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식 Aug 06. 2024

'중일 전쟁'-일본군의 총공세, 외력에 힘입은 승리

[5] 망각된 동아시아 최악의 전쟁

장제스가 1945년 8월 15일 전시수도 충칭에서 항일전쟁 승리를 선포한 뒤 방송국을 나서고 있다. 충칭 시민들은 장제스를 연호했다.

■일본군의 총공세

장제스는 루스벨트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군이 조만간 공세에 나설 것이고 중국은 일본군의 강력한 무력 앞에 내버려질 것"이라고 밝혔다. 미군과 영국군은 장제스의 예측에 콧방귀를 뀌었다. 일본군이 방어에 집중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장제스의 예측은 신경과민으로 취급받았고 서방의 예측이 좀 더 합리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일본군은 버마와 중국 본토에 대한 총공세를 단행하기로 결정했다. 뜻밖의 초강수였다. '이치고'라고 명명된 군사작전은 중국 중부 지역을 관통하는 작전으로써, 약 50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이 철도망을 따라 중부에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이르는 교통로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중부 지역에 있는 미군 비행장들을 파괴하는 것도 목표로 삼았다. '우고'라고 명명된 군사작전은 약 10만 명의 일본군이 버마 북부에서 인도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일본군의 이 같은 결정의 기저에는 '도박 심리'가 깔려 있었다. 전황이 매우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지만, 오히려 이때 과감한 작전을 통해 허를 찌른다면 미국과 협상의 여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1944년 4월 일본군은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엄청난 규모와 기세로 허난성을 공격했다. 중국군은 허겁지겁 방어에 나섰지만 맹렬하게 들어오는 일본군 앞에서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제스를 제외한 대부분의 중국군 구성원들은 일본군의 총공세를 예측하지 못했다.) 중국군은 통신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부대 간에 원활한 의사소통도 이뤄지지 않아 지리멸렬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군뿐만 아니라 허난성에 있는 일부 주민들도 중국군을 겨냥한 공격에 가세했다. 이들은 세금 납부 등에 있어 자국 군대가 보인 착취에 가까운 행위에 불만이 크게 누적된 상태였다. 장제스와 중국군은 '배신'과 다를 바 없는 허난성 주민들의 행위에 경악했다. 수많은 악재들로 인해 중국군은 3주 만에 비참한 퇴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뒤이어 창사가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중국군은 몇 년 전에 창사 방어를 성공적으로 해낸 경험이 있었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열세여서 버티기 어려울 것처럼 보였다. 더욱이 장제스가 창사 방어를 책임진 '쉐웨'를 미워해 지원군을 보내지 않으면서, 단기간 내에 도시의 운명이 결정됐다. 창사도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일본군의 다음 표적이 된 곳은 '헝양'이었다. 장제스는 쉐웨를 제치고 자신의 측근인 팡셴줴를 헝양 방어전에 투입했다. 초반에는 중국군이 방어에 성공하는 듯했다. 하지만 전쟁 물자가 빠르게 떨어져 한계를 드러냈다. 장제스는 물자를 지원하는 대신 주변에 있는 군대를 헝양으로 이동시켰다. 중국군은 앞선 허난성 및 창사 전투와 달리 헝양에선 가열하게 싸우는 모습을 보였다. 다만 일본군을 최종적으로 막아내지 못하고 퇴각했다.


