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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Aug 30. 2024

'국공 내전'-양쯔강 도강, 중국의 공산화

[5]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모택동과 정부 인사들이 1949년 10월 1일 베이징 톈안문 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있다.

■핑진 전역

3대 전역의 마지막인 핑진 전역은 베이핑과 톈진 등을 중심으로 화북 지역에서 벌어진 전투다. 화이하이 전역이 한창 전개될 때인 11월 29일, 인민해방군(동북야전군+화북야전군)이 화북에 있는 국민혁명군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발발했다. 당초 장제스는 화이하이 전역에서 참패가 예상되는 만큼, 화북을 방어하고 있던 국민혁명군이 베이핑과 톈진을 포기하고 남쪽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고립의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고, 창장강 방어선을 탄탄하게 만들 수 있다는 판단이었다. 다만 베이핑과 톈진이 갖는 상징성이 상당했기에 장제스는 망설임을 거듭했다. 그런데 화북 국민혁명군 지휘관인 푸쭤이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는 화북의 인민해방군이 자신의 군대보다 우세하지 못하고, 동북야전군은 앞선 전역으로 피로감이 극에 달했기 때문에 이른 시일 내에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푸쭤이는 남쪽으로 철수할 경우, 장제스가 자신의 부대를 접수할 것을 우려해 더욱 화북 사수를 고집했다. 이러한 주장은 받아들여졌다. 푸쭤이는 직계 부대를 베이핑, 장자커우 등에 배치했고 장제스계 부대는 톈진, 탕구 등에 배치했다. 사전에 전황 조사를 한 모택동은 국민혁명군이 언제든 주요 도시들을 포기하고 남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이럴 경우 창장강 방어선이 크게 강화돼 추후 (난징 등을 겨냥한) '도강' 작전이 어려워질 것을 우려했다. 그는 인민해방군의 진격을 서두르기로 결심했다.


핑진 전역에는 동북과 화북의 인민해방군 부대가 대거 동원돼 약 100만 명에 달했다. 공격이 개시됐을 때, 모택동은 국민혁명군이 남하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포위한 뒤 공격하지 않거나 접근한 뒤 포위하지 않는' 다소 생소한 전략을 지시했다. 인민해방군이 우선 장자커우로 쳐들어가자, 푸쭤이는 적군이 완전체가 아니기에 장자커우에서 협격해 격파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런 다음 지원하러 오는 적군도 충분히 섬멸할 수 있다고 봤다. 국민혁명군 주력은 즉각 베이핑에서 장자커우로 출격했다. 하지만 이는 함정이었다. 인민해방군 주력이 베이핑 동북쪽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베이핑과 쑤이위안 사이의 연결을 끊어 장자커우로 진격한 적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뒤늦게 베이핑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확인한 푸쭤이는 급히 주력군을 베이핑으로 회군시키려 했다. 그러나 주력군은 회군을 시도하다12월 9일 신바오안에서 포위되고 말았다. 장자커우 역시 인민해방군에게 포위됐다. 모택동은 국민혁명군이 포위망을 뚫고 해상이나 철로 등을 통해 남쪽으로 철수할 것을 계속 염려했다. 그래서 자극하지 않기 위해 2주 간 공격을 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푸쭤이는 이미 국민혁명군의 철수가 어렵다고 판단했고, 베이핑과 톈진 등에 대한 방어에 온 힘을 기울였다. 17일 인민해방군은 베이핑도 철통같이 포위했다. 푸쭤이 휘하에 있는 국민혁명군이 화북 지역 곳곳에서 분할 포위된 형국이 조성됐다. 모택동과 공산당 수뇌부는 '천년 고도'로 불리는 베이핑을 무혈 점령하길 원했다.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압박하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푸쭤이와 평화적 협상을 벌여 설득하기로 했다. 이때 푸쭤이를 설득하기 위해 나선 사람 가운데 그의 딸인 푸동쥐도 있었다. 푸동쥐는 아버지에게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자고 권했다. 기실 그녀는 비밀 공산당원이었다.


