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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Aug 16. 2024

'국공 내전'-국민당의 파상공세, 공산당 심장부 함락

[2]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국공 내전. 국민혁명군은 초반에 파상 공세를 펼치며 전쟁 주도권을 쥐었다.

■국민당의 파상 공세

시점에 대한 논란은 있지만 공식적으로 1946년 6월 26일을 국공 내전 개전일로 본다. 내전 발발 당시, 국민당과 공산당의 군 전력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국민혁명군의 총병력은 430만 명이었다. 육군은 물론 16만 명의 공군과 3만 명의 해군 전력도 갖추고 있었다. 자동화기, 화포, 로켓포, 탱크 등 무기도 다양했고 질적인 측면도 우수했다. 홍군의 총병력은 127만 명이었다. 해군과 공군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국민혁명군에 비해 무기 및 장비가 열악했다. 장제스는 압도적인 전력에 기반해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는 정전 유효 기간이 끝나갈 무렵, 20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동시켜 공산당의 주요 근거지에 대한 공격 태세를 갖추게 했다. 마침내 때가 이르자 국민당 정부는 하얼빈, 장쑤성 북부, 산시성 서부 등 주요 지역에서 공산당이 완전히 물러나라는 최후통첩을 했다. 이게 먹히지 않자 곧바로 공산당의 '중원해방구'를 공격했다. 대륙 한복판에 위치한 이곳 주변에는 수천만 명의 인구와 드넓은 면적이 있었다. 난징 등 핵심 지역으로도 연결됐다. (이전에 국공은 중원 지대에서 무력 충돌을 억제하는 한커우 협정을 체결했으나, 국민혁명군은 이를 무시하고 지속적인 공격을 가해왔다.) 홍군은 국민혁명군을 상대하기엔 너무 미약했다. 큰 타격을 받아 구석진 곳으로 밀려났고 이내 국민혁명군에 포위됐다. 전멸을 우려한 홍군은 자발적으로 다른 곳으로 이동하겠다고 했지만, 장제스는 홍군을 모조리 소탕하라고 지시했다. 다급해진 저우언라이 등은 마셜에게 "정전협정을 위반한 국민당을 막아달라"라고 호소했다. 이에 중원해방구 중심지에 시찰단이 파견됐고 국민혁명군의 공세가 1개월 이상 지연됐다. 결과적으로 미국이 또 공산당을 도와준 셈이었다. 홍군은 공격이 지연된 사이 필사의 탈출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고, 실제로 부대를 분산해 포위망을 벗어나는 데 성공했다. 다만 탈출 과정은 지극히 고되었고 1만 명 넘는 병력이 전사했다.


장제스는 내전을 빨리 끝내고 싶어 했다.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가 발전을 위해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공산당에 거듭 최후통첩을 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신속한 추가 공세를 명했다. 그런데 이 시기에 홍군이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전투에서 눈에 띄는 승전도 기록했다. 대표적인 것이 '쑤위'의 '화중 전투'다. 국민혁명군은 리모안의 지휘 하에 공세에 나섰다. 병력 규모 등에서 우세했기에 누가 봐도 국민혁명군의 압승이 예상됐다. 쑤위는 병력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할 만한 전략을 갖고 있었다. 병력의 집중 운용과 기습, 매복, 각개격파 등이었다. 홍군은 은밀하고 신속히 기동한 뒤, 쉬안자바오와 루가오 남쪽 등에서 국민혁명군을 기습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때로는 의도적으로 하이안과 같은 지역을 내주는 등 기만책을 펼쳤고, 영문도 모른 채 뒤쫓아오는 적군을 유인해 포위 섬멸하기도 했다. 국민혁명군이 화이인을 공격할 때에는 홍군이 은밀히 우회한 다음 적군의 측면을 기습공격해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국민혁명군은 우세한 병력을 갖고도 고전을 면치 못했고, 1개월 반 동안 총 5만 명이 넘는 병력이 소멸됐다. 결국 리모안은 후퇴를 명했고 쑤위는 기발한 전략으로 승리를 거뒀다. 이후 리모안은 지휘관 직에서 해임됐고 쑤위는 '7전 7첩의 명장'으로 널리 회자됐다. 홍군은 산둥성 서남부에 있는 '딩타오'에서도 대승을 거뒀다. 류보청과 등소평이 이끄는 홍군은 진격하는 국민혁명군 2개 사단 사이의 간격이 벌어진 틈을 타, 앞서 가는 부대를 기습공격해 궤멸시켰다. 뒤따라 오는 부대에게도 맹공을 가해 큰 전과를 올렸다.  


