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발가락 사이 모래알
어릴 적부터 수많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와 멜로영화를 보며 항상 상상해보곤 했다. 내가 받게 될 프러포즈는 무엇일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프러포즈 장면은 영화 ‘빅 피시(Big Fish)’에 나오는 노란색 수선화가 가득한 꽃밭 한가운데서 건네는 프러포즈였다. 수선화를 좋아한다는 말에 5개 주에 전화를 걸어 구해온 수선화. 그 꽃들 사이에 서서 그녀의 승낙만을 기다리던 남자. 어린 나이에 이 장면은 내 가슴속에 두고두고 남았다. 사랑을 얻기 위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남자라니.
나이가 좀 들고 나서는 오히려 영화 ‘어바웃 타임(About time)’ 속 평범한 프러포즈가 좋았다. 진심 만을 담은 담백한 고백이라니. 성숙한 관계처럼 느껴졌다. 영화 속 수많은 프러포즈 장면들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먼 훗날 내가 받게 될 프러포즈가 어떤 모습일지는 모르겠지만 뻔하지만 않은 것이면 좋겠다고 말이다. 나를 위해서 조금의 창의성을 발휘해 주는 정성은 있었으면 좋겠다고 바랬다.
하지만 결혼준비를 시작하면서 나는 깨달았다. 그동안 보았던 수많은 로맨틱 영화가 나에게 어떤 환상을 심어놓았는지 말이다. 결혼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할 때쯤 주변 친구들은 묻기 시작했다. 프러포즈는 받았냐고, 어땠냐고 말이다. 사실 그동안 보았던 수많은 영화에선 선 프러포즈 후 결혼진행이 당연한 수순처럼 보였다. 하지만 현실 속에선 주변의 많은 친구들이 그랬듯, 나 역시 선 결혼준비 후 프러포즈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나는 조금씩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평생 단 한 번뿐 일 그 로맨틱한 순간을 놓칠 순 없었다.
누군가는 프러포즈를 안 하면 어떻고 누가 먼저 하는 게 뭐가 중요하냐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주변엔 여자가 먼저 프러포즈를 하는 경우도 종종 보았다. 또, 요즘은 프러포즈를 받고 답프러포즈를 하는 게 유행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나에게 이 순간은 어릴 적부터 늘 상상해 왔던 놓칠 수 없는 무언가 의미 있는 거였다. 나에겐 이렇게 조금 고리타분한 취향이 있다. (개인마다 취향은 다른 거니까)
나의 초조함은 그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덕분에 그 또한 점점 애가 탔을 것이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니까 말이다. 고맙게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결혼식 준비로 한창이던 어느 날이었다. 결혼식 준비로 지쳐가던 때, 그는 나를 위해 호캉스를 준비했다. 호강스를 가던 날 아침까지도 결혼식 준비를 위한 일정으로 정신없이 이곳저곳을 돌아다녀야 했다. 이제 일정을 마치고 호텔로 향하려고 하던 때 하필이면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3월에 폭우라니. 당시 뚜벅이었던 우리는 옷과 신발이 다 젖은 채 호텔에 도착하게 됐다. 안 그래도 피곤한 하루였는데 비까지 쫄딱 맞고 나니 나의 짜증지수는 한껏 치솟았다. 곧장 방에 들어가 뜨거운 물로 샤워하며 짜증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그러곤 한숨 늘어지게 자고 일어났다. 어느새 해는 졌고 정적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자고 나니 피곤이 사라져서 그런지 기분이 나아졌다. 그는 피곤하면 나가지 말고 룸서비스를 시켜서 저녁을 먹자고 했다. 우린 편안한 복장으로 앉아 주문한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허기진 배까지 차고 나자 이내 안 보이던 창문 밖 야경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서울의 반짝이는 야경들을 눈에 담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갑자기 젝스키스의 ‘예감’이란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결혼식에서 사용하고 싶다던 노래 중 하나였다. 케이크를 들고 등장한 그.
그는 “너를 만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야”라는 말로 프러포즈를 건넸다.
그의 진심 어린 말들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 영화를 볼 때 프러포즈를 받는 순간 왜 여주인공이 항상 눈물을 흘리는 건지 100% 공감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막상 그 입장이 되어보니 그 울컥하는 감정을 주체하기란 쉽지 않았다. 완전 서프라이즈 한 상황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렇게 나는 그를 만난 지 1318일 만에 꿈에 그리던 프러포즈를 받게 됐다. 비록 생얼에 샤워가운을 입고 있는 모습은 내 상상 속에 없었지만 말이다. 결혼식을 두 달 남겨두고 받게 된 프러포즈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다. 최악의 경우 프러포즈를 받지 못하고 결혼식장에 들어갈 수도 있었으니 말이다. 이 이벤트가 그에게 얼마나 큰 용기였을지, 그동안 얼마나 고민하고 부담을 가졌을지 알기에 더욱 고마웠다.
그가 내게 프러포즈를 한지도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지금 생각하면 왜 결혼준비 할 때 그런 사소한 디테일에 그렇게 집착했는지 모르겠다. 그 당시 내게 프러포즈는 너무 중요하고 결혼준비의 큰 부분 중의 하나였는데 지금 생각하면, 프러포즈보다 더 중요한 것들이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내가 프러포즈를 받은 날, 그 이벤트보다 더 중요하고 감사했던 부분은 사실 그와 함께 나누었던 대화들이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서로의 가치관을 확인하고 맞춰갈 수 있었다. 결혼하고 2년을 함께 보내며 매 순간 내가 이 남자와 결혼하길 잘했다고 느끼는 순간은 그런 때였다. ‘나와 가치관이 참 잘 맞는구나’, ‘인생의 방향이 비슷하구나’, ‘우린 정말 팀워크가 잘 맞는 한 팀이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 말이다.
얼마 전 우리 부부와 가깝게 지내는 유학생 친구들이 우리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우리 부부를 보면 마치 ‘결혼장려커플’ 같다고 말이다. 그도 그럴 것이 서로 장난을 치며 다 같이 놀다 가도 결정적인 순간엔 우리 부부는 꽤 손발이 잘 맞는다. 또, 결혼은 좋은 거라고 자주 언급한다. 대부분 타지에서 외롭게 공부하는 친구들이 많다 보니 함께 시간 보낼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라는 걸 우린 알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 앞에서 꽁냥꽁냥 거리는 우리의 모습이 눈꼴셔 비꼬며 놀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기분은 좋다. 그만큼 남들이 봤을 때도 우리가 환상의 짝꿍이라는 걸 테니 말이다.
프러포즈를 기다리던 시절을 떠올리면 결혼이라는 거대한 산을 어찌 넘을까 걱정만 앞섰던 것 같은데, 그 산을 넘고 나니 결혼은 참 좋은 것 같다. 하나보다는 둘이 함께하는 나날이 더 즐겁고 재미있는 일이 가득한 것 같다. 아직까지는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