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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Aug 02. 2024

'중일 전쟁'-미국의 참전, 공포정치

[4] 망각된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

1943년 11월 22일부터 26일까지 열린 이집트 '카이로 회담'. 장제스는 이 회담을 통해 자신과 중국의 국제적 위신을 드높이는 듯했지만, 이내 한계에 부딪혔다.

■미국의 참전

일본군은 전쟁 발발 이후 전반적으로 승전을 거듭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전쟁 동력이 약화되고 있다고 판단했다. 기본적인 전력에서 중국군을 압도했지만, 워낙 중국 영토가 거대하고 중국군과 국민들의 항전 의지가 거세다 보니 승전을 원활하게 이어가는 게 힘들어졌다. 이에 중국의 전시 수도인 충칭으로 가열하게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일본은 석유 등 '자원'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장기전으로 치닫는 중국과의 전쟁을 지속가능하게 수행하려면 충분한 자원이 뒷받침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본은 중국 대륙 아래에 있는 '동남아시아'로 눈길을 돌렸다. 동남아에는 일본이 전쟁을 감당할 만한 수준의 자원이 매장돼 있었다. 미국은 일본의 움직임을 우려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봤다. 원래 일본의 중국 침략도 탐탁지 않게 여겼던 미국은 그들이 동남아에서까지 활개 치는 것을 묵과할 없었다. 루스벨트 행정부는 일본에 설득과 경고를 번갈아가며 했다. 그러나 일본군은 크게 개의치 않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남부로 진출했다. 미국은 강력한 제재에 들어갔다. 특히 '대일 석유 금수조치'를 단행했는데, 당시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에서 수입했던 일본은 치명타를 입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은 일본군이 동남아는 물론 중국 대륙에서 철수한다면 제재를 풀어줄 것이라고 밝혔다. 말을 듣지 않는다면 더욱 강력한 제재를 단행할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깊은 고심에 빠졌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그동안의 성과들을 내려놓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미국과 대결로 가는 것도 쉽지 않았다. 미국은 지금껏 상대한 국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기본적으로 엄청난 자원과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전시 체제로 전환 시 군사력은 예측 불가능한 수준으로 강대해질 것이었다. 그럼에도 일본은 최종적으로 미국과의 대결을 선택했다. 1941년 10월 초강경파인 '도조 히데키' 내각이 출범했다. 수뇌부는 미국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은 치욕적인 굴복이며, 기습공격을 통해 미국의 군사력을 무력화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협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수뇌부 중 일부 사람들은 미국의 어마어마한 군사적 역량을 걱정하며 고집스럽게 전쟁 반대를 외쳤다.) 1941년 12월 7일, 일본군 전투기들이 6척의 항공모함에서 대거 출격했다. 이들의 공격 목표물은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는 미 태평양 함대였다. 비교적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던 미군의 머리 위에서 난데없는 폭격이 시작됐다. 방어가 전혀 돼있지 않았던 미군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날 거의 모든 함대가 파괴됐고 약 2500명에 달하는 미군이 목숨을 잃었다. 루스벨트는 즉각적으로 반응했다. 의회 연설에서 "치욕적인 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한 뒤 일본을 비롯한 추축국들에게 선전포고했다. 마침내 영국의 윈스턴 처칠과 장제스 등이 소망했던 미국의 참전이 이뤄졌다.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써서 "새로운 공동의 전쟁에 헌신하겠다"라고 약속했다. 국민들에게는 "전 세계의 90%가 참전했고 중국을 포함한 연합국이 자유, 정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라고 강조했다. 홀로 외롭게 싸웠던 중국에게 이제 미국과 영국이라는 매우 든든한 우군이 생겼다. 암울했던 충칭에는 미국인들이 자주 눈에 띄면서 모처럼 활기가 넘쳤다. 비록 전투 병력이 들어온 것은 아니었지만 미국 관료들과 군 관계자들이 찾아와 한편임을 암시했다. 중국인들의 얼굴에는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안도감과 기쁨이 넘쳐났다. 좋은 현상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제스는 그동안의 희생을 감안할 때 중국이 동등한 열강으로 대우받을 자격이 충분하며, 명실상부 연합국의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미국, 영국 등은 중국을 주요 동맹국이나 핵심 전장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는 소련을 대하는 자세와 극명히 대비됐다. 그만큼 중국군의 군사적 역량과 중국인들의 항전 의지를 과소평가했던 것이다. 다만 6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에 배치되지 않도록 중국 대륙에 묶어두고 있다는 점에서는 효용 가치가 있었다.