홍군이 일부 전투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전황에 큰 변화를 줄 정도는 아니었다. 머지않아 국민혁명군은 푸쭤이의 맹활약에 힘입어 큰 승리를 이어갔다. 산시성 제2의 도시이자 교통의 요지인 '다퉁'은 홍군이 꼭 점령하길 희망하는 곳이었다. 공산당 해방구가 있는 진차지군구와 진쑤이군구 사이에 있는 만큼, 다퉁을 획득하면 두 해방구를 용이하게 연결할 수 있었다. 홍군 일부가 다퉁을 공격했고 또 다른 부대는 외곽 지대인 잉현을 점령한 후 다퉁 공격에 합류하기로 했다. 방어하는 국민혁명군에 비해 홍군 규모가 훨씬 커서 상당히 유리해 보였다. 다퉁에 있는 국민혁명군은 옌시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여건상 지원이 어려웠다. 그나마 다퉁을 지원할 만한 부대는 구이쑤이에 있는 푸쭤이였다. 정예부대를 거느렸던 그는 고심 끝에 다퉁에 대한 직접적 지원이 아닌 그 북쪽에 있는 지닝과 (지닝 방어의 요지인) 줘쯔산을 공격하기로 했다. 뜻밖의 결정이었지만 푸쭤이는 나름의 전략이 있었다. 다퉁에 대한 직접적 지원은 무리였기 때문에, 일단 지닝을 점령한 후 동남쪽으로 진격해 홍군의 다퉁 포위를 풀겠다는 것이었다. 우선 푸쭤이의 국민혁명군은 강력한 포격을 퍼부어 줘쯔산을 신속히 함락시켰다. 그런 다음 지닝을 겨냥해 맹공을 가했다. 홍군은 주력 방어 부대를 다른 곳으로 보내는 등 실책을 연발해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어느덧 국민혁명군이 지닝을 지나 다퉁을 구원하러 왔다. 그러자 다퉁을 포위하고 있던 홍군은 별안간 협공을 당할 위기에 처했다. 결국 포위를 풀고 급히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국민혁명군은 열세였던 병력으로 다퉁 방어와 지닝 점령 등에 성공하면서 화북 지대의 주도권을 확실히 장악했다.


국민혁명군은 여세를 몰아 공산당의 핵심 근거지인 '장자커우' 공략에 나섰다. 처음엔 쑨롄중이 지휘하는 부대가 장자커우 동부전선에서 홍군을 공격했다. 홍군의 반격으로 전황이 여의치 않자, 다시금 푸쭤이가 주도권을 쥐고 공세를 지휘했다. 기습공격 전략을 중시한 푸쭤이는 먼저 기병대를 투입해 장베이성을 점령했고, 장자커우와 장베이 사이에 있는 험난한 요새인 랑워거우로 진격했다. 여기가 무너지면 홍군으로선 장자커우 방어도 어려워지게 되는 것이었다. 국민혁명군은 도로 사정이 열악해 진격에 애를 먹었다. 목적지에 간신히 도달한 이들은 비행기와 탱크, 대포 등을 동원해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공격이 워낙 거세다 보니 홍군은 장자커우에서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랑워거우까지 점령한 국민혁명군은 이제 장자커우로 쳐들어갔다. 모택동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장자커우를 사수하라고 명했지만, 기계화 부대와 비행기 등이 동원된 국민혁명군의 공격을 막아내기엔 역부족이었다. 10월 11일 마침내 장자커우도 함락됐고, 공산당의 수도라 할 수 있는 옌안까지 위협에 노출됐다. 비슷한 시기, 국민혁명군은 남만주에서도 창바이산 일대의 3~4개 현을 제외한 모든 지역을 장악했다. 내전 발발 이래 국민혁명군이 점령한 도시는 110여 개에 달했다. 핵심 근거지들을 잃은 공산당은 큰 타격을 받은 반면 국민당은 의기양양해졌다. 장제스와 주요 군 지휘관들은 "이르면 3개월, 늦어도 10개월 안에 공산당을 소멸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나아가 11월 15일 '국민대회'를 강행했다. 원래 국공은 연합정부가 수립되기 전까지 국민대회를 개최하지 않기로 합의했었다. 장제스는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해 더 이상 공산당과의 협정 및 미국의 눈치를 보지 않고 강경하게 나갔다. 국민대회에선 국민당 정부의 새 헌법이 통과됐다. 스스로 자신들만이 중국의 유일 합법정부라고 공식 승인한 셈이었다. 공산당 대표단은 국민대회에 참가하지 않고 옌안으로 돌아갔다.


