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국민당)과 일본의 전쟁. 두 국가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명운을 건 대전쟁을 치렀다.
■대결로 치닫는 용과 사무라이
1925년 중국 국민당의 창설자인 '쑨원'이 사망한 후 그의 후계자가 누가 될 지에 관심이 집중됐다. 1926년 1월에 열린 제2차 국민당 전국대표대회에서 '왕징웨이'가 공식적으로 국민당의 영수가 됐다. 다만 표면적인 모습만 그랬을 뿐, 실제로는 다른 인물이 실권을 거머쥐었다. 바로 '장제스'였다. 그는 앞서 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후 당내 지위가 갈수록 높아졌고 군대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왕징웨이가 행정적, 사상적 측면에서 강점을 가졌을지 몰라도 장제스의 무력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제스는 1926년 6월에 '국민혁명군'을 완전히 장악하면서 권력의 정점에 올라섰다. 이후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은 2년 넘는 기간 동안 '북벌 전쟁'을 전개, 중국 중부 및 동부 지역 대부분을 차지했다.
1928년 장제스는 중부 도시인 '난징'을 수도로 정한 뒤 새로운 정부를 수립했다. 사실상 중국의 통일 정부였다. (다만 국민당 정부의 통제력이 중국 전역에 미친 것은 아니었다. 난징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은 정부의 통제력이 미비했고 군벌들이 영향력을 행사했다.) 장제스는 제국주의와 공산주의에 대한 반감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19세기부터 수많은 제국주의 열강들이 중국을 침략해 수탈한 역사를 직시했고, 소련 당국과 중국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이 국민당의 통제력을 약화시킨다고 생각했다. 이에 대해 우려감을 나타낸 것은 일본과 중국 공산당이었다. 특히 중국 대륙에 대한 침략 야욕을 갖고 있던 일본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를 적대 세력으로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공산당은 이미 1927년 상하이에서 국민당 군대의 대대적인 공산당 토벌 작전(상하이 쿠데타)을 경험한 바 있는 만큼, 극도의 경계 태세를 갖췄다.
국민당 정부는 집권 초기부터 중국의근대화를 이루기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 도로 등 도시 기반 시설들을 정비했고 직물 등 토착 사업들을 발전시켰다. 중국 경제는 개선세를 보이는 듯했다. 정부는 경제 독립을 달성하려는 모습도 보였다. 대표적으로 80여 년동안 해외 열강들의 통제 하에 있던 관세 자주권을 회복하려 했다. 이는 중국으로 수입되는 상품에 대한 수입관세 세율을 중국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권리를 의미했다. 이러한 움직임들 역시 일본은 우려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일본은 중국이 서서히 회복돼 대등한 힘을 갖추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분히 침략을 염두에 둔 발상이었다. 마침 이 시기에 일본은 '경제 대공황'도 겪고 있었는데, 이를 타개할 수 있는 방안 마련이 시급했다. 그 방안으로서 일본은 만주와 중국 본토에 더욱 눈독을 들였다. 이제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길로 들어서려 했다.
이런 가운데 1931년 9월 18일, 만주 서부에 있는 선양이라는 도시에서 심상치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철로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기실 이는 일본군의 소행이었지만, 일본 관동군은 중국 반일분자들의 소행이라며 즉각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해당 지역에 사는 일본인들의 생명과 안전을 지킨다는 명분을 내걸었다. 나름 출중한 군사력을 갖췄던 관동군은 짧은 기간 내에 만주 전역을 점령했다. '만주 사변'이었다. (관동군은 현지 주민들이 부패한 군벌인 장쉐량에게 반기를 들고 일본에 우호적인 '만주국'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일본군은 점령지에서 한편으론 끔찍한 학살 행위를 저질렀고,다른 한편으론 현지 인프라 투자 등을 통해 주민들을 회유하려 했다. 일본에게 있어 만주 점령은 장차 중국 본토 침략을 위한 예행연습이나 다름없었다.
