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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밤을 견뎌내는 일


 켄트 하루프의 <밤에 우리 영혼은>이라는 소설을 좋아한다. 내게 이 소설은 잠들기 힘든 밤 스스로에게 내리는 처방이다.


  책을 난 건 지방의 작은 마을  때의 일이다.  차가 생기면서 나는 혼자서도 어디든   있게 되었다. 혼자 장을 보러   있는 것도 좋았지만, 사택 버스 시간을 걱정하지 않고 읍내에 있는 도서관에   있다는   좋았다. 작은 도서관이라 책이 많지 않아서 원하는 책이 도서관에 있는지 미리 찾아보고 갔다.  날은 빌릴 책들을 찾기 전에 신간들을 꽂아놓은 책장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책의 표지에는 밤의 풍경이 그려져있다. 아직 까만 어둠이 내리기 전이다. 하늘의 빛이 전부 다 사라지지 않아 하늘은 파랗다. 짙은 파란색 밤을 배경으로 불 켜진 두 채의 집이 나란히 서 있다. 표지가 맘에 들어 그 책을 빌려왔다. 빌려온 책은 한 호흡에 다 읽었고 전자책도 샀다.


 2년 전 서울로 돌아왔다. 분명 서울로 ‘돌아온’ 것은 맞지만, 새로운 집은 또 다시 적응해야 하는 낯선 장소였다. 여태껏 살아본 집 중 가장 누추한 환경이었다. 방에 나있는 창문 밖은 곧바로 바깥이었다. 옥색 페인트가 칠해진 나무틀에 유리가 끼워진 창문은 둥근 막대기를 구멍에 맞춰 끼우고 막대기에 달린 50원짜리 동전만한 손잡이를 돌려서 잠그는 방식이었다. 단촐한 이삿짐을 들인 첫날 밤에는 창문이 잠기지 않아 주인 할아버지를 불러야 했다. (구멍을 잘 맞춰야만 문이 잠긴다)


 불안감에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았다. 겨우 잠들고 나면 낯선 사람이 집에 침입해서 살해당하는 꿈을 꾸곤 했다. 아침에는 밤 사이 낯선 사람이 집 안에 들어와 숨어 있을까봐 곧바로 눈을 뜨지 못했다. 인기척을 살피며 눈을 감은 채로 버티다가 용기를 내어 두 눈을 떴다.


 <밤에 우리 영혼은>은 그런 밤들을 밝히던 책이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불 꺼진 방에서 최소한의 밝기로 이북리더기를 켜고 책을 읽었다. 두 세시간쯤 지나면 지쳐 잠들거나 때로는 끝까지 읽고도 잠에 들지 못해 책장을 뒤적였다.


 내게 밤은 가장 편안했으면 하는 시간이다. 휴식을 취해야만 내일 하루를 다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잠들기 위해서 먼저 가장 편안한 옷을 입는다. 낡으면 낡을 수록 좋다. 많이 빨아서 해진 옷은 부들부들해서 좋다.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다. 끈으로 연결된 이어플러그를 끼우고, 다음날의 알람을 확인한다. 자는 동안 덥지도 춥지도 않을 적당한 두께의 이불 속에 두 팔을 집어넣는다.


 하루종일 내 머릿 속과 마음 속은 많이 소란스럽다. 지나치게 성능이 좋은 센서가 연결되어 있는 것처럼 사람들이 드러내놓고 말하지 않는 감정의 변화까지도 느낀다. 그들이 내게 바라는 것을 적당히 모른 척 하기 위해, 내가 방전되지 않도록 나를 지키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한다.


 빠르고 섣부른 일반화를 즐겨한다. 나 자신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나보다는 관계를 우선으로 한 선택을 할 때가 많다. 무리를 하느라 나를 돌보는 일은 자꾸만 미뤄진다. 사람들의 압박에 시달리며 힘겨루기를 하는 것이 힘들어서 왠만하면 그들의 요구에 따랐다. 눈 딱 감고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상황은 금방 지나간다. 문제는 상황이 지나간 후의 나다. 에너지가 바닥난 채로, 잔뜩 피로한 채 시체처럼 널부러져 있는 나.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기보다는 무해한 소수와 만나기를 희망한다. 주변에 사람이 많으면 방어하거나 항복할 일이 많아진다. 친해질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줄여야 에너지의 손실도 최소한으로 할 수 있다. 사람들을 빠르게 분류하고 관계를 형성할 기회를 줄인다. 방어는 나의 생존 방법이 되었다.


 혼자 남은 밤의 고요함은 소란스러운만큼이나 불편하다. 지나치게 고요하거나 시끄러운 날에는 잠드는 것이 더 힘들어진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 옆집 여자가 내는 말소리, 고함소리, 윗층 어딘가에서 물이 배관을 타고 내려오는 소리와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린다. 침대 옆에는 알리 익스프레스에서 10개에 0.8달러를 주고 산 귀마개가 걸려있다. 파란 끈이 달려있는 살구색 귀마개를 끼고 나면 주변이 조금 조용해진다. 너무 조용하지도 너무 시끄럽지도 않다고 느껴지면 그 날은 비교적 쉽게 잠들 수 있다.


 혼자인 밤은 외롭지만 안심이 된다. 가끔은 밤에 혼자가 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한다.


 몇 년간 나에겐 남편이 있었다. 많은 부부들이 그러하듯 우리도 한 침대를 썼다. 남편과 한 침대에서 자는 것은 고역이었다. 늘 수면부족에 시달려서 눈밑은 검게 변하고 신경은 바짝 곤두서있었다. 무선충전기에 스마트폰 충전하듯이 베개에 뒤통수만 닿으면 잠드는 남편(충전이 되고 있는지는 잠들자마자 곧바로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로 알 수 있다)과 방의 조도와 온도, 소음 등 환경에 민감해서 쉽게 잠들지 못하고 잠귀도 밝으며 한 번 깨면 다시 잠들지도 못하는 나. 부부가 한 침대에서 자야한다는 규칙은 대체 누가 정한걸까. 매일 밤마다 실패할 결말이 정해진 퀘스트에 도전하는 기분이었다.


 밤에 혼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밤에도 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혼을 하고 나서야 나는 누군가와 함께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밤에 우리 영혼은> 에서 애디 무어는 루이스 워터스에게 ‘밤에 자러 오라’고 제안한다. 애디는 말한다. “아니, 섹스는 아니에요. 그런 생각은 아니고요. 나야 성욕을 잃은 지도 한참일 텐데요. 밤을 견뎌내는 걸, 누군가와 함께 따뜻한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말하는 거예요. 나란히 누워 밤을 보내는 걸요. 밤이 가장 힘들잖아요. 그렇죠?” 백발의 두 노인이 함께 보내는 밤은 이렇게 시작된다.


 2020년 서른일곱살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제안이지만, 모를 일이다. 내가 애디와 같은 일흔 살이 되었을 때, 그 때엔 밤을 함께 견뎌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어쩌다 한 번, 한 달에 몇 번 정도가 아니라 가급적 많은 밤을 함께 할 누군가를 원하는 일 말이다. 공감할 수 없는 제안임에도 불구하고 그 책을 읽을 때면 왠지 마음이 편안해진다. 해가 진 밤에 애디의 집으로 자러가는 루이스를 상상해본다. 나란히 한 침대에 누운 채 루이스가 애디의 질문들에 대답하는 밤을 떠올려본다. 아직까지는 <밤에 우리 영혼은>을 읽으며 혼자인 채로 잠드는 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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