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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Aug 21. 2024

'국공 내전'-공산당의 반격, 급변하는 전황

[3]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인민해방군이 지난성의 파괴된 성벽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하고 있다.

■민심 이반과 공산당의 반격

중국인들은 내전 격화에 크게 분노했다. 중일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동족 간에 피 튀기는 싸움을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국토가 황폐화 돼 기근이 발생했고 물가는 치솟는 등 경제 상황은 악화 일로를 걸었다. 전쟁 반대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전국 60개 지역에서 대학생들이 중심이 된 대규모 반전 운동이 일어났다. 국민당 정부는 곤혹스러웠다. 대부분의 운동이 국민당이 통치하는 지역에서 일어났고, 이들의 불만도 국민당을 향해 있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국민당이 내전을 촉발시킨 주범이라고 여겼다. 반전 운동과 더불어 노동자들의 파업도 잇따랐다.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장한 측면도 있다.) 국민당은 무력 탄압으로 일관했다. 모든 시위와 파업을 불법으로 규정했고, 국민당에 대해 비판을 가하는 언론 활동도 금지시켰다. 국민당의 전시 독재체제가 강화되면서 민심 이반은 더욱 극심해졌다. 반면 이 시기에 공산당은 되레 민심을 얻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자신들이 주둔한 지역에서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해 빈농들에게 나눠주는 '토지개혁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지역 농촌의 민심은 공산당에게로 급속히 기울었다. 농민들이 인민해방군에 대거 가담하는 결과도 낳았다.


섬북에 머무르고 있던 모택동은 슬슬 반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군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전략으로 허를 찌르기를 원했다. 핵심은 황허강을 도하하고 '중원'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국민혁명군은 인민해방군이 황허강을 건널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강은 견고한 방어선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식은 역설적으로 황허강 주변에서의 국민혁명군 방어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모택동은 류보청과 등소평에게 황허강을 도하하라고 지시했고, 펑더화이에겐 위린을 공격해 국민혁명군이 류보청과 등소평 부대를 추격하지 못하게 하라고 했다. 6월 30일 류보청과 등소평 부대는 신속하게 배를 만들어 도하 작전에 착수했다. 도하하는 과정에서 배 곳곳에 설치된 기관총으로 국민혁명군에게 무차별 사격을 가했다. 도하 부대 뒤에 있는 또 다른 부대가 포격으로 엄호했다. 도하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하룻밤 만에 12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황허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뒤이어 이들은 '다볘산'을 향해 파죽지세로 진격했다. 다볘산은 국민당이 통치하는 지역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있었고, 여기를 점령하면 우한 및 난징 등을 용이하게 위협할 수 있었다. 인민해방군은 다볘산으로 진격하는 도중에 산둥성의 딩타오, 윈청 등을 점령했고 류잉지와 완푸허 등에서 적군을 섬멸했다. 국민혁명군은 인민해방군의 진격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인민해방군을 난처하게 만든 것은 국민혁명군보단 저습지, 강물 등이었다. 황판취, 루허강, 화이허강 등이 다볘산으로 향하는 인민해방군의 발목을 잡았다. 그럼에도 류보청과 등소평은 부대를 적극 독려해 20일 간 1000리를 진격하도록 했다. 마침내 인민해방군은 다볘산에 당도했다. 모택동은 "비로소 공격 태세로 전환하게 됐다"라며 크게 기뻐했다.


