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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해 Mar 15. 2021

도도해 씨는 이래서 이별을 준비한다, 002

5분

  요양병원의 대면 면회시간은 10분이다. 10분. 지난해 어버이날 때도 면회시간은 10분이었다. 그때는 오랜만에 본 거라서 면회의 목적은 얼굴 보기보다는 필요한 걸 사다 드리는 시간으로 끝나버렸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면 면회였으니 얼굴색을 살피는 일이 끝나면 문이 닫히는 동안 필요한 게 뭔지에 몰두해 있었다. 이것저것 사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래도 마지막 나오는 길에는 엄마의 두 손을 꼭 잡고 곧 올 테니 조금만 참으라며 다독였다. 그 후 1년 가까이 지나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1년은 아니다. 작년 6월, 새벽에 요양병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엄마가 마지막 고비니 얼른 오라는 전화였다. 새벽에 오는 전화는 달갑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늘 곤경에 빠뜨린다. 잠깐 멍하니 있다가 집안 총무를 맡은 막내 오빠에게 전화해서 소식을 알렸다. 그 소식은 오빠를 건너 큰오빠와 큰언니 등으로 퍼졌다. 나는 급한 마음에 남편과 함께 요양병원으로 갔다.


  엄마는 정신이 혼미해져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다. 의사 말로는 어디선가 자꾸 피가 샌다고 했다. 그래서 피가 부족해서 빈혈기가 있고, 저혈압으로 인해 쇼크가 온 거라고 했다. 예전에는 피를 수혈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법이 바뀌어 수혈할 수 없다고 했다. 코로나 시대에 엄마를 다른 큰 병원으로 옮긴다 해도 나아질 것은 없다고 했다. 현재로서는, 이라는 말이 사형 선고 같았다.


  곧바로 경기도에 사는 큰오빠와 언니가 왔다. 엄마는 내가 갔을 때는 두 눈을 꼭 감고 마치 삐친 사람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오빠가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엄마가 신처럼 생각하는 큰오빠의 손을 놓지 않았다. 큰오빠는 또 큰오빠대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괴로워했다.


  엄마는 1935년생이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7살에 외할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갔다가 사업에 실패한 채로 다시 우리나라로 돌아왔다. 6.25 전쟁을 겪고 한 살 차이 나는 아버지와 결혼했으며 1970년대와 1980년대 힘든 시절을 겪어 오셨다.


 <국제시장>이라는 영화를 보고 펑펑 울었다. 그 영화의 주인공들이 마치 엄마와 아빠의 삶을 대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냥 ‘세월’이 흘렀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고생의 흔적이 발견되어 그 영화를 본 후에는 부모에 대한 원망이 많이 사그라졌다.


  나는 지금도 안전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다. 어릴 적 경험했던 아버지의 학대와 부부싸움 등은 나를 고립의 세계에 던져 놓곤 했다. 술에 취한 아버지를 피해 밤새 또 술 취한 엄마를 붙들고 이리저리 숨어다닌 경험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도 길을 나설 때나 아니면 평온한 날을 보낼 때도 나는 안전에 대해 고민부터 한다. 내가 사람들로부터, 장소로부터, 부당하게 이어지는 폭력으로부터, 말로 상처를 입히는 사람으로부터 안전한 지를 먼저 따진다. 그렇다 보니 늘 우울하다.


  그런 날들이 어느새 부모를 이해하는 쪽으로 바뀌었다. 요즘은 부모가 아이를 때리는 것을 ‘학대’라고 한다. 그 이전에도 그런 말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가 변하다 보니 당연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문제가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가 저질렀던 폭력을 잊을 수 없다. 잊힐 수도 없다. 학대받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분노를 느낀다. 그러나 다만 나는 그 영화를 보면서 말로만 힘들게 살았던 시대가 아닌 눈으로 보는 계기가 되었으며 나 또한 두 딸의 어머니로서 자식을 키우는 고단함에 이해가 되었다.


  아버지는 4년 전에 돌아가셨다. 이해는 했지만 화해는 할 수 없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접한 나는 죽은 사람도 귀가 열렸으니 마지막 인사하라는 말에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진실하게 이야기를 하고 내 마음을 전할 준비가 안 되어 있었다. 슬픔보다는 짐을 벗은 느낌이었다. 요양병원에 적응하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짙었었다. 후회할 줄 알면서도 입을 꾹 다문 채 업무처럼 아버지의 죽음을 식구들에게 알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골에 혼자 남을 엄마를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다. 뭐니 뭐니 해도 엄마는 엄마였다. 술꾼이어서 살림이 엉망이었지만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온전히 전달되었다. 아버지의 폭력에도 자식을 지키려 했으니 자식들도 아버지는 원망해도 엄마는 무조건 불쌍한 사람이라는 생각에 훌쩍거렸다.


  혼자 남아도 잘살겠다는 엄마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한 달도 채 되지 못해 식음을 전폐해서 창자가 들러붙었고 죽음의 길에 올라섰다. 의사는 큰 병원으로 갈 것인지 자신에게 맡길 것인지 선택하라고 했다. 선택, 엄마를 옆에 두면서 가장 많이 고민되는 부분이다. 자식들이 다 경기도에 있으니 유일하게 내가 엄마 옆에 있게 되었다. 게다가 회복되어도 거동이 불편해서 요양병원에 모셔야 했는데 그때 난 내 옆에 두기로 했다. 그건 엄마를 위한 나의 마지막 선물이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어릴 적부터 엄마가 혼자 계시면 무조건 내가 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며느리들도 있었지만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집 근처에 있는 요양병원에 모셨다. 그런데 뜻하지 않게 코로나 사태가 지속하면서 자식의 역할을 다하지 못했다.


  엄마가 요양병원에 들어가신 지 벌써 4년이 되어 간다. 그동안은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뵙는 것도 힘겨웠다. 의무 같아서 버겁게 느껴지기도 했다. 기껏 해 간 반찬을 두고 투정을 한다거나 오빠들을 찾는 엄마를 보면서, 또 다른 엄마들처럼 씩씩하지 못하고 병원에 적응하지 못해 우울증을 겪는 엄마를 보면서 원망하기도 했었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 엄마에 대한 원망도 사그라졌다. 존재만으로도 소중한 존재라는 걸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10분의 면회시간도 다 채우지 못했다. 엄마는 처음에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나를 아느냐고 물었더니 모른다고 했다. 그러다가 이것저것 말을 시켰더니 우리 큰딸의 안부를 물었다. 오빠들이 보고 싶다고 하셨다. 간호사 말로는 밥도 잘 먹고 기억력도 뚜렷하다고 했다. 엄마의 특성상 입을 다물고 계시지만 의사소통을 하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음에 또 올게라는 말을 하고 뒤돌아서는데 5분이 흘렀다. 5분을 만나기 위해 1년을 기다렸다. 5분 동안에 나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하지 못했다. 정신도, 눈도, 기억도 흐릿한 엄마 앞에서 어떤 말로 인사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이상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죽음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기는 엄마의 얼굴이 의외로 평온했듯이, 오랜 기다림 끝에 엄마를 보고 오는 나도 평온하다. 참, 이상한 일이다.


 돌아서면서 문득, 이제부터는 헤어지는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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