■화동 공방전

국민혁명군의 공세는 계속됐다. 이번에는 장쑤성 해방구의 수도인 화이인과 그 인접 도시인 화이안이 표적이었다. 홍군은 화력의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퇴각했다. 이후 국민혁명군은 장쑤성 북부와 산둥성 남부 해방구까지 진격했다. 탱크를 앞세운 공격에 홍군은 속절없이 밀렸다. 자오좡과 이현 등 홍군의 주요 거점들이 차례로 함락됐다.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홍군의 두 야전군을 이끌고 있던 '천이'와 쑤위는 부대를 병합해 공동대응하기로 결정했다. 그런 다음 장쑤성 북부의 '쑤첸'에서 국민혁명군과 격전을 벌였다. 이 전투는 홍군에게 극적인 승리를 가져다줬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두 사단 간의 거리를 벌리게 만든 뒤, 앞서가는 한 사단을 맹공해 궤멸시켰다. 이때도 쑤위의 전략이 빛을 발한 것이었으며, 국민혁명군은 2만 명 넘는 병력이 소멸됐다. 쑤첸 전투 직후 홍군은 은밀히 산둥성 남부로 진격했다. 여기서 돌출해 고립돼 있던 일부 국민혁명군 병력을 겨냥해 기습 포위 공격을 가했다. 고립된 병력의 절반 가량이 소멸됐고 나머지 병력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했다. 홍군은 맹렬하게 추격해 해당 병력 모두를 섬멸했다. 지원하러 왔던 국민혁명군은 섬멸 소식을 듣고 다른 지역으로 물러났다. 기세를 탄 홍군은 빼앗겼던 자오좡 등을 탈환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그동안 파상 공세에 밀렸던 홍군은 이들 전투의 승리로 국민혁명군의 진격을 어느 정도 저지할 수 있었다.


장제스는 즉각적인 보복을 결심했다. 수십만 명의 대군을 북부, 남부 집단군으로 편성해 산둥성 해방구에 있는 홍군을 포위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장제스는 홍군의 주특기인 기습, 분할, 각개격파 등에 당하지 않도록 촘촘한 대열로 진격하라고 당부했다. 국민혁명군의 병력 규모가 워낙 커서 홍군은 정면 대결이 불가능했다. 모택동과 쑤위 등은 전략을 깊이 고민했다. 그 결과 두 집단군 중 비교적 취약한 부대를 '라이우'로 유인해 섬멸을 도모하기로 결정했다. 유인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산둥성 해방구의 수도인 '린이'를 내주는 기만책까지 구사했다. 린이에 무혈입성한 국민혁명군은 홍군이 전투를 할 여력이 없어 도망간 것이라고 판단했다. (장제스에게는 린이에 있던 홍군을 모조리 섬멸했다고 거짓 보고했다.) 장제스는 지금이 산둥성의 홍군을 소탕할 적기라고 생각, 라이우로 신속히 진격하라고 명했다. 일각에서 '함정'일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지만 묵살됐다. 국민혁명군이 호기롭게 진격하는 동안, 홍군은 이미 라이우 주변부에 매복하며 기습공격을 벼르고 있었다. 마침내 국민혁명군이 해당 지역에 당도하자, 기다렸다는 듯 홍군이 나타나 무차별 공격을 가했다. 당황한 국민혁명군은 일단 라이우성 안으로 퇴각해 농성하려 했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버티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데 뜻밖의 변수가 생겼다. '한롄청'이라는 사람이 등장해 농성이 아닌 포위망 돌파를 강하게 주장했다. 누가 봐도 좋은 방안이 아니었지만, 당시 국민혁명군을 지휘하고 있던 리셴저우는 한롄청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결과는 대참사였다. 국민혁명군은 무모한 돌파를 시도하다 약 6만 명이 전사했고, 주요 지휘관들은 포로로 잡혔다. 추후 밝혀진 바에 따르면 한롄청은 '공산당 스파이'였다. 라이우 전투의 여파로 국공 간 희비는 크게 엇갈렸다. 국민당은 장담했던 산둥성 해방구 장악이 수포로 돌아갔고 병력 손실도 극심했다. 반면 공산당은 수많은 군수물자와 넓은 해방구를 손에 넣었다.


