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경식 Aug 24. 2024

'국공 내전'-대회전, 국민당의 참패

[4]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선양에 입성하는 중공군.

■랴오선 전역

전세 역전을 직감한 모택동은 1948년 9월 정치국 확대회의를 열고 군 전략 수정 및 대규모 전면공세 계획을 수립했다. 앞으로 인민해방군의 전투 방식은 유격전이 아닌 '정규전'이 될 것이며, "국민당을 타도하고 전 중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동북 지역에서의 '대회전'을 예고했다. 이때부터 국공 내전의 양상은 바뀌게 된다. 이전까지의 전투는 국지적이었고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지 않았다. 이제부턴 국공 쌍방 모두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 처절한 혈투를 벌이게 될 것이었다. 어느덧, 공격의 때가 왔다고 판단한 모택동은 동북 지역 사령관인 린뱌오에게 '진저우'를 공격하라고 명했다. 이는 뜻밖이었다. 순서상 창춘과 선양을 먼저 점령한 뒤에 진저우를 공격하는 게 상식적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린뱌오는 진저우 공격에 따르는 위험부담이 크다고 생각했다. 우선 베이핑과 가까워 푸쭤이가 지휘하는 화북 지역 국민혁명군에게 공격받을 수 있었다. 또한 진저우는 동북 지역 인민해방군의 근거지인 하얼빈과 상당한 거리가 있었으며, 선양 등에는 국민혁명군의 정예 병력이 포진하고 있었다. 모택동은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일단 충분한 병력이 있었으며, 예상치 못한 지점에 대한 공격을 통해 적군을 교란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다. 현재 분위기상 선양 등에 있는 국민혁명군이 섣불리 진저우를 지원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봤다. 그리고 진저우 점령 시, 선양과 창춘에 있는 적군의 퇴로를 효과적으로 차단해 동북 전투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린뱌오는 처음엔 모택동의 명을 거부하고 (인민해방군의 오랜 포위로) 고립무원의 상태에 놓인 창춘부터 공격했지만, 창춘 국민혁명군의 결사항전으로 여의치 않자 진저우 공격에 나서기로 했다. 동원된 병력은 약 70만 명이었다.


이번에도 인민해방군은 교묘한 계책을 구사했다. 일부 병력으로 창춘을 계속 공격함으로써, 주공격 방향이 여기라고 믿게 만들었다. 그 사이 인민해방군의 대병력은 랴오닝성 이현에서 허베이성 루안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서 출격했다. 진격 속도가 워낙 빨라 예상보다 이른 시점에 진저우 외곽에 도달했다. 베이닝 철도의 거점도 점령해 적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갑자기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의외의 장소에 나타나자, 장제스와 진저우의 국민혁명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또다시 허를 찔린 셈이었다. 더욱이 진저우에는 국민혁명군 병력이 15만 명밖에 되지 않았다. 사령관인 판한졔는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지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였다. 전투 준비가 돼 있을 리도 만무했다. 다급해진 장제스는 선양에 있는 웨이리황의 부대에게 진저우를 지원하라고 명했다. 그런데 웨이리황은 격하게 반대했다. 만약 선진로를 통해 진저우로 진격할 경우, 인민해방군의 매복 공격에 걸려들어 전멸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웨이리황은 본인의 부대가 아닌 화북에 있는 푸쭤이의 부대가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민해방군은 한층 단합된 모습으로 진저우 공격을 앞두고 있는데, 국민혁명군은 내부 갈등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시작부터 지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장제스는 선양으로 가서 웨이리황의 지휘권을 박탈한 뒤, 자신이 직접 부대를 지휘하겠다고 선언했다. 뒤이어 화북과 산둥 지역에서 해운을 통해 지원군을 급파하기로 결정했고, 동진병단과 서진병단으로 지원군을 나눠 진저우에 있는 인민해방군을 협공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지원군 급파가 이뤄지자 공산당 지휘부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특히 푸쭤이의 화북 대군이 진저우와 매우 가까운 후루다오에 상륙하자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진저우 공격을 계속할지 아니면 창춘으로 병력을 돌릴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결론은 진저우 공격이었다. (모택동이 이를 강하게 고집했다.) 동북 인민해방군 지휘부는 진저우 총공세와 지원하러 오는 군대를 효과적으로 요격할 전략을 수립해 나갔다. 진저우에 대한 공세는 북쪽, 남쪽, 동쪽 등 사방에서 이뤄질 것이었다. 다만 지원군을 막는 게 문제였다. 린뱌오는 방어의 성패가 작은 마을인 '타산'에 달려있다고 판단했다. 이곳을 내준다면 진저우의 인민해방군은 협공을 당해 궤멸될 가능성이 높았다. 반대로 이곳을 고수한다면 진저우 점령이 수월해질 터였다. 사활을 걸 수밖에 없었다. 국민혁명군도 타산을 반드시 확보해야만 진저우를 지킬 수 있었다.