제대로 허를 찔린 장제스는 다볘산을 전면 포위해 토벌하라고 명했다. 여기서 공산당군의 유기적인 전략이 빛을 발했다. 다른 곳에 있던 천겅의 인민해방군이 황허강을 건너 허난성 서부로 진격했다. 다볘산을 공격하려 했던 국민혁명군 일부가 천겅의 부대에 대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천겅의 부대는 룽하이 철도도 파괴해 국민혁명군의 다볘산 진격을 크게 방해하기도 했다. 또한 천이와 쑤위가 이끄는 인민해방군도 신속히 황허강을 건너 진격하면서, 다볘산 부근에 있던 국민혁명군 일부를 다른 곳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국민혁명군의 다볘산 압박이 대폭 완화됐고, 중원 지역에 인민해방군이 대거 포진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약 5개월 간 다볘산을 중심으로 펼쳐진 인민해방군의 전략은 최종적으로 성공했다. 국민혁명군 수만 명을 섬멸했고 다볘산 포위 토벌을 무산시켰다. 이후 류보청과 등소평의 부대는 다볘산에서 근거지를 꾸준히 확대해 나갔다. (얼마 뒤 '바이충시'가 이끄는 30만 명의 국민혁명군이 다볘산 재토벌에 나섰지만, 이때도 인민해방군의 유기적인 전략이 발휘돼 무산됐다.) 천겅의 부대는 허난성 서부 전투에서 잇따라 승리한 뒤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해 나갔다. 이를 계기로 공산당의 본격적인 반격 국면이 조성됐고, 국민당 정부의 통치구역으로 내전의 불길이 옮겨 붙게 됐다. 한편 국민혁명군은 이 시기에 산둥성의 공산당 후방기지인 자오둥 해방구를 공격하는 '9월 공세'를 감행했다. 인민해방군은 특유의 기습 전략 등을 구사하며 소모전을 펼쳤지만 여의치 않았다. 그러다가 국민혁명군이 다볘산 등 중원 전선의 악화로 병력을 급히 돌림에 따라 9월 공세는 수포로 돌아갔다.


급변하는 전황

중원과 더불어 '동북' 지역도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한때 인민해방군은 동북 지역에서 하얼빈까지 밀렸었다. 이후 지휘관인 린뱌오는 절치부심하며 군 전력을 강화했고 반격할 기회를 엿보았다. 1947년 5월 마침내 '하계공세'를 감행, 쓰핑 등에 대한 점령을 시도했다. 비록 목표했던 바를 이루진 못했지만, 인민해방군은 수많은 적군을 섬멸했고 거점 지역을 확보했다. 쪼개졌던 만주의 공산당 해방구도 연결했다. 린뱌오의 인민해방군은 여세를 몰아 9월 '추계공세'를 감행했다. 국민혁명군의 내부 상황이 이 공세를 유리하게 만들었다. 당시 국민혁명군에는 '천청'이라는 인물이 새로운 지휘관으로 부임해 부패 일소 등 쇄신에 나서고 있었다. (미국은 국민당 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부패를 문제 삼으며 전면 쇄신을 요구했다.)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었지만, 이는 되레 군 전력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전공이 있는 군인들도 대거 내침으로써 군의 사기를 저하시켰다. 앞선 지휘관인 두위밍의 측근들은 천청을 증오하면서 군 수뇌부가 하나로 단결되지 못했다. 인민해방군의 전략도 돋보였다. 이들은 가장 취약하거나 고립된 부대를 집중 공격했고, 지원하러 온 부대에게도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대규모 철로 파괴전도 벌여서 국민혁명군이 제대로 이동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인민해방군의 추계공세는 대성공을 거뒀다. 15개의 도시들을 점령했고 7만 명에 달하는 적군을 섬멸했다. 국민혁명군이 통치하는 지역은 눈에 띄게 쪼그라들었다. 린뱌오는 12월 '동계공세'도 감행했다. 선양 북쪽의 파쿠를 포위하거나 베이퍄오, 헤이산 등 여러 지역을 기습공격했다. 파쿠의 포위를 풀기 위해 온 국민혁명군을 전멸시켰으며 베이닝 철도를 차단해 적군을 선양으로 몰아넣었다. 동북 전황 개선이라는 막중한 임무를 띠고 왔던 천청은 6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물러났다. 지휘관 교체와 연이은 패배로 국민혁명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제 린뱌오는 동북 지역의 무게추를 공산당으로 확연히 기울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인민해방군은 파쿠를 함락시켰고, 1948년 3월 6일 쓰핑마저도 점령했다. 지린과 잉커우 등도 차례로 인민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로써 동북 지역의 인구 및 토지 대부분이 공산당에게 넘어갔다.