일련의 전투 결과는 일본군의 파죽지세, 중국군의 치명적 패배 또는 붕괴로 요약될 수 있다. 일본군은 불과 몇 개월만에 믿을 수 없는 승전을 기록했다. 중국군은 영토를 잇따라 내준 것은 물론 8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대참사를 겪었다. (버마 전선에선 영국군의 맹활약으로 일본군이 완패했다. 이제 육로를 통해 중국으로 보급 물자를 보낼 수 있게 됐다.) 장제스와 중국군은 절망감과 패배주의에 휩싸였다. 미국과 영국도 별안간 벌어진 이 같은 전황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서 장제스와 중국군을 거칠게 비난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일 전쟁 초반에 보여줬던 중국군의 높은 항전 의지는 온 데 간 데 없고, 안일하고 무기력한 돼지만이 남아있다고 혹평했다. 풍부한 곡창지대 상실, 헤아릴 수 없는 피란민들 감당, 인플레이션 극대화 등으로 국민당 정부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비관적인 전망도 나왔다. 미국은 심각한 상황을 좌시하지 않고 장제스와 중국에 압박을 가했다. 루스벨트는 미국인 장성을 중국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라고 요구했다. 장제스는 지도력을 상실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을 느꼈다. 나아가 미국 일각에선 국민당 정부의 대안으로써 옌안에 있는 공산당에 주목하는 모습도 나타났다. 장제스와 갈등을 빚고 있는 스틸웰도 공산당을 전쟁에 적극적으로 개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미국 외교관인 존 데이비스 주니어 등이 옌안으로 가서 모택동과 공산당 인사들을 접촉하기도 했다. 시찰단은 옌안의 검소한 사회상과 모택동의 문화 정책 등을 높이 평가했다. 장제스에 대해선 은근히 비하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장제스가 입은 정신적 타격은 컸다. 그는 "미국인들이 내 정신을 극도로 압박하고 있다. 나에게 공산당과 타협하라고 강요한다. 제국주의 속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라고 썼다. 한 때는 '자진 사임'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과거처럼 자신이 물러났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혼란을 상기시키고 사실상의 재신임을 얻어내려는 요량이었다. 하지만 최종 결정 단계에서 사임 카드를 접었다. 사임 파동으로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들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장제스에 대한 미국의 압박은 끊이지 않았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버마 북부에서 중국군을 철수시켜선 아니 되며 더 많은 군대를 파견하라고 요구했다. 아울러 스틸웰이 중국군 전체를 제한 없이 지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에게 스틸웰은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스틸웰은 장제스와 중국군을 얕잡아봤고 자기 마음대로 군대를 운용하려 했다. 특히 버마에서 고집스러운 입장을 취하는 바람에 중국군의 전력을 그쪽으로 크게 빨아들였고, 중국 본토에 대한 효과적 방어를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나왔다. 앞으로도 스틸웰은 장제스와 중국군의 처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독단적인 언행을 할 터였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판단한 장제스는 강경한 태도를 선보였다. 루스벨트에게 스틸웰의 부정적인 면모들을 상세히 열거하며 대놓고 해임시킬 것을 요구했다. 나름의 반전 모멘텀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먹혀들었다. 장제스에게 우호적인 대통령 특사 '헐리'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연합군 내 갈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에게 있어 궁극적인 문제는 미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일본군은 어느덧 중남부 지역을 거쳐 충칭으로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중국 국민들은 갑자기 찾아온 패전 위기에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며 피란길에 올랐다.