■공산당 심장부, 옌안 함락

장제스는 라이우 전투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당초 내전을 빨리 끝낼 계획이었지만, 공산당의 저항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아 당황스러웠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장제스는 결정타를 날려 만회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결정타란 바로 공산당의 심장부인 '옌안 함락'이었다. 장제스는 서북 지역 군 사령관인 '후쭝난'에게 옌안 공략을 맡겼고, 직접 시안으로 가서 공격부대 배치에 관여했다. 25만 명의 병력이 3개 집단군으로 편성됐다. 두 부대는 서쪽과 북쪽에서 상호 간 협력하며 공세를 펼치고, 후쭝난이 지휘하는 주력군이 남쪽에서 옌안 중심부를 향해 치고 들어갈 계획이었다. 이를 통해 공산당 총사령부를 와해시키거나 서북으로 쫓아내려 했다. 모택동을 생포하거나 죽이는 것도 계획에 포함됐다. 모택동은 10년 동안 사수해 온 공산당 수도를 결코 뺏기고 싶지 않았다. 그는 소문난 용장인 '펑더화이'에게 옌안 방어를 맡겼다. 펑더화이라면 상당히 선방할 것이라 확신했지만 현실적으로 미래를 낙관할 순 없었다. 방어 병력이 3만 명도 되지 않았으며, 국민혁명군은 그 어느 때보다 무지막지하게 쳐들어 올 것이 분명했다. 모택동은 유연한 전략을 지시했다. 어려우면 옌안을 과감히 '포기'하는 대신, 적군을 깊숙이 유인해 각개격파하는 등 최대한의 소모전을 펼치라고 했다. 아울러 옌안에 있는 수많은 고위급 인사와 그 가족들을 피신시키고, 모든 식량과 군수물자들도 이동시키라고 첨언했다.


1947년 3월 11일, 국민혁명군은 대규모 공습과 함께 옌안으로 가열하게 진격했다. 후쭝난이 옌안 함락에 소요될 것으로 예상한 시일은 불과 3일이었다. 그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하지만 '인민해방군'(홍군에서 개명)은 옌안의 익숙한 지형 등을 활용해 효과적으로 방어전을 펼쳤다. 어두운 밤에 빠르게 이동해 적군의 취약 지점을 기습 타격하기도 했다. 인민해방군은 약 8일 동안 맞서 싸웠고, 그 사이 모택동 등은 '섬북'으로 피신했다. 펑더화이는 소모전과 지연전을 어느 정도 수행했다고 판단한 뒤 군대를 철수시켰다. 3월 19일 국민혁명군은 비어있는 옌안에 입성했다. 후쭝난은 수만 명의 인민해방군을 소멸시켰다고 장제스에게 보고했다. 장제스도 크게 기뻐하며 후쭝난을 대장으로 진급시켰고 청천백일훈장을 수여했다. 또한 미국 등 전 세계에 국민당이 내전에서 승리하고 있다며 적극 선전했다. 표면적으로 국민당은 목표했던 바를 달성했지만, 매우 찝찝한 성과였다. 실제 인민해방군의 사상자와 포로는 많지 않았으며 공산당 고위급 인사들은 무사히 피신했다. 수도를 내줬지만 공산당은 여전히 건재했다.  


모택동과 주요 지도자들은 섬북에서 지도부를 나눴다. 한 곳에 머물러 있다가 국민혁명군의 공격으로 한꺼번에 궤멸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모택동과 저우언라이 등은 전선에서 가까운 곳에 있기로 했고 나머지 지도자들은 훨씬 안전한 곳으로 이동했다. 일각에서 모택동도 멀리 피신하라고 권했지만 그는 섬북에 남기를 고집했다. 이 지역 곳곳을 전전하며 전국의 전황을 지휘했다. 한편 후쭝난의 국민혁명군은 얼마 전 옌안 방어전에 나섰고 지금은 섬북 방어를 하고 있는 인민해방군(서북야전군)을 소멸시키려 했다. 이번에도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밀어붙일 태세였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섬북의 지형이 인민해방군에게 절대적 이점을 제공했다. 인민해방군은 익숙한 지형을 활용해 또다시 유인과 매복, 기습 작전을 펼쳤다. 국민혁명군 주력을 특정 지역으로 유인해 난관에 빠뜨리거나, 그 주력을 엄호하기 위해 뒤따라가는 부대를 기습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 섬북 지형이 매우 낯설었던 국민혁명군은 인민해방군이 파놓은 함정에 걸려들기 일쑤였다. 결국 인민해방군은 양마허에서 대승을 거뒀고 국민혁명군의 보급기지였던 판룽 등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국민혁명군은 병력 손실과 식량 부족, 극도의 피로감 등으로 인해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인민해방군의 전과로 말미암아 공산당은 옌안 함락으로 불거진 위기를 극복하고 반격을 모색할 수 있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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