10월 10일, 국민혁명군 동진병단 등이 타산에 있는 인민해방군 진지를 맹렬히 공격하기 시작했다. 항공기 폭격이 이뤄졌고 함포도 불을 뿜었다. 국민혁명군 병사들은 밀집대형으로 적군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인민해방군은 자신들의 진지가 포격으로 파괴됐지만, 물러서지 않고 돌격하는 적군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퍼부었다. 국민혁명군의 집요한 공세는 며칠간 계속됐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의 방어선은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초조해지는 것은 국민혁명군 쪽이었다. 조만간 진저우를 겨냥한 인민해방군의 총공세가 개시될 것이었고, 진저우가 함락되면 전황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었다. 심적으로 쫓기고 있던 국민혁명군은 14일 가장 격렬하게 타산 공격에 나섰다. 수많은 병사들이 포격 엄호를 받으며 적군 진지를 향해 돌격했다. 인민해방군의 기관총 세례가 쏟아지자 국민혁명군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럼에도 돌격전이 그치지 않고 계속되면서 병사들의 희생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무차별 포격과 사격 등으로 인해 방어하는 쪽에서도 만만치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참혹한 진지전이 이어지는 가운데, 인민해방군은 마침내 진저우에 대한 공격 준비를 마쳤다. 곧바로 전투가 개시됐다. 600문에 달하는 대포의 집중 포격이 이뤄졌고 병사들은 가열하게 돌격했다. 타산 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국민혁명군이 돌격하는 적군에게 기관총 세례를 퍼부었다. 인민해방군은 막대한 희생을 무릅쓰면서 방어선을 돌파해 나갔다. 나름 견고하게 보였던 진저우는 끝없이 밀려드는 인민해방군의 공세에 서서히 무너졌다. 결국 성안에서 방어하던 국민혁명군이 섬멸되면서 15일 진저우가 공산당의 수중에 떨어졌다. 타산을 공격하고 있던 국민혁명군은 비보를 접한 뒤 공격을 중단하고 철수했다. 일련의 전투 과정은 국민당에겐 그야말로 '악몽'이었다. 병력 등 잃은 것은 너무 많았고, 얻은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대담한 작전으로 승리를 거머쥔 공산당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진저우 함락으로 창춘에 있는 국민혁명군은 더욱 고립됐다. 그동안 지휘관인 '정둥궈'와 병사들은 영웅적으로 적군의 포위 공격을 막아왔지만 더 이상 버티기 힘들 듯했다. 성안의 물자는 거의 바닥났다. 정둥궈는 고민 끝에 포위망 돌파를 도모했으나 측근이 군대를 이끌고 인민해방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항전 능력이 완전히 상실된 정둥궈에게 저우언라이가 투항을 권유했다. 21일 정둥궈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창춘도 공산당이 접수하게 됐다. 베이핑에 있던 장제스는 진저우 함락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는 웨이리황에게 거듭 전보를 보내 진저우 탈환을 명했다. 이곳이 적군의 손에 있는 한, 동북에 있는 군대를 철수시킬 방도가 없었다. 동북 군대를 철수시켜야 훗날의 더 큰 전투를 대비할 수 있었다. 이때도 웨이리황은 장제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선양으로 병력을 집중해 방어에 전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제스는 "그렇게 하면 선양도 창춘과 같은 운명을 맞을 수 있다"라고 경고했다. 평행선을 달리는 가운데, 장제스는 웨이리황을 제치고 랴오야오샹에게 진저우 탈환을 명했다. 23일 랴오야오샹이 이끄는 국민혁명군은 진저우로 가는 통로인 '헤이산' 및 다후산을 공격했다. 3일 간 전개된 헤이산 공방전은 국공 내전 3대 공방전 중 하나였다. 그만큼 국공 양 진영이 이곳을 놓고 '사생결단'식으로 맞붙었다. 한때 국민혁명군이 사력을 다해 여러 개의 진지를 점령하면, 또 다른 때에 인민해방군이 밀고 들어와 탈환하는 과정이 반복됐다. 이 와중에 양측의 사상자가 눈에 띄게 불어났다.


