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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도해 Jul 28. 2021

도도해 씨는 이래서 이별을 준비한다, 001

준비 없는 이별

  “도대체 왜 그렇게 살아? 창피하지도 않아? 인제 그만하면 안 돼?”     


  다시 주워 담을 수도 없는 말이었다. 그동안 꾹꾹 눌러놓았던 원망이었다. 둑을 무너뜨리듯 한꺼번에 터뜨렸다. 겨우 벌어 대학 등록금을 마련했을 때도 가져갔고, 사고만 쳤고, 돈을 돌려받는 것도 힘들었었다. 동생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고, 40살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형제들에게 손 벌리는 그가 싫었다. 그에게 마음을 쓰는 것도 지쳤다.          


  낮에 법원에 갔다가 전세 보증금을 찾기도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집이 경매에 넘어갔는지도 모른 채 학원을 하겠다고 보증금을 걸어두었었다. 답답해 죽겠는데 오빠가 전화해서 돈을 달라고 했다. 화가 나서 폭탄을 던져버렸다.      


  “미안하다.”     


  오빠의 마지막 말이었다.      


  한 달 뒤 다른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형제도 돈을 달라는 오빠와 비슷하게 우리 집에서는 못난 자식이었다. 달갑지 않았으나 받을 수밖에 없었다.


  “형이 죽었어. 그런데 너무 늦게 발견해서…. 부패가 심했나 봐.”     


  벌써 10년 전이다. 그때는 고독사라는 말도 없었을 때였다. 오빠는 고독사를 당했다. 눈앞이 뿌옇게 변했고 정신도 뿌옇게 변했다. 덜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이들을 시댁에 맡기고 둘만 인천으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장례식장 앞에서 택시에 내리자마자 오열했다. 죽음이 실감 났다. 평소에는 오빠 사정을 다 봐주다가 딱 한 번 거절한 건데 모질게 대 했던 게 평생 죄책감으로 남았다.      


  형제 중에서 가장 나를 좋아하고 예뻐해 준 사람은 셋째 오빠였다. 오빠는 손재주가 좋아 이것저것 다 만들어줬다. 소를 태워 주기도 했고 공장에서 일할 때는 명절에 오면 부르뎅 아동복을 사 오기도 했다. 하나뿐인 여동생에 대한 애착이 심했던 이유는 사랑도 있었으나 오빠 때문에 내가 죽을 뻔했기 때문이다.     


  나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오빠는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다. 내가 백일도 안 되었을 때 나를 업고 나갔다가 다리 끝에 걸터앉다가 둘이 떨어졌다. 나는 오빠의 몸에 눌려 거의 죽을 뻔했고 오빠는 아버지에게 맞아 죽을 뻔했다. 오빠는 성인이 된 내게 가끔 ‘네가 똑똑한 것은 내가 너를 떨어뜨려서 그래.’라며 농담을 했다. 하지만 술을 마시면 펑펑 울며 미안하다고 했다.     


  오빠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미, 안, 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오빠도 8살 난 어린아이였다. 어려서 너무나 두려웠을 것이다. 그 아이의 마음을 달래야 했는데, 아버지는 위로는커녕 생채기를 냈다. 아버지의 성격상 어떻게 때리고 괴롭혔을지 눈에 선하다.     


  오빠가 죽은 후 나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 바뀌었다. 이별에 대한 자세도 바뀌었다. 절대 화가 나거나 죽도록 미운 사람일지라도 이별은 최대한 공손하게 했다. 두고두고 후회하는 순간이 찾아오지 않도록.     


  살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의 죽음을 세 번 만났다. 한 번은 오빠이고, 한 번은 시아버지고, 한 번은 아버지의 죽음이다.     


  오빠와는 준비도 없는 이별을 했고, 두 아버지는 임종은 지켜보지 못했으나 어느 정도 죽음을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죽음으로 인한 이별은 늘 슬프다. 가슴이 저리다. 다른 이들의 장례식장에서도 훌쩍인다.     


  작년에 엄마가 돌아가실 것 같다는 전화를 받았다. 새벽에 요양병원에서 걸려온 전화였는데 갑자기 오라는 전화에 어리둥절했다. 코로나로 인해 면회가 불가했으나 병원에서는 허락했다.     


  ‘나를 제발 죽여줘. 아이고, 나를 데리고 가. 죽여! 죽여!’     


  엄마는 갑자기 쇼크가 와서 정신을 잃었다. 섬망 증세라고 했다. 눈도 뜨지 않고 죽여달라고 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처럼 스스로 음식을 거부한 채 죽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엄마의 모습은 평소에 내가 알고 있던 모습이 아니었다. 낯선 사람이었다. 괴물처럼 보였다. 평소에 순한 양이었으나 늑대보다 더 날카롭게 울부짖었다. 날것의 냄새가 났다.

     

  다행히 진정이 되어 지금까지 별 탈이 없다. 그런데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나는 끝도 없이 밀려오는 이별에 대한 공포로 불안과 불면에 시달렸다. 한 생이 빠져나가는 게 잔인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준비 없는 이별을 했던 오빠의 죽음까지 게워냈다.     


  공포는 순간순간 일상에 스며들었다. 머릿속이 텅 빈 시간이 많아졌고, 술에 취해 혼미해질 때가 많았다. 잠을 자지 못해 예민해졌고 또다시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불었다. 모두 내 탓인 것 같아 몸이 바스러질 것 같았다.          


  <도도해 씨의 이래서 이별을 준비한다>는 엄마를 기록하는 일이다. 1935년생 엄마의 인생은 영화 <국제시장>처럼 현대사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났고, 보따리를 싸서 만주에도 갔었고, 6·25 전쟁도 겪었고, 21세기를 살고 있다.      


  엄마를 기록하면서 이별을 준비한다.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를 두고서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 게 맞냐,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멈추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엄마를 더 오래 기억하고 싶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한, 준비 없는 이별에 대한 내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싶기도 하다.     


  엄마를 기록하다 보니 자연스레 형제들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정말 가까운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가족도 이 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힘들어진다면 미안하다. 그렇지만 우리의 이야기가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동안 너무 많은 상처로 살았으니 이제 툴툴 털고 앞으로는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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