딸의 설득에도 불구하고 푸쭤이는 공산당에게 베이핑 등을 고스란히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공산당은 국민혁명군이 무기를 내려놓으면 생명과 재산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푸쭤이는 '화북 연합정부'를 설립하자고 역제안했다. 사실상 또 다른 형태의 '국공 합작'을 제안한 셈이다. 화가 난 모택동은 장자커우와 신바오안에 포위돼 있는 국민혁명군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푸쭤이가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있는 요소들에 타격을 가해야 심경에 변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확신했다. 21일 신바오안의 인민해방군은 대대적으로 국민혁명군을 공격했다. 병력 열세에도 국민혁명군은 주력군답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10시간 넘는 격전이 지속된 끝에, 인민해방군은 가까스로 적군을 섬멸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장자커우에 대한 공격도 감행됐다. 이때 국민혁명군은 필사적으로 포위망 돌파를 시도, 서쪽으로의 탈출에 성공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해방군의 재빠른 추격으로 극소수의 기병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소멸됐다. 푸쭤이는 오랜 기간 공들여 키운 주력군을 잃은 것에 크게 상심했다고 한다. 한편 장제스는 측근들을 여러 번 푸쭤이에게 보내 포위망 돌파를 종용했다. 푸쭤이가 공산당과 합의점을 찾을 것을 크게 우려한 조치였다. 푸쭤이는 현실적으로 포위망을 돌파하기도 어려울뿐더러 남쪽으로 간다 해도 장제스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공산당과의 협상에 무게 중심을 뒀다. (스승이었던 류허우퉁의 권고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해를 넘긴 직후, 푸쭤이는 측근을 적진에 보내 협상했다. 공산당은 베이핑 등에 있는 국민혁명군을 인민해방군이 완전히 접수하겠다고 못 박았다. 대신 투항하면 과거의 일은 절대로 문제 삼지 않을 것이며, 재산도 보장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포로로 붙잡힌 푸쭤이의 부하들도 양호한 대우를 받을 것이라고 첨언했다. 공산당은 약 7일 이내로 호응해 줄 것을 요구했고, 만약 호응이 없을 경우 즉시 톈진을 공격하겠다고 선언했다. 푸쭤이는 답변 기한인 1949년 1월 14일까지 호응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일방적으로 접수하겠다는 공산당의 제안에 난색을 표했다. 인민해방군은 곧바로 34만 명의 병력을 동원해 톈진을 공격했다. 우선 수백 문의 대포가 1시간 가까이 불을 뿜어 방어 진지를 무너뜨렸다. 인민해방군이 성안으로 밀고 들어와 국민혁명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다. 13만 명의 수비병들은 나름 선방했지만 근본적인 열세에 직면해 무너지기 시작했다. 다음 날, 톈진도 인민해방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제 푸쭤이가 믿을 만한 구석은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군대를 유지하고, '연합판사처'를 설립해 군정, 기업, 학교 문제 등을 공동으로 처리하자고 제안하는 당돌함을 보였다. 공산당은 판사처 설립은 수용했으나 모든 것을 단독으로 처리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끝내 푸쭤이는 22일에 결단을 내렸다. 자신이 보유한 모든 군대가 인민해방군으로 개편될 것 등을 담은 '베이핑 평화해결 문제에 관한 협의서'에 서명했다. 백기 투항이었다. 마침내 31일 인민해방군이 모택동과 주더의 초상화를 앞세우고 베이핑에 무혈 입성했다. 얼마 후 푸쭤이는 모택동과 만난 자리에서 "저의 죄가 큽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모택동은 과거 자신을 크게 괴롭혔지만, 명장이자 대규모의 병력을 보유한 푸쭤이를 환대해 줬다. (푸쭤이는 중화인민공화국에서 22년 간 수리전력부장과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 국방위원회 부주석 등 요직들을 역임했다.) 핑진 전역에서 완승한 공산당은 창장강 이북의 핵심인 베이핑마저 얻음으로써 굳히기에 들어갈 수 있게 됐다.