결과적으로 국민혁명군의 공세는 좌절됐다. 랴오야오샹은 한계를 절감하고 선양 방면으로 철수하려 했다. 그런데 철수하는 도중에 인민해방군이 나타나 겹겹이 포위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인민해방군의 유격전술이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었다. 10만 명의 국민혁명군은 격렬히 저항했지만, 중심부를 향해 치고 들어오는 인민해방군을 막을 수 없었다. 얼마 못 가 국민혁명군은 완전히 궤멸됐다. 끝으로 공산당은 선양으로 눈길을 돌렸다. 장제스와 군 지휘부는 이미 선양 방어가 어렵고 잉커우로의 철수도 힘들다고 판단했다. '진퇴양난'이었다. 11월 1일, 인민해방군은 선양을 전면 포위한 뒤 대대적인 공세를 감행했다. 전의를 상실한 국민혁명군은 하루 만에 무너져 버렸다. 직후에 잉커우도 신속히 함락됐다. 이로써 52일 간 전개된 '랴오선 전역'은 공산당의 완승으로 종결됐다. 국민당은 이 전역에서 지금껏 겪지 못했던 치명상을 입었다. 이전에 약 50만 명의 군대가 동북에 있었지만 거의 다 소멸됐고, 소장 이상 고위급 장교 수백 명이 사로잡혔다. 각종 무기와 전쟁 물자도 공산당에게 빼앗겼다. 이 시기에 처음으로 인민해방군 병력(약 300만 명)이 국민혁명군 병력(약 290만 명)을 앞지르기도 했다. 국공 내전 전황이 근본적으로 뒤바뀐 것을 눈치챈 모택동은 "앞으로 1년이면 국민당 반동 정권을 타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화이하이 전역

랴오선 전역이 내전의 향방에 큰 영향을 미치긴 했지만 동북 지역에 국한된 측면이 있다. 국공 내전 최대의 전투는 광활한 중원 지역(허난성 일대)에서 벌어진 '화이하이 전역'이다. 공산당이 난징의 관문이라 할 수 있는 '쉬저우'를 표적으로 삼으면서 발발했다. 모택동과 쑤위 등은 쉬저우 공격을 보다 용이하게 하기 위해, 걸림돌이 될 수 있는 '황바이타오'의 국민혁명군을 섬멸할 계획도 세웠다. (인민해방군의 두 축인 화동야전군과 중원야전군이 합세했다.) 이때 적군의 진격을 예상한 국민혁명군의 두위밍은 역으로 산둥 지역을 공격해 지난과 타이안 등을 수복하려는 대담한 계획을 세웠다. 불리한 상황에선 방어에 집중하는 게 보통인데, 두위밍의 계획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발상이었다. 국민혁명군의 기본 전력과 몇 가지 전황을 감안할 때, 충분히 기대해 볼 만했다. 만약 성공한다면 불리한 전황을 크게 만회할 수도 있었다. 장제스도 동의해서 두위밍은 착실히 공격을 준비해 나갔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장제스가 두위밍에게 "동북으로 가서 국민혁명군의 철수를 지휘하라"라고 명했다. 두위밍은 수차례 설득해보려 했지만, 완강한 장제스의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국민당으로선 좋은 기회를 놓친 셈이었다.