장제스는 중국에 파견된 미군 고문인 '조지프 스틸웰'과 큰 마찰도 겪었다. 일본군이 버마 로드를 통한 충칭으로의 군수물자 공급을 차단하고 영국령 인도의 동쪽 측면을 취약하게 만들려 할 때, 스틸웰은 중국군 정예병력을 동원해 타웅우 등에서 공격적으로 나간다면 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장제스는 다른 연합군의 지원이 불충분한 상황이고, 만약 정예병력인 제5군과 제6군을 잃는다면 중국 서남부에 대한 방어가 어려워질 있다고 우려했다. 이에 스틸웰의 주장에 손사래를 쳤다. 스틸웰은 장제스를 겁쟁이라고 비난했다. 여기에는 장제스와 중국군을 몇 수 아래로 보는 오만한 인식도 자리 잡고 있었다. 장제스는 대립 일변도로만 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마지못해 스틸웰의 작전을 승인했다. 결과는 그의 예상대로 참패였다. 일본군은 스틸웰의 작전 계획 하에 움직이는 군대를 격파했다. 중국군 2만 5000여 명, 영국-인도군 1만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충칭으로 연결되는 보급로도 차단됨에 따라 중국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될 위기에 처했다. 그런데 스틸웰의 오판으로 발생한 버마 참사는 미국, 영국 등이 중국의 전쟁 수행 능력을 더욱 불신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지휘관의 잘못된 판단보단 뿌리 깊은 편견의 대상에게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또한 미군은 자국 전투기들의 운용과 관련한 정보를 중국군에게 절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아마추어적인 중국군에게 정보를 알려줄 경우 그것이 일본군에게 넘어갈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장제스와 중국군은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였다. 이처럼 동맹은 상당히 불평등한 관계를 기반으로 했다. 장제스는 "동맹이 속 빈 강정에 불과하다"라고 한탄했다.


민생 악화, 공포정치

일본군은 태평양 전쟁 초반에 승전을 거듭했다. 미군이 기습공격의 충격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기까진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일본군의 승승장구로 인해 중국은 더욱 고립됐고 군사적, 경제적 위기가 높아졌다. 이 시기에 국민당 정부는 군사적 필요에 의해 새로운 정책을 추진했다. 식량으로 세금을 내는 것, 즉 현금 대신 곡물로 토지세를 납부하게 했다. 군대를 뒷받침할 군량을 효과적으로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정부는 1942년부터 매년 약 300만 톤의 곡물을 징발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은 이미 취약해진 민생에 심대한 타격을 가했다. 가뜩이나 흉작 등으로 쌀 수확량이 급감하는 가운데, 먹거리를 비축하지 못한 수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됐다. 문제점이 두드러진 곳은 중부 지역에 있는 '허난성'이었다. 이미 황허강 대홍수 여파로 크게 취약해져 있었던 이곳에선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풀뿌리를 캐고 나무껍질을 벗겨 먹는 일이 흔했다. 거리에는 구걸하는 걸인들과 굶어 죽은 시체들이 넘쳐났다. 소량의 음식물을 구하기 위해 자식을 팔아넘기는 인신매매 현상도 벌어졌다. 심지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인육'도 행해졌다고 한다.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한 정부가 곡물 징발 할당량을 줄인다고 했지만, 지역 관리들이 이를 무시하고 자의적으로 과도한 곡물을 징발하곤 했다. 엎친 덮친 격으로 '인플레이션'도 극성을 부렸다. 정부는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화폐를 대량으로 찍어냈다. 이에 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당시 국민들의 소득으론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었고 민생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옌안도 경제 상황이 매우 안 좋았지만, 공산당은 최하층에 대한 세금 면제와 수탈 억제 등을 통해 차별화된 모습을 보였다. 이로써 공산당이 대안으로 부각될 수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흔들리는 민심을 통제하기 위해 '공포정치'를 행하는 무리수를 두기도 했다. 초기에 잠깐 선보였던 개혁과 개방, 다원주의적인 측면은 전쟁과 혼란이라는 실존적 위협 앞에서 온 데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이제 스탈린식 통치가 발현되고 있었다. 공포정치를 주도한 것은 장제스의 최측근인 '다이리'였다. 장제스에 의해 방첩부대장으로 임명되기도 했던 다이리는 상당히 잔인한 인물이었다. 장제스나 정부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모든 이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진정한 죽음의 사자"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다이리가 전쟁 중에 설립한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납치, 고문, 처형을 빈번하게 행함으로써 악명이 높았다. 이 기관의 표적에는 공산당도 당연히 포함됐다. 정치범 수용소인 '바이궁관'에서는 매일마다 잡혀온 사람들의 끔찍한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이리는 자신의 행위가 진정으로 국가를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내부를 다잡아야만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스스로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장제스도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었기에 다이리의 행위를 방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방식이 일시적으로 효과를 거뒀을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민심이 국민당 정부에게서 등을 돌리는 결정적 계기로도 작용했다. 한편 모택동의 공산당도 '캉성'이라는 인물을 앞세워 '반혁명분자' 등으로 규정된 사람들을 대거 숙청하며 권력 기반을 공고히 했다. 캉성은 소련의 비밀경찰인 NKVD(내무인민위원부)의 수장 '예조프'에게서 숙청 방식을 배워왔다. 이에 전형적인 소련식 숙청 기법을 사용, 정적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을 국민당의 간첩으로 몰아 죽였다. 사실상 국민당과 공산당 모두 극도로 혼란스러운 사회상 앞에서 폭력과 강압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출렁이는 장제스와 중국의 위신