■외력에 힘입은 승리

중일 전쟁이 발발한 이래 중국에 가장 큰 타격을 줬던 이치고 작전은 조만간 전쟁을 일본군의 승리로 귀결시킬 듯했다. 작전 개시 직전까지만 해도 이 같은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 못한 중국군과 국민들은 공황 상태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했다. 벼랑 끝까지 내몰린 상황 속, 다행히 중국은 극적으로 '기사회생'할 수 있었다. 1944년 12월 이치고 작전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 미군은 사이판 등을 점령함으로써 일본 본토를 직접적으로 위협할 수 있게 됐다. 급박하게 돌아가는 태평양 전황이 중국에서의 일본군 진격을 멈추게 한 결정적 요인이었다. 장제스는 다시금 희망을 가졌다. 앞서 종양과도 같았던 스틸웰을 본국으로 소환시키는 데 성공했고, 사실상 같은 편으로 여겨지는 헐리가 정식 대사로 임명되기까지 했다. (헐리는 미국이 공산당에 대한 유화책을 끊고 장제스에게 힘을 싣도록 만들었다. 이에 장제스의 영향력이 강화됐다.) 다만 이치고 작전의 후폭풍이 워낙 거셌던 만큼 여전히 뚜렷한 열세에 놓여 있었다. 중국군은 더 이상 비참한 상황에 처하지 않기 위해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중일 전쟁의 판도를 최종 결정지을 요인은 외부에서 싹텄다. 1945년 초에 이르러 나치 독일이 유럽에서 패망할 것이 확실시됐다. 2월 4일 흑해 연안에 있는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 정상들이 모여 전후 국제질서에 대해 논의했다. 여기서 유럽뿐만 아니라 아시아에 대한 논의도 진지하게 오고 갔다. 루스벨트는 스탈린에게 소련군이 이른 시일 내로 대일 전에 참전할 것을 요구했다. 미군이 단독으로 싸울 경우 태평양 전쟁은 1~2년 더 소요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소련군 참전이 절실한 과제였다. 스탈린은 루스벨트의 요구를 수용하는 대신 몇 가지 조건들을 내걸었다. 만주에서의 각종 이권 보장, 외몽골에 대한 영향력 행사, 쿠릴 열도 및 남부 사할린 섬에 대한 지배권 보장 등이었다. 루스벨트는 장제스에게 알리지 않은 채 해당 조건들을 비밀리에 수락했다. 스탈린은 유럽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면 90일 이내에 대일 전에 참전하기로 했다. 아울러 그는 루스벨트의 추가적인 요구도 들어줬다. 소련이 중국 공산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유럽 전장에서의 포성은 5월 8일에 완전히 멎었다. 나치 독일은 연합군에 무조건 항복했고 히틀러는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이제 전 세계의 이목은 아시아로 집중됐다. 미군은 일본 본토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고, 은밀히 개발한 '원자폭탄'을 사용할 시점을 저울질했다. 장제스는 충칭 방어와 동부 지역 탈환 계획에 한껏 신경을 쓰는 한편, 아시아에서 영향력이 증대될 소련으로 친아들을 보내 스탈린과 협상했다. 스탈린은 장제스만을 중국의 통치자로 인정할 테니 루스벨트와 비밀리에 합의한 내용들을 수용하라고 강요했다. 장제스는 크게 분노했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그는 소련군이 조만간 대일 전에 참전할 것이라는 정보도 취득했다. 비록 자력은 아니지만 중일 전쟁에서 중국이 최종 승전할 것이라는 확신이 생겼다. 8월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모인 '포츠담 회담'에서 일본에 대한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지금 즉시 무조건 항복을 하지 않으면 '신속하고 완전한 파괴'에 직면할 것이라는 경고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항복이 아닌 '1억 총 옥쇄론'을 운운하며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고 밝혔다.


8월 6일 미군은 히로시마를 표적으로 한 폭격기를 띄웠다. 여기에는 '리틀 보이'라고 이름 붙여진 폭탄이 실려 있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이 폭탄은 순식간에 약 7만 명에 달하는 일본인들을 즉사시켰다. 도시 곳곳은 쑥대밭이 됐다. 일본 수뇌부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광경에 혀를 내두르며 공포에 휩싸였다. 3일 뒤 소련군이 대일 전에 참전했다. 이들은 엄청난 속도로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향해 진격했다. 이미 전의를 상실한 일본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같은 날에 나가사키에 두 번째 원자폭탄인 '팻 맨'이 떨어져 약 4만 명의 일본인들이 죽었다. 일왕과 도조 내각은 버티는 게 힘들다고 판단했다. 결국 8월 14일 기존 입장인 총 옥쇄론을 접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중국에서 일왕의 항복 선언을 접한 일본군은 무장을 해제하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후 중국군은 일본군이 점령했던 지역을 차례차례 수복했다. 마침내 외력에 힘입은 중국이 중일 전쟁에서 최종 승리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장제스는 가장 먼저 감사기도를 드렸고, '악인을 멸하시고 그들의 이름을 영원히 지우셨도다'라는 시편 9편의 말씀은 진실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다음 라디오 방송국으로 가서 "암흑의 시기와 8년의 분투 끝에 우리 정의의 신념이 보상받았다"라고 말하며 승전 소식을 널리 알렸다. 중국인들은 처참하고 지긋지긋했던 전쟁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에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전후 중국의 위상은 많이 달라졌다. 1842년 이래 처음으로 완전한 독립국가로 설 수 있었고 새로운 국제기구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할 강대국이 됐다. 하지만 중국인 2000만 명이 목숨을 잃고 주요 도시가 철저히 파괴되는 등 막대한 희생 위에 세운 씁쓸한 성취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이제 중국인들은 평화를 기반으로 국가 재건을 해야 할 과제를 떠안았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됨이 명백해졌다. '국공 내전'이라는 새로운 전쟁의 구렁텅이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전 04화 '중일 전쟁'-미국의 참전, 공포정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