국민당 정부는 끊임없이 국제 사회에 일본군의 만행을 알렸고 도움을 요청했다. 만주에서 탈출한 사람들은 '둥베이 민중항일구국회'를 조직한 뒤 국민당 정부가 조속히 만주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한편 장제스는 만주 상실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했다. 그러나 카리스마 넘치는 그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군 지휘부와 정부 인사들, 중국인들은 장제스의 복귀를 소망했다. 장제스는 이들의 바람대로 복귀했고 되려 이전보다 입지가 강화됐다. 정적이었던 왕징웨이 등도 끌어들여 (군사적 권한은 없는) 주요 직책을 맡게 했다. 장제스는 만주 사변을 통해 일본의 야욕을 확실히 눈치챘다. 일본군이 만주에 머무르지 않고 머지않아 중국 본토로 밀고 내려올 것이라 확신했다. 전면 전쟁을 직감한 것이다. 전쟁 대비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1932년 11월 '국방계획위원회'가 설치됐고, 전쟁 발발 시 공급할 수 있는 자원들에 대한 조사와 생산 지시 등이 이뤄졌다. 또한 독일인인 한스 폰 제크트와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을 군사고문단장으로 영입해 중국군이 독일식 훈련을 받도록 했다.
다만 장제스에게는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당장 일본과 싸우기에는 중국군의 역량이 부족했고, 눈엣가시였던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도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장제스는 1933년 5월 일본과 '탕구 협정'을 체결했다. 장제스는 만주국의 존재를 인정했고 만리장성과 베이핑, 텐진 북쪽 지역을 일본군이 감독할 권한을 갖는 비무장 지대로 만드는 데 동의했다. 비록 굴욕적인 협정이었지만 전쟁에 대비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동시에 장제스의 국민당 군대는 초공 작전을 전개했다. 공산당은 토벌을 피하기 위해 모택동의 지휘 하에 1934년 시베이로의 '대장정'을 단행하기도 했다. 공산당은 1만 2000km를 도보로 행군했고 당초 9만 명에서 7000명 만이 시베이 옌안에 도착했다. 국민당 군대는 공산당을 크게 약화시키긴 했지만 완전히 토벌하진 못했다. 일본과의 전쟁 분위기가 크게 고조됐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일본과 전쟁을 치르는 데 있어 (중국 공산당의 뒷배인) 소련의 원조가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소련 역시 나치 독일 등에 대항한 국제 반파시즘 전선을 선언했고, 중국 공산당은 장제스의 명령을 따르라고 지시했다.자연스럽게 국민당과 공산당 간 연대 분위기가 형성됐다.
1936년 12월 국공 합작에 쐐기를 박는 사건이 발생했다. 장제스가 시안에서 납치 구금됐다. 해당 지역 군벌인 '장쉐량' 등이 이 사건을 일으킨 주체였다. 그의 행위엔 복합적인 동기가 작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선 장제스가 일본의 위협은 등한시하고 같은 중국인들(공산당)과 싸우는 데에만 집중한다며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 또 다른 동기는 장제스가 본인을 쫓아낼 수도 있다는 우려였다. 잠시동안 장제스의 운명이 불투명해 보였다. 소련을 비롯한 주요 열강들과 중국 국민들은 장제스를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직시했다. 이러한 시각은 장쉐량 등도 공유하고 있었다. 조만간 석방 협상이 열렸다. 장제스는 항일통일전선을 굳건히 하겠다는 약속을 한 뒤 풀려났다. 중국 전역에서 대원수 장제스의 석방을 열렬히 환영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그만큼 이 시기에 장제스는 명실상부 국가 최고 지도자로서 인정받고 있었다. 이후중국이 급속도록 대일 강경 노선으로 나아갈 때, 일본에서도 강경한 움직임이 나타났다. 1937년 6월비교적 온건파였던 하야시 내각이 물러났고 새로이 '고노에 후미마로' 내각이 들어섰다. 외무대신으로 임명된 히로타 고키는 대표적인 대중 강경파였다. 중국과 일본의 무력 충돌은 이제 초읽기에 들어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