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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기로운 전공의 생활 2 - 먹성 좋은 의사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전공의 이야기(5)

by 김정훈


지구에서 가장 행복한 전공의 이야기(5)


슬기로운 전공의 생활 2 - 먹성 좋은 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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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의 어떤 임상의사도 책과 논문을 통한 지적 활동의 결과만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은 없다. 모든 임상의사는 서투른 자신의 손길을 감사함으로 받았던 첫 주치의 시절 그 환자들의 인내와 너그러움으로 인해 지금의 실력을 갖게 되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다시 돌아봐도 그 때 그 시절 내 서투른 손길을 받아 준 그 분들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많이 지난 지금이 아니라 그 당시에도 그들의 너그러움을 느낄 수 있었고 늘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과 미안한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미안한 마음을 오래 갖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기에 밤잠을 줄여서라도 그 날 모르는 것은 그 날 해결하려고 무던히 노력했다. 다행히 4년차 김동수 선생님은 전공의지만 아는 것도 많고 책을 많이 보는 분이라 숙소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모르는 것을 물으면 무척 친절하게 잘 알려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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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백일 당직을 한 지 두 주만에 내가 그 전에 성형외과, 내과 등을 지원했다가 탈락한 것이 하나님이 길을 막으신 것으로 생각이 되었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돌보고 있는 이 환자들이 너무 사랑스러웠기 때문이다. 지금은 재활의학과가 꽤나 인기가 높은 과이지만 당시는 아주 탑클래스의 전공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평생 이런 환자들과 함께 지낸다면 전망이야 어떻게 되었든 간에 괜찮다고 생각했다.


거의 사람을 잘 못 알아볼 정도로 인지가 없고 힘이 없던 사람도 몇 개월간 재활 후에 말도 하고 제 발로 걷기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신기하고도 감사했다. 물론 의사와 치료사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포함된 것이지 그냥 저절로 좋아진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나는 사람이 스스로 가지고 있는 능력을 최대치까지 이끌어 내는 재활의학과 의사의 본업이 너무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작년에 연속으로 탈락을 맛보았던 전공의 지원과정이 당시에는 큰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지만 지금 돌아보니



하나님이 내게 딱 맞는 길을 이런 방식으로 준비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지금이 감사하면 모든 것이 감사하고

지금이 원망스러우면 모든 과정이 원망

이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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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과거의 기억이 신문기사처럼 객관적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지금 나의 상태가 색안경이 되어서 그 때를 돌아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길을 준비하셨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내가 더 이상 원하는 것이 없을 정도로 지금, 여기 있는 것을 감사한다면 나를 지금 이 곳, 이 사람들과 함께 있도록 한 모든 과정이 감사한 것이다. 이것은 내 스스로 생각해 낸 것이 아니니까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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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특별히 가리는 음식이 별로 없다. 어떤 음식이든 맛있게 잘 먹는 편이다. 전공의는 식사시간이 정해져 있긴 하지만 딱딱 제 시간에 맞춰 밥을 먹기가 그리 쉽지는 않다. 재활병동의 특성상 장기 입원환자가 많아서 병동의 한 쪽 탕비실에서 간단하게 조리할 수 있는 곳이 있었고 환자보호자들이 가끔씩 자신들의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국이나 찌개를 끓여 먹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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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동을 지나가는데 환자보호자들이 김치찌개 끓였으니 밥을 먹고 가라고 소매를 잡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면 나는 냉큼


네, 감사합니다. ^^




하고는 웃으며 병실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서 환자보호자들과 함께 둘러 앉아 식사를 하곤 했다. 어릴 적 가난하게 큰 터라 왠만한 음식은 모두 맛있었다. 집에서 기른 상추나 풋고추를 가져 온 분들도 있고 맛있게 김치를 담궈 온 분들도 있었다. 솔직히 병원 구내식당의 밥이나 반찬보다 보호자들과 함께 먹는 밥이 더 맛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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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함께 둘러 앉아 식사를 하다 보면 어제 저녁에 저 환자의 며느리가 왔다 가면서 병원비 걱정을 심하게 하는 통에 환자분이 밤잠을 설쳤다느니 저 환자의 남편은 술을 많이 먹고 와서 환자가 불안해 한다느니 하는 등의 이야기를 듣는다. 이것은 공식적인 회진을 통해서는 쉽게 들을 수 없는 이야기 들이다.


그러면 밥을 다 먹고 난 뒤 밤 잠을 설친 할머니의 며느리에게 전화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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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 할머니 며느님이신가요?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머니께서 밤잠을 설쳐서 오늘 하루 종일 치료하는데 효과가 별로 없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재활기간이 길어지고 입원이 장기화되어 병원비가 더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할머니가 다른 생각 하지 않고 오직 재활에만 신경을 쓸 수 있도록 보호자분이 좀 도와주십시요. 오늘 저녁에는 할머니 좋아하는 녹두죽을 좀 사가지고 오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일절 재활치료 외에는 다른 고민을 하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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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나면 다음 날은 할머니가 밝은 얼굴로 물리치료실에서 재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환자와 보호자들과 한 밥상에서 밥을 먹는 것은 밥만 먹는 것이 아니라 환자들의 다양한 문제를 피부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환자들과 식구가 되어 산 날들이 지금 의 나를 만든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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