 걸 안다. 남자아이는 엄마 품을 특히나 더 빨리 떠난다는 이야기를 어머님한테서 자주 듣는다. 길어야 십 년이라는 말은 마치 시간을 정해두고 떠나는 사랑처럼 늘 마음 한켠이 저릿하다.
언젠가 연우는 혼자 잠들고, 혼자 정리하며, 흔적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연우가 더 이상 내 허벅지를 베개 삼지 않을 날이 오겠지. 그 생각을 하니 지금 이렇게 바라보고 있으면서도 벌써 보고 싶다. 잠든 연우를 다시 깨우고 마음을 간신히 삼킨다. 대신 이 엉망진창이 조금만 더 오래 머물러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