1942~1943년에 세계대전의 향방은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다. 태평양 전쟁 초반에 줄곧 밀렸던 미군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군을 대파했다. 전세 역전을 거머쥔 미군은 일본군을 거세게 밀어붙였다. 유럽에서도 소련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군에게 대승을 거둠으로써, 승리의 무게추가 연합군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일본군은 전략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전개했던 공세에서 물러나 일본 본토와 점령지에 대한 방어 및 현상유지를 하는 쪽으로 선회했다. 중국과의 전쟁도 가급적 확대하지 말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중국군의 입장에서 당분간 과거와 같은 혹독한 공세가 이뤄지진 않을 것이라는 긍정적 분위기가 생겼지만, 진절머리 나는 폭격과 교착상태는 계속 이어질 것이었다.


장제스는 수많은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내적으론 그 위신이 높은 편이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는 지극히 낮았다. 상술했듯 중일 전쟁 전후로는 물론 중국이 연합국의 일원이 됐을 때에도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특히 영국의 처칠은 중국과 장제스를 노골적으로 경멸했다. 연합국 지도자들이 모이는 회의에 장제스는 좀처럼 참여할 수 없었다. 이념적으로 판이한 소련의 스탈린은 그 중요성을 인정받아 언제든 참여해 자기 목소리를 냈다. 그런데 극적인 변화가 1943년 11월에 찾아왔다. 이집트 '카이로'에서 중일 전쟁의 포괄적 해결 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정상회담이 열렸는데 장제스도 여기에 초대를 받았다.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과 함께였다. 그는 "내가 외교무대에 모습을 드러내기는 처음"이라면서 이 회담에 상당한 의미부여를 했다. 일순간 대외적 위신이 상승한 장제스가 회담장에서 강조할 것은 명백했다. 중국이 새로운 국제 질서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버마 탈환 작전 시 연합군의 적극적 원조 등이었다. 장제스의 바람과는 달리 한계도 명백했다. 그의 강조점은 제대로 수용되지 않았다. 중국의 지위와 관련해 별다른 논의가 오고 가지 않았던 것이다. 처칠은 중국이 전후 새로운 강대국이 되는 것을 결단코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임없이 견제구를 던졌다.


장제스는 버마 탈환 작전의 일환으로 영국군과 중국군이 함께 하는 타잔 작전을 지지했다. 이와 더불어 연합군이 벵골만을 통해 안다만 제도를 점령하고 동남아에서 일본군의 보급로를 위협하는 '벵골만 상륙작전'(해적 작전)을 추진하길 희망했다. 이것이 현실화되면 중국군의 버마 탈환은 한층 수월해질 터였다. 처칠은 탐탁지 않게 여겼지만 미국과 영국은 장제스의 희망을 수용했다. 서구 열강들을 중국과 관련된 전선에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 것은 성취였다. 그동안 중국이 항상 관심 대상에서 멀어져 있었던 만큼, 장제스는 이를 매우 긍정적으로 여겼다. 나아가 시간이 갈수록 자신과 중국의 위신이 높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안쓰럽게도 이 생각오래가지 못했다. 루스벨트와 처칠며칠 뒤에 열린 '테헤란 회담'에서 스탈린의 요구에 따라 벵골만 작전을 없던 일로 했다. 스탈린은 "무조건 유럽 전선이 우선돼야 하며 독일을 하루빨리 패망시키기 위해 '오버로드 작전'(노르망디 전투)이 펼쳐져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이에 미국과 영국이 오버로드 작전에 집중하기로 함에 따라 중국의 전선은 또다시 후순위로 밀렸다. 장제스와 중국의 위신은 마치 롤러코스터처럼 출렁였다. 장제스는 깊은 실망감과 함께 우려감을 드러냈다. 서방의 결정은 일본으로 하여금 위험한 선택을 하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미국과 영국이 중국에 관심이 없다는 것을 드러냄으로써, 일본군이 안심하고 '총공세'에 나설 수도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과연 이 불길한 예측은 머지않아 들어맞았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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