■평화회담 결렬, 양쯔강 도강

동북과 중원, 화북을 잇따라 내준 장제스는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였다. 그는 대내외적으로 2선으로 물러나라는 압박을 줄기차게 받았다. 특히 미국은 일찌감치 부총통인 '리쭝런'을 대안으로 삼았고, 장제스가 하야해야 한다는 뜻을 내비쳤다. 마침 이 즈음에 진행된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장제스를 불신하는) 트루먼이 재선에 성공함에 따라 장제스 하야 압박은 가속화됐다. 트루먼은 장제스의 부인인 쑹메이링이 찾아왔음에도, 국민당에 대한 적극적 지원에 명확히 선을 그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국민당 인사들의 오만과 무능, 부정부패에 진절머리를 내고 있었다. 국내에선 리쭝런과 광시계, 바이충시 등이 장제스 하야를 요구했다. 압박을 못 이긴 장제스는 핑진 전역이 종결되기 전인 1월 21일 하야를 선언했다. 그날로 난징을 떠나 고향인 저장성의 시커우로 갔다. 다만 하야했다고 해서 장제스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하야 직전 요직에 측근들을 앉혔고 하야 후에는 막후 정치에 돌입했다. 이때 중국 중앙은행의 황금들과 베이핑 고궁박물원에 있던 진귀한 유물들을 대거 타이완으로 옮기기도 했다. 황금은 227만 량, 유물은 3000 상자에 달했다.


총통 대리가 된 리쭝런은 정부의 목표를 '평화 실현'으로 정했고, 즉시 모택동에게 평화회담 의사를 타진했다. 이를 위해 베이핑으로 16명의 사절단을 파견했다. 리쭝런이 궁극적으로 지향한 것은 창장강(양쯔강)을 경계로 삼아 국민당과 공산당이 남북으로 분할 통치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획강이치', '남북조' 국면이었다. 또한 리쭝런은 평화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방어선을 강화해 적군의 도강을 차단할 시간도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창장강 이남에 있던 국민당 난징 정부는 아직 100만 명의 육군과 공군 및 해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평화회담에 대해 모택동과 공산당은 단호하게 나왔다. 그들은 '평화회담을 위한 8개 항 조건'을 내걸었다.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면 전쟁범죄자들 처벌, 가짜 헌법 폐기, 가짜 법통 폐지, 모든 반동군대 개편, 관료자본 몰수, 토지제도 개혁, 매국조약 폐지, 국민당의 모든 권력 접수 등이었다. 아울러 '톈진 방식'과 '베이핑 방식' 중에서 양자택일을 하라고 강요했다. 전자는 무력에 의한 항복, 후자는 담판을 통한 해결이었다. 국민당으로선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과 태도였다. 리쭝런과 바이충시 등은 특사도 보내 8개 조건 등에 난색을 표했고, 인민해방군의 도강에 대해서도 경고했다. 방어하는 국민혁명군은 강력하고 창장강은 천험의 방벽이며 인민해방군이 고작 목선 따위로 도강할 수 없다고 했다. 이에 모택동과 저우언라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인민해방군은 강을 건널 것"이라고 답했다.


