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연말엔 가톨릭에 관련된 영화를 많이 보고 책도 많이 읽었습니다. 제가 한 번 소개한 적 있는 '사일런스'라는 작품을 보고 나서 종교 영화나 서적도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중, 정말 좋았지만 정말 나빴던 부분이 있었던 영화를 하나 짧게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미션(Mission, 1986)'입니다. 한국에선 'Nella Fantasia'로 유명한 'Gabriel's oboe'가 OST로 쓰인 영화이죠. 많은 사람들이 가브리엘 신부가 오보에로 이 곡을 불면서 과라니 족의 경계심을 풀고, 그들의 일원이 되는 장면을 기억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이 장면이 아주 좋았지만, 그보다 더 좋았던 것은 바로 '멘도사'라는 남자의 이야기였습니다. 멘도사는 과라니족을 잡아다 노예로 팔아먹는 노예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사랑하는 여자가 있었고, 사랑하는 남동생이 있었죠. 하지만 남동생과 자신의 애인이 바람을 피운 것을 목격하고 남동생과 결투를 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동생을 죽이고 말지요.
'결투'의 절차를 마친 뒤 일어난 싸움이었기에 멘도사에게 법적인 처벌은 없었습니다만, 그는 자신의 동생을 죽였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 삶에 의미를 잃고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지요. 그런 그에게 가브리엘 신부가 찾아와서 이야기합니다.
"신께서 내리신 자유에 따라 당신은 죄를 선택했습니다. 그러니 참회의 방법도 스스로 선택하는 용기를 보이십시오."라고.
그 말에 멘도사는 참회의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바로 과라니족에게 찾아가 용서를 비는 것이었죠. 멘도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무기와 갑옷들을 밧줄로 묶어 그것을 몸에 동여맨 채 과라니족에게 찾아갑니다. 그러한 고행 끝에 멘도사는 과라니족을 만나게 되고, 과라니족의 남자는 칼을 든 채 그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는 멘도사를 찌르는 것이 아닌, 그의 밧줄을 잘라 그를 자유롭게 만들어주죠. 멘도사는 울부짖고 과라니족은 그에게 다가와 그를 용서합니다.
전 이 장면이 아주 인상 깊었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전 이 영화를 좋게 보지만은 않았습니다. 과라니족을 바라보는 영화의 시선이 굉장히 불쾌했기 때문이죠. 밀림 속에서 멋진 교회를 짓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미사를 드리는 과라니족을 보며 감탄하는 서양인들의 모습이 뭐랄까, 그들을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닌 교화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영화는 실화를 어느 정도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니 그때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더라도, 영화가 제작된 시대를 고려하더라도 아주 불편한 장면들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좋았던 것은, 과라니족이 멘도사를 용서하는 바로 이 씬 때문이었습니다. 이 씬 하나만큼은 세상에서 가장 좋았던 영화의 장면을 꼽으라 하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그 정도로 좋았거든요.
영화는 이 장면을 통해서 과라니족이 기독교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진심으로 받아들였으며, 나아가 그것을 실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과, 용서, 그리고 화해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지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매주마다 주기도문을 부르면서 다짐하는 말이지만 역시 제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참 힘이 듭니다. '그 사람은 자기가 잘 못한 것일지도 모를 텐데, 내가 왜 그 사람을 용서해야 되지? 내가 바보도 호구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진정한 사과 역시 하기가 힘듭니다. 내가 아무리 잘못한 일일지라도, '내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을 한 건 그 사람이 나한테 잘 못한 것들이 쌓였고, 그게 폭발한 거야. 나는 잘 못이 없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죠.
사과는 내가 일방적으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받아들이든, 들이지 않든 그 행동 자체가 사과인 것이니까요. 용서는 조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용서는 어떨 땐 일방적이고, 어떨 땐 양방적이죠. 사과가 없이도 용서는 가능합니다. 하지만 사과가 없는 일방적인 용서는 그다음 단계인 화해에 도달하지 못합니다.
화해는 상호 간의 동의가 필요한 양방적인 것이자 양 측이 모두 진정한 사과와 용서를 해야만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죠.
과라니족은 멘도사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아들이고 그를 용서하며 자신들의 일원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과라니족과 함께 지내면서 멘도사는 삶의 의지를 얻습니다. 그리고 과라니 족에게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하죠. 그런 멘도사의 말에 가브리엘 신부는 고린도 전서 13장이 적힌 수첩을 건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냅니다.
사랑은 언제까지나 스러지지 않습니다. 예언도 없어지고 신령한 언어도 그치고 지식도 없어집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그 가운데에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그것을 읽고 나서 멘도사는 수도사의 길을 선택합니다. 멘도사의 사과와 과라니족의 용서가 만든 화해였지요. 진정한 사과와 용서, 그리고 그로 인한 화해는 이렇듯, 멘도사가 읽었던 고린도 전서의 말씀처럼 기독교적 '사랑'에서 나온다고 생각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만큼, 내 가족과 친구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설령 잘못을 저 질렀다 하더라도 진심을 담은 사과와, 그 사과를 받아들이는 용서, 그리고 화해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세상은 좀 더 살기 좋은 곳이 되지 않을까,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