화이하이 전역은 랴오선 전역처럼 개전 전부터 국민혁명군이 지고 들어가는 모양새를 나타냈다. 인민해방군의 쉬저우 공격이 임박했을 때, 국민혁명군 지휘부는 전투의 방식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앞으로 나가 싸울지 아니면 뒤로 물러서서 방어에 집중할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우여곡절 끝에 일단 쉬저우를 포기하고 남쪽에 있는 벙부로 이동, 이곳을 중심으로 병력을 집중 운용해 결전하기로 했다. '쉬벙회전 계획'이었다. 그런데 머지않아 계획이 변경됐다. 벙부에서가 아닌 '쉬저우와 벙부 사이에서' 병력을 한데 모아 결전한다는 것이었다. 사실상 쉬저우에서의 결전을 의미했다. 일련의 혼란상을 목도한 두위밍은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졌다고 한다. 전투를 총체적으로 지휘할 지휘관을 선정하는 것도 어려웠다. 장제스는 대규모 작전을 수행한 경험이 많은 화중 초비사령관 '바이충시'가 전황을 지휘해 주길 바랐다. 당초 바이충시는 전면에 나설 것처럼 보였으나 어느 순간 뒤로 물러났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바이충시가 이미 완료된 부대 배치 상태를 본 뒤 승산이 없다고 확신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장제스는 차선책으로 두위밍에게 지휘 실권을 맡겼다. 개전 이전부터 극심한 난맥상을 보인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매우 일사불란하게 전투를 준비했다. 현장에서 의견을 개진하면 수뇌부가 이를 검토 승인한 뒤 신속하게 일처리가 이뤄졌다. 당시 국민혁명군 내부에 공산당 스파이가 깊숙이 암약한 것도 치명적이었다. 국민혁명군의 작전 계획을 입안했던 '궈루구이'는 추후에 첩자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사전에 적군의 계획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쉬저우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국민혁명군의 황바이타오도 쉬저우 쪽으로 병력을 집결해 싸우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현재 위치에 있다간 자신들을 노리는 인민해방군의 유격전에 각개격파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상부에서 부대의 이동을 좀처럼 승인하지 않으면서 아까운 시간들이 그냥 흘러갔다.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부대 이동 승인이 떨어졌다. 황바이타오 부대는 철수 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또다시 어처구니없는 지시가 내려왔다. 다른 지역에서 오는 아군을 기다린 뒤에 같이 철수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이틀의 시간을 또 허비해야 했지만 따를 수밖에 없었다. 11월 5일이 됐을 때, 인민해방군의 쉬저우 공격이 (예상보다 빨리)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첩보가 곳곳에서 쏟아졌다. 뒤늦게 국민혁명군은 다급해졌다. 황바이타오 부대를 비롯해 각 지역에 있는 국민혁명군은 신속히 쉬저우로 이동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6일 마침내 쑤위의 인민해방군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화이화이 전역이 발발했다. 쑤위는 최우선적으로 이동 중인 황바이타오 부대를 중간에서 궤멸시키려 했다. 정예부대가 본진에 합류하기 전에 격파된다면 쉬저우 공략은 훨씬 수월해질 터였다. 추격을 눈치챈 황바이타오 부대는 최대한 빠르게 이동했다. 하지만 대운하에서 발목이 잡혔다. 건널만한 다리가 하나밖에 없었으며 부교나 가교도 설치돼 있지 않았다. 이동 시간이 크게 지체됐으며, 대운하를 건너는 과정에서 수많은 병사들이 뒤엉키는 바람에 희생자가 속출했다. 국민혁명군은 가까스로 대운하를 건넌 뒤 '녠좡'으로 진입했다. 황바이타오는 코앞까지 온 인민해방군이 운하를 쉽게 건널 수 없으리라 확신했다. 오산이었다. 운하를 방어하던 3수정구 수비병들이 부사령원인 '허지펑'의 지휘 하에 인민해방군에 대거 투항했다. 허지펑 역시 오랜 기간 국민혁명군 내부에 숨어있던 공산당 스파이였다.