공산당은 '화북' 지역에 대한 공세에도 착수했다. 국민혁명군이 화북에 있는 병력을 동북 지역으로 증원하려는 움직임을 포착한 뒤였다. 인민해방군은 화북의 바오딩 북쪽에 있는 쉬수이를 맹공했다. 쉬수이에는 적은 병력밖에 없어서 금방 함락될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의외로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이때 국민혁명군의 뤄리룽은 전략적 요충지인 '스좌좡'에 있는 병력을 바오딩으로 보내 쉬수이의 인민해방군을 협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고심했지만 스좌좡에 있는 병력을 보내지 않았다. 스좌좡을 매우 중시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패착이었다. 마지못해 다른 병력이 바오딩으로 향했는데 적군의 레이더망에 걸려들고 말았다. 인민해방군은 해당 병력을 기습 섬멸하기로 했다. 쉬수이를 계속 공격하면서 은밀히 일부 병력을 칭펀뎬이라는 곳으로 보냈다. 바오딩으로 향하던 국민혁명군은 칭펀뎬에서 함정에 빠졌다. 수만 명의 사상자와 포로가 발생했고, 병력을 이끌었던 뤄리룽은 포로로 잡혔다. 칭펀뎬과 쉬수이를 접수한 인민해방군은 다음 공격 목표로 스좌좡에 집중했다. 상술했듯 스좌좡은 화북 지역의 통제권이 달려있는 중요한 장소였다. 국민혁명군은 3중 방어망을 형성하며 사수에 총력을 기울였다. 인민해방군은 가열한 포격과 공병들을 통해 방어망 파괴를 도모한 다음, 보병들을 대거 돌격시켜 거점들을 차례로 확보해 나갔다. 동시에 다른 곳에 요격 부대를 배치해 지원군을 견제했다. 때로는 스좌좡을 지키는 국민혁명군 병사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심리전도 전개했다. 출중한 방어 지대였던 스좌좡은 인민해방군의 집요한 공세에 조금씩 무너졌다. 어느덧 최후 거점이었던 다스차오가 함락되면서 스좌좡의 주인이 바뀌었다. 공산당은 단절됐던 주요 해방구들을 연결할 수 있게 됐고 화북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공산당에게 유리한 전황은 '서북' 지역에서도 펼쳐졌다. 펑더화이가 지휘하는 인민해방군은 옌안 동남쪽에 있는 '이촨'으로 진격했다. 이곳을 점령한 후에 웨이수이 북쪽으로 나아가 위북 근거지를 설립하려 했다. 아울러 항일 명장이자 장제스의 측근인 류칸을 유인해 난관에 빠뜨리려 했다. 이촨이 인민해방군에 포위되자 류칸이 이끄는 부대가 지원하기 위해 출격했다. 류칸의 국민혁명군이 '와쯔졔'에 이르렀을 때, 미리 매복해 있던 인민해방군이 나타나 공격을 퍼부었다. 류칸과 그의 부대는 결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결국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패배했고 류칸은 수류탄으로 자결했다. 동시에 이촨도 함락됐다. 펑더화이는 류칸의 항일 전적과 용맹함을 높이 사서 그의 시신을 잘 수습해 국민당 쪽으로 보내줬다. 장제스는 이 소식을 듣고 "인생을 살아갈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라며 한탄했다. 별안간 다급해진 서북 지역 전황으로 인해, 국민당은 부득이 중원 허난성의 '뤄양'에 있는 부대를 이동시키기로 했다. 뤄양에는 비교적 소수의 병력을 남겼다. 모택동은 이것이 기회라고 생각했다. 국민당 정부 제2의 수도로 여겨질 만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발달한 뤄양을 점령할 천재일우의 기회라고 여긴 것이다. 모택동은 화동야전군을 이끌던 천스쥐 등에게 상세한 전략을 지시하며 뤄양을 총공격하라고 명했다. 이에 인민해방군은 뤄양을 겨냥해 강력한 포격을 가했고, 성벽으로 병사들을 투입시킨 뒤 폭파와 공성 사다리 등을 활용해 진입을 시도했다. (다른 한편으론 정저우 등에서 다가올 국민혁명군에 대응하기 위해 요격 부대를 배치했다.) 성안으로 진입한 후에는 국민혁명군과 격렬한 시가전까지 벌였다. 인민해방군은 격전 끝에 2만 명 이상의 적군을 섬멸했고 뤄양을 점령했다. 이후 국민혁명군의 거센 반격이 우려돼 잠시 전략상 철수를 하기도 했지만, 머지않아 재차 뤄양을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뤄양 다음에는 허난성의 성도인 '카이펑'마저도 점령했다. 이를 통해 공산당은 허난성, 섬서성 등에서 근거지를 탄탄하게 다졌고, 국민당은 중원과 서북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게 됐다.