이 같은 소식을 접한 장제스는 다시 전면에 나서는 모습을 보였다. 우선 하야 직전에 자신이 임명한 창장강 방어 지휘관들에게 방어 구역을 두 개의 전구로 나눠 방어하라고 명했다. 추가 회담에 앞서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공산군이 도강하면 즉시 회담을 중단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등의 지시도 했다. 장제스의 측근들이 핵심 요직에 포진해 있었기에 여전히 그의 영향력이 상당했다. 회담은 4월 13일 베이핑에서 다시 열렸다. 이 회담에서 공산당 측은 8개 조건을 받아들이라고 재차 요구하면서, 핵심은 "공산당이 국민혁명군을 접수 개편하는 것"이라고 못 박았다. 국민당 측은 "수용하기 어려운 조건들이 너무 많다"라며 사실상 거부 의사를 밝혔다. 이후 행해진 2차 회담에서 공산당 측은 최후통첩을 가했다. 저우언라이는 국민혁명군 접수와 인민해방군 도강은 절대로 양보할 수 없으며, 오는 20일까지 최종안 수용 여부를 밝히라고 말했다. 국민당 회담 대표단은 최종안을 들고 난징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장제스를 비롯해 모든 사람들이 분통을 터뜨렸다. "왜 이따위 것을 최종안이라고 들고 왔느냐"라며 대표단을 꾸짖기도 했다. 국민당은 공산당의 최종안을 거부하기로 결정했다. 그 즉시, 모택동은 전군에 도강 명령을 하달했다. (도강 작전은 이미 1948년 12월부터 준비됐다.) 20일 저녁, 100만 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이 일제히 1만 여 척의 목선을 타고 도강하기 시작했다. 도강 전선은 서쪽의 후커우에서 동쪽의 장인까지, 무려 1000리가 넘었다. 의외로 인민해방군의 도강 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다. 곳곳에서 국민혁명군의 투항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장인 요새와 난징을 수비하던 2함대 등에서 투항이 발생하자, 국민혁명군은 대혼란에 빠지며 급격히 무너졌다. 충분히 창장강을 방어할 수 있다던 국민당 정부의 호언장담은 신기루에 그쳤다.


국민혁명군이 도강 전선에서 속절없이 밀리고 난징마저 위기에 처하자, 장제스는 모든 부대에게 상하이와 항저우 일대로 퇴각하라고 명했다. 또한 국민당 정부 관원들과 기관들 모두 난징을 벗어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하라고 했다. 중일 전쟁에서나 볼 수 있었던 대규모 피란 행렬이 다시 재현되는 모습이었다. 국민혁명군은 난징에서 철수할 때 수많은 건물에 불을 질렀다. 이에 난징 전체가 화마에 휩싸였다. 24일, 도강 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인민해방군이 마침내 난징에 입성했다. 국민당의 오랜 수도였던 곳이지만, 인민해방군이 진입하자 난징 시민들은 열렬히 환호했다. 국민당은 수도에서마저도 민심을 잃었던 것이다. 난징 총통부에 걸려있던 청천백일기가 끌어내려지고 새로이 공산당을 상징하는 홍기가 올라갔다. 모택동은 난징 점령을 크게 기뻐하며 기념으로 '칠언율시'를 지었다. 이는 "웅크린 범, 숨은 용이 오늘 승리하니. 하늘과 땅이 뒤집혀 감개하기 짝이 없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다른 지역에서도 낭보가 날아들었다. 인민해방군은 타이위안 전역을 점령하면서 산시성을 평정했다. 뒤이어 저장성의 성도인 항저우도 점령했다.


■중국의 공산화

극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장제스는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그는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상하이를 6개월 이상 방어한다면, 미국을 비롯한 자유 진영이 적극 지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 시기에 미국(자유 진영)과 소련(공산 진영)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무르익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 것이다. 더욱이 소련의 스탈린도 중국 공산당에게 창장강을 경계로 휴전할 것을 제의했다. 스탈린은 국공 내전에 미국이 개입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을 두려워했고, 소련을 위협할 수 있는 '하나의 중국'을 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희망고문의 성격이 짙었지만, 국민혁명군은 실낱같은 희망을 갖고 상하이 방어에 총력을 기울였다. 1만 개의 진지와 4000여 개의 콘크리트 구조물, 2만 개가 넘는 지뢰를 설치했다. 이를 기반으로 상하이를 나치 독일군이 패퇴한 현장인 '제2의 스탈린그라드'로 만들 것이라고 호언했다. 엄정한 군기도 조성했다. 명령을 위반하거나 전투에서 물러서는 자는 곧바로 죽인다 등의 '10대 즉결처분 전투명령'을 발령했다. 과거에 죄를 지은 자가 이번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 고속승진을 시키겠다는 약속도 했다.