믿었던 방어선이 뚫리자 국민혁명군은 졸지에 녠좡에 포위됐다. 황바이타오와 주요 지휘관들은 포위망 돌파를 시도할지 아니면 녠좡에서 맞서 싸울지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결론은 후자였다. 12일 인민해방군은 맹공을 퍼부었다. 과연 최고 정예들답게 황바이타오의 군대는 용감하게 맞섰다. 며칠이 지나도 승자가 나오지 않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계속됐다. 이런 가운데 장제스는 다른 부대에게 서둘러 녠좡을 구원하라고 명했다. 치우칭취안과 리미가 이끄는 지원군이 녠좡을 향해 진격했다. 쑤위는 즉시 요격 부대를 배치했다. 지원군은 빠른 속도로 녠좡에 다가갔지만, 이내 요격 부대의 강력한 공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지원군은 요격 부대를 피해 다쉬자와 판탕으로 우회한 뒤, 이곳들을 통해 황바이타오 부대를 구원하려 했다. 하지만 다쉬자와 판탕에서도 인민해방군이 견결히 버티고 있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국공 양 진영은 이곳에서 사활을 건 대격전을 치렀다. 국공 내전 3대 격전 중의 하나인 '쉬둥 저지전'이었다. 포격전과 근거리 백병전 등이 난무하면서 전사자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단시간 내에 수만 명의 병사들이 소멸됐다. 요격하던 인민해방군이 다소 후퇴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국민혁명군이 유리해지는 듯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국민혁명군은 끝내 요격 부대를 돌파하지 못했다. 결국 고립된 황바이타오 부대는 독자적으로 싸워야만 했다. 지금껏 눈부시게 선방했지만, 머지않아 한계에 봉착했다. 지휘관은 결단코 용맹함을 잃지 않았다.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끝까지 항전했다. 그러다가 적군의 유탄에 맞고 전사했다. 황바이타오의 정예부대 10만 명은 모조리 섬멸됐다. 국민당에겐 실로 뼈아픈 참패였다. 만약 황바이타오 부대의 철수가 조속히 이뤄졌다면, 쉬저우 방어는 물론 화이하이 전역의 결과가 달라졌을 수도 있다. 이것 역시 국민혁명군 수뇌부의 잘못된 판단에 따른 대참사였다.


녠좡에서의 공방전이 한창일 때, '황웨이'가 이끄는 국민혁명군이 쑤현으로 진격했다. 쑤현을 장악해야 쉬저우에 있는 국민혁명군의 고립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인민해방군이 한 발 앞섰다. 이들은 야간에 은밀하고 신속히 기동해 16일 쑤현을 선점하는 데 성공했다. 인민해방군은 조만간 황웨이 부대를 섬멸한 뒤, 쉬저우에 있는 두위밍 부대까지 소멸시킬 계획이었다. 황웨이 부대에 대한 지원이 잘 이뤄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23일 황웨이의 국민혁명군과 천겅의 인민해방군이 후이허 남안의 난핑지에서 맞닥뜨렸다. 전투가 벌어지던 중, 인민해방군이 난핑지를 벗어나 퇴각하는 모습을 보였다. 적군을 유인하기 위한 함정이었다. 이를 눈치채지 못한 국민혁명군은 인민해방군이 깔아놓은 함정으로 고스란히 들어갔다. 뒤늦게 이상함을 감지한 국민혁명군은 구전 방향으로 진격해 벗어나려 했지만, 25일 인민해방군에게 완전히 포위되고 말았다. 황웨이는 가장 취약한 지점을 돌파하라고 명했으나 좀처럼 뚫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믿었던 부하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인민해방군에 투항했다. 그 역시 공산당 스파이로 드러났다. 국민혁명군은 포위망 돌파를 포기하고 방어전에 돌입했다. 인민해방군은 마치 농락하듯 조금씩 조금씩 압박해 들어왔다. 그러다가 12월 6일, 3개 방면으로 총공세를 감행했다. 국민혁명군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단 한 명의 투항자도 없이, 모든 병력이 결사적으로 항전했다. 황웨이는 극단적인 수단도 동원했다. 적군에게 '독가스'를 살포한 것이다. 인민해방군은 예상치 못한 저항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우세한 병력 규모에 기반해 국민혁명군을 점차 사지로 몰아넣었다. 15일, 황웨이의 부대 12만 명이 모두 소멸되면서 격렬한 전투가 종결됐다.