■지난 함락  

초반에 우세했던 국민당은 공산당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크게 흔들렸다. 지난 2년 간 내전을 겪으며 국민혁명군은 약 264만 명의 병력 손실을 었다. 무기들도 상당수 잃었으며 영토 역시 마찬가지였다. 동북에선 선양, 창춘, 진저우 등 소수의 거점들만을 통치했다. 화북에서의 통치 지역은 베이핑, 톈진, 장자커우 등에 불과했으며 서북에서도 옌안 이북을 내주고 시안으로 철수했다. 중원에선 뤄양 등 허난성의 요충지들을 상실했고 산둥성에선 성도인 '지난'을 위협받게 됐다. 국민당과 국민혁명군 내부에는 패배주의가 엄습했다. 반면 공산당과 인민해방군은 연이은 승리로 사기가 충전했으며 지속적인 모병과 적군 편입, 무기 탈취 등으로 전력이 크게 강화됐다. 국민당의 통치력이 미쳤던 수많은 지역에 공산당의 오성홍기가 꽂혔다. 이 같은 전황은 무엇보다 인민해방군의 유연하고 기민한 전략이 적중했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우둔한 국민혁명군은 해당 전략에 잇따라 휘말렸고, 내부 혼란 등 여러 불운들까지 겹치면서 수세에 몰리게 됐다. 커다란 위기감을 느낀 장제스는 전략을 수정했다. 공격보단 방어에 중점을 뒀고, 방어도 전면이 아닌 지역방어 위주였다. 아울러 이 즈음에 장제스는 내부의 거센 비판에도 직면했다. 국민당 내 좌파 세력인 '국민당 혁명위원회'가 출범해 "장제스 독재정권은 창당 정신을 저버렸다. 이 정권을 전복하고 민주, 독립, 평화를 실현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쑨원의 부인과 국민당 원로들도 적지 않게 참여해 장제스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그나마 미국의 지원이 재개된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미국은 장제스가 말을 듣지 않고 내전을 개시한 것과 국민당 내부에 광범위하게 퍼진 부패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 이에 국민당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단행했다가 1948년 5월에 이를 철회했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국민당의 어려운 사정을 마냥 외면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고, '헌법 실행 국민대표대회'를 통해 헌정이 실시된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한 듯하다.