5월 12일, 천이와 쑤위가 이끄는 30만 명의 인민해방군이 상하이 공격에 착수했다. 인민해방군은 초반부터 고전을 거듭했다. 견고한 방어선도 문제였지만 수뇌부에서 도시를 파괴할 수 없다며 중화기 사용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공산당에게도 상하이는 매우 중요한 도시였던 셈이다. 인민해방군은 오로지 개인 화기에만 의존하며 전투를 치렀다. 진격하다가 적군의 기관총에 의해 수많은 병사들이 전사하기 일쑤였다. 천이와 쑤위는 방어선 돌파와 관련해 골머리를 앓았다. 고심 끝에 적군의 중심으로 진입해 분할한 다음, 화력이 집중된 곳을 피해 우회한 뒤 각각의 부대들을 포위 섬멸하기로 했다. 해당 작전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휘해, 국민혁명군은 응집된 화력을 선보이지 못하고 방어력이 약화됐다. 이와 함께 상하이에서 암약하고 있던 공산당 지하당원들이 일제히 행동을 개시, 각종 정치공세를 펼치며 국민혁명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영향을 받은 장교 및 병사들의 투항이 곳곳에서 발생했다. 인민해방군은 점차 승기를 잡아 나갔다. 27일, 전투 발발 15일 만에 상하이가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졌다. 국민혁명군은 15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고 참패했다. 당초 장제스와 국민당이 가졌던 희망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상하이 함락에 앞서 후베이성의 성도인 우한도 함락의 길을 면치 못했다. 원래 국민혁명군 화중 사령관인 바이충시는 우한을 사수하기 위한 결전을 준비했다. 하지만 측근이었던 장전이 부대를 이끌고 투항하면서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인민해방군은 우한에 무혈 입성했다. 공산당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대륙을 석권해 나갔다. 이제 변방인 서북 지역이 공산당의 표적이 됐다. 펑더화이의 인민해방군은 이 지역에서 후쭝난의 국민혁명군과 일대 격전을 벌였다. '푸메이 전역'에서 4만 명이 넘는 국민혁명군이 소멸되면서 섬서성 중부 지역이 인민해방군에게 넘어갔다. 이후 후쭝난 등은 서북을 방어하기 위한 '란저우 회전 계획'을 수립했다. 난공불락의 요새로 여겨지는 란저우를 배경으로 삼아 적군을 격퇴하겠다는 것이었다. (마부팡의 병력이 란저우 방어를 책임졌고, 후쭝난과 마홍쿠이 병력은 다른 곳을 방어하다가 지원 나가기로 했다.) 인민해방군은 까마득한 거리와 온갖 질병을 무릅쓰고 란저우로 진격했다. 펑더화이는 란저우 공격에 앞서 후쭝난과 마홍쿠이의 국민혁명군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이들이 란저우에 합세해 통일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사전 조치한 셈이다. 란저우를 지키고 있던 마부팡은 싸우기도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지원군이 오는 것도 여의치 않자 아들에게 방어를 맡기고 충칭으로 도망갔다. 지휘관이 겁을 먹고 달아나자 방어하는 국민혁명군의 사기는 크게 저하됐다. 8월 25일, 인민해방군은 란저우를 겨냥해 대대적인 공격을 가했다. 피 튀기는 전투가 벌어졌다. 인민해방군은 란저우 주변에 있는 고지 등을 점령하면서 결정적 승기를 잡았다. 전세가 기운 것을 깨달은 방어군 주력이 성 밖으로 탈출했다. 이에 서북 최대의 전투는 공산당의 승리로 종결됐다.