쉬저우의 운명은 황웨이 부대보다 먼저 결정됐다. 앞서 두위밍은 쉬저우의 아군 병력이 너무 부족하기 때문에, 황웨이 부대 지원은 물론 쉬저우에서의 결전도 힘들다고 봤다. 이에 30만 병력을 이끌고 쉬저우 서남쪽으로 철수했다. 12월 1일, 인민해방군은 쉬저우에 무혈 입성할 수 있었다. 두위밍은 지금은 비록 철수하지만, 보다 좋은 환경에서 전투를 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내려갔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지시가 떨어졌다. 장제스가 "철수를 즉각 중단하고 황웨이 부대를 지원하라"라고 명했다. 두위밍으로선 환장할 노릇이었다. 철수 중단 자체도 문제이지만 황웨이 부대 지원 시 위태로운 처지에 놓일 수도 있었다. 현장을 제대로 모르는 최고 사령관이 또다시 일을 그르친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럼에도 두위밍은 장제스의 명을 거부하지 못했다. 아니나 다를까. 두위밍이 우려했던 대로 지원하러 가는 국민혁명군이 쑤위의 인민해방군에게 포위됐다. 국민혁명군은 나름의 방어 태세를 갖추고 포위망 돌파를 여러 차례 시도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민해방군은 국민혁명군을 즉각 섬멸하지 않고 포위망에 계속 가뒀다. 이 시기에 화북 지역에서 전투(핑진 전역)가 벌어진 데 따른 전략적 조치였다. 그 사이에 모택동 등은 두위밍의 투항을 집요하게 요구했다. 두위밍은 끝까지 투항을 거부하고 장제스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1949년 1월 6일, 인민해방군은 포위망에 있는 적군에게 총공격을 가했다. 국민혁명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으며 두위밍은 포로로 잡혔다. 이것을 끝으로 화이하이 전역은 종결됐다. 국민당은 강남으로 밀려났고 공산당은 창장강 이북을 완전히 장악했다.


66일이 걸린 이 전역으로 말미암아 국민당은 회복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국민혁명군이 동원한 병력은 약 80만 명에 달했는데, 이 중 전역으로 '소멸'된 병력은 55만 5000명이었다. 반면 인민해방군이 동원한 병력은 약 60만 명이었는데, 이 중 전역으로 인한 '사상자'는 13만 명에 불과했다. 인민해방군은 수많은 무기들까지 노획하며 더욱 강력해졌다. 이제 국민당은 화북과 화중에서 초라하게 버텨나가야 할 처지가 됐다. 그들 스스로도 전략 전술의 총체적 실패, 장제스의 지휘 실패를 뼈저리게 절감했다. 자연스럽게 장제스의 권위와 통치력이 바닥에 떨어졌다. 미국은 떠들썩하게 반응했다. 주중 군사고문단 및 주중 대사는 "국민당은 완전한 실패를 피할 수 없게 됐다. 장제스의 군사 역량은 사실상 붕괴됐다"라고 밝혔다. 국내외에서 국민당의 패배는 기정사실처럼 굳어져 갔다. 공산당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최후의 일격을 준비했다. -다음 편에 계속

이전 08화 '국공 내전'-공산당의 반격, 급변하는 전황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