대내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장제스는 역사상 처음으로 실시된 총통 선거에서 경쟁 후보를 압도적인 표차로 누르고 당선됐다. 그는 당선을 계기로 국면 전환을 모색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공산당은 빼앗겼던 심장부인 옌안을 탈환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이미 이촨, 와쯔졔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인민해방군은 매우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사실상 옌안에 고립된 국민혁명군 지휘관 허원딩은 일찌감치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각종 군수물자와 식량을 불태워버리고 옌안에서의 철수를 단행했다. 인민해방군의 옌안 탈환은 공산당에겐 기쁨을, 국민당에겐 좌절을, 미국에겐 충격을 줬다. 미국은 이때부터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할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이후에 인민해방군은 위둥 전투와 철옹성이라 불렸던 샹양성 전투에서도 잇따라 승리했다. 그나마 국민혁명군은 맹장인 황바이타오의 맹활약에 힘입어 '황판취 대첩'에서 승리하며 체면을 차렸다.) 한편 패배주의에 물들어 있는 국민당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한 '군사검토회'가 8월 난징에서 개최됐다. 주최자인 장제스는 지휘관들에게 "현재의 패배는 순간에 불과하며 정신무장을 강화한다면 전황을 바꿀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가끔씩 국민혁명군 장교들의 부패 문제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전반적으로 격려에 무게를 뒀다. 공산당군을 궤멸시킬 만한 새로운 전략들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장제스의 노력과 달리 이 회의는 국민당의 분위기를 일신하지 못했다. 맞닥뜨린 현실과 앞으로의 전망이 결코 낙관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혁명군은 중대한 시험대에 올랐다. 산둥성의 성도인 지난을 사수해야 했다. 쉬스유가 이끄는 인민해방군(산둥병단)이 이곳을 반드시 점령하려고 했다. 만약 국민혁명군이 여기를 내준다면 첫 '대규모 붕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인민해방군은 우선 지난에 앞서 옌저우를 공격했다. 지난에 있는 국민혁명군과 쉬저우 간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려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인민해방군이 옌저우 포위를 시도하자 다른 곳에 있던 국민혁명군이 지원하러 왔다. 이 상태라면 옌저우 함락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지원하러 온 국민혁명군이 다른 쪽으로 급히 이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다른 지역에서 포위된 아군을 구원하러 가는 것이었다. 인민해방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옌저우를 맹공했다. 쉬저우에서 국민혁명군 지원 병력이 다급하게 출격했지만, 목적지에 도달하기 전에 옌저우가 함락됐다. 이제 인민해방군은 고립된 지난을 겨냥해 총공세를 가할 태세였다. 지난에 있는 국민혁명군이 방어 전략에 골머리를 앓는 가운데, 사령관인 '왕야오우'가 뜻밖의 의견을 피력했다. 전황을 감안할 때, 무작정 지난 사수를 고집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며 2선으로 물러나 싸우는 게 효과적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군사고문단장도 이와 유사한 주장을 펼쳤다. 이에 대해 장제스는 강력히 반대했다. 그에게 있어 지난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 곳이었다. 왕야오우는 어쩔 수 없이 100개가 넘는 방어진지를 구축하며 지난 방어전에 나섰다.


인민해방군은 9월 16일 지난 공격을 개시했다. 국민혁명군은 동쪽 방어에 집중하며 간신히 버텨나갔고, 쉬저우에서 지원군이 빨리 와달라고 요청했다. 인민해방군은 옌저우에서 그랬던 것처럼 지원군이 오기 전에 지난을 함락시켜야 했다. 밀고 당기는 치열한 전투가 지속됐다. 국민혁명군은 폭격기 출격과 전투기 기총소사 등 공군까지 적극 활용해 지난을 방어하려 했다. 수송기를 통한 보급품 투하도 이뤄졌다. 인민해방군은 지난성 서쪽에 있는 비행장을 포격해 공중 지원을 어렵게 만들려 했다. 꽤 오랫동안 우열을 가리기 힘든 전황이 이어지는 가운데, 예상치 못한 '돌발 변수'가 발생했다. 왕야오우의 부하인 국민혁명군 소속 '우화원'이 2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이끌고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 기실 우화원은 과거에 저우언라이 등 공산당 고위급 인사들과 은밀히 접촉했었다. 언젠가는 공산당에 이득이 되는 행동을 하기로 약속했는데, 지난 전투가 바로 그때였던 셈이다. 이로써 국민혁명군의 서쪽 방어선이 완전히 붕괴됐다. 왕야오우는 장제스에게 퇴각을 건의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실상 대세가 기운 상황에서도 국민혁명군은 시가전 사투를 벌이며 끝까지 저항했다. 24일 새벽, 인민해방군이 최종 승리함에 따라 지난 전투가 종결됐다. 지난 방어전에 나섰던 10만 명 넘는 국민혁명군은 전멸했다. 왕야오우는 탈출을 시도하다 사로잡혔다. 국민당은 물론 미국마저도 지난에서의 전투 결과를 예사롭지 않게 여겼다. 이는 앞으로 전개될 '재앙'과 같은 상황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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