비슷한 시기에 후난성의 창사도 함락됐다. 방어를 책임지고 있던 국민혁명군의 청첸과 천밍런이 투항하면서 비교적 쉽게 인민해방군이 접수했다. 투항은 줄줄이 이어졌다. 푸쭤이의 부하였던 둥치우 등이 9월 19일 쑤이위안에서 공산당에 투항했고, 신장에서도 경비총사령관인 타오즈웨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투항했다. 이로써 서남 지역을 제외한 전 국토가 공산당에게 넘어갔다. 비로소 모택동과 공산당 수뇌부는 '건국' 준비를 본격화했다. 9월 21일부터 베이핑에서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1차 회의가 열렸다. 여기서 180명으로 이뤄진 전국위원회를 조직했고, 모택동을 전국위원회 주석으로 선출했다. 뒤이어 180명 가운데 63명으로 중앙 인민정부위원회를 구성했고,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을 도출했다. 이에 따르면 새로 건국될 국가는 노동자, 농민연맹을 기초로 한 '인민민주주의 독재국가'가 될 것이었다. 수도는 베이징(베이핑에서 개칭)으로, 국기는 오성홍기로 결정했다. 10월 1일, 중앙 인민정부위원회 1차 회의가 열린 자리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인민정부 수립을 결의했으며, 모택동을 중앙 인민정부 주석으로 선출했다. 주더는 인민해방군 총사령관이 됐다. 모택동과 정부 인사들은 이날 오후 3시에 베이징 톈안먼 성루에 올랐다. 텐안먼 광장에 자리한 30만 명의 군중은 모택동을 주시했다. 그는 큰 목소리로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오늘 중화인민공화국 중앙 인민정부가 수립됐다." 마침내 중국 대륙에 공산 국가가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군중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축포와 열병식이 뒤따랐다. 주더는 열병식에 모인 군사들에게 "국민당 반동군대를 일소하고 아직 해방되지 않은 모든 국토를 신속히 해방시켜라"라고 명했다.


인민해방군은 진격을 계속했다. 10월 14일 광저우에 무혈입성했고, 골치 아프게 만들었던 바이충시의 군대(광시군)를 헝바오 전투에서 궤멸시켰다. 국공 간 최후의 결전은 서남 지역에서 벌어졌다. 국민당은 쓰촨성, 구이저우성, 윈난성 등 서남 지역을 최후의 근거지로 삼아 항전했다. 이 지역을 지키던 후쭝난의 국민혁명군은 쓰촨성 북쪽에 대한 방어를 강화했다. 그러나 인민해방군이 서남쪽으로 우회해 쓰촨성을 들이받았다. 충칭 코앞에 있는 쓰촨성의 펑수이가 함락됐고, 구이저우성의 성도인 구이양도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제 남은 것은 충칭 뿐이었다. 장제스는 쑹시롄 등에게 결사항전을 명했으나 이미 급격히 기울어진 전세를 뒤집는 건 불가능했다. 국민혁명군은 전략상 충칭을 내주고 남쪽으로 퇴각했다. 그러다가 인민해방군에게 포위돼 궤멸됐고 쑹시롄은 포로로 잡혔다. 끝으로 청두로 퇴각했던 후쭝난의 국민혁명군마저 소멸됨에 따라 서남 지역 전투가 종결됐다. 이로써 공산당은 약 4년 간 벌어진 국공 내전에서 최종 승리하며 중국 대륙을 완전히 석권했다. 더 이상 대륙에서 발붙일 곳이 없어진 장제스는 아들 장징궈와 함께 타이완으로 향했다. 한때 군벌들을 패퇴시키며 대륙을 호령했고 중일 전쟁을 진두지휘했던 천하의 장제스가, 이제는 작은 섬으로 쫓겨나는 매우 처량한 신세가 됐다. 그야말로 '폐주'가 따로 없었다. 그나마 국민당은 대륙 가까이에 있는 섬인 '진먼다오'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대륙 진출에 대한 희망을 가짐과 동시에 타이완 방어를 용이하게 할 수 있게 됐다. 추후 장제스는 타이완 총통으로 취임했고, 오랜 기간 계엄 상태를 유지하며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통치 기간에 타이완의 경제를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큰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6.25 전쟁 때를 포함해 틈틈이 대륙 탈환의 기회를 엿보았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택동 사망 1년 전인) 1975년 4월 5일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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