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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Sep 04. 2024

'러일 전쟁'-The Great Game

[1] 대제국 격침된 전쟁사 최대 이변

러일 전쟁 당시의 국제 정세를 풍자한 그림. 러시아에 맞서는 일본 병사 뒤에 영국과 미국이 존재하고 있다.

The Great Game

19세기는 열강들이 전 세계를 누비며 경쟁적으로 식민지를 건설해 가던 시대였다. 당시 이를 주도했던 국가는 단연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대영제국)이었다. 영국은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아프리카, 인도, 아시아 등 세계 곳곳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그런데 영국처럼 해군력을 기반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싶어 하는 국가가 있었다. 바로 '러시아'였다. 러시아는 표트르 대제 이후부터 바다를 누비기 위해 해군력을 눈에 띄게 증강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해상에서 영국의 절대적 존재감으로 인해 러시아는 별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다. 전 세계 거점 해로에 강력한 영국 해군이 포진해 러시아 해군의 진출을 봉쇄했다. 영국은 나이팅게일로 유명한 '크림반도 전쟁'에선 러시아의 흑해 함대를 궤멸시키기도 했다. 러시아는 해상로를 통한 세력 확대가 쉽지 않음을 깨닫고, 육로를 통한 세력 확대를 모색했다. 이에 자국의 영토와 닿아있는 '중앙아시아'에 눈독을 들였다. 이번에도 영국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러시아가 중앙아시아를 통해 남하해 궁극적으로 인도까지 위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를 억제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정치학에서는 이 시기 영국과 러시아의 경쟁을 'The Great Game'이라고 일컫는다.) 러시아는 영국의 노골적인 견제가 지속되자 중앙아시아로의 진출 계획도 접었다. 그러나 이대로 손을 완전히 놓을 수는 없었다. 대안으로 '극동아시아' 진출이 입안됐다. 이 지역에서 바다로 나가는 거점을 확보한다는 계획이었다. 구체적으로 '부동항'(얼지 않는 항구)을 차지해 태평양으로 용이하게 진출할 교두보를 마련한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겨울이면 꽁꽁 얼어붙어 쓸모 없어진 항구만을 경험했던 러시아에게, 언제든 사용 가능한 부동항은 바다로 힘차게 뻗어나갈 꿈을 실현시킬 주요 수단이었다. 이에 적합한 곳은 중국 랴오둥(요동) 반도의 남단에 위치한 '뤼순항'이었다. 계획의 일환으로 러시아는 극동아시아로 군대를 빠르게 실어 나를 수 있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도 건설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움직임에 대응해 영국은 1885년 조선의 영토인 '거문도'를 점령하며 견제에 나섰다. 다만 극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러시아의 직접적 충돌이 발생한 것은 아니었다. 충돌의 당사자는 영국의 대리자라 할 수 있는 '일본'이었다. '메이지 유신'으로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조선 등을 침략해 영토를 넓힐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고 있었다. 1894년 발발한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는 일본의 목표를 달성할 커다란 촉매제가 될 것처럼 보였다. 일본은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급받았고 요동반도를 할양받게 됐다. 할양받을 영토 중에는 러시아가 그토록 노렸던 뤼순도 포함됐다. 조선에서의 일본 영향력이 더욱 커진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러시아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신들이 진출하려던 지역에 아시아의 작은 소국인 일본이 겁도 없이 들어오려 하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를 끌어들여 '국 간섭'을 행했다. 일본이 요동반도를 즉시 청나라에 반환하라고 압박한 것이다. 일본은 러시아의 행태에 불만이 많았지만 수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 하나만도 상대하기 벅찬데 독일, 프랑스까지 개입했기 때문이다. 반면 국 간섭을 계기로 추후 러시아는 뤼순과 다롄을 조차 받아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했다. 독일은 칭다오 일대를 조차 받았다.


한편 조선의 고종과 민비는 일련의 사태를 예의주시했다. 그동안 상국으로 떠받들었던 청나라를 무릎 꿇린 일본을, 그저 말로써 굴복시킨 러시아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 조선이 기대야 할 곳은 러시아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이의 영향으로 조정에서 친일파가 사그라들고 친러파가 대두하자 일본의 위기감은 극대화됐다. 급기야 1895년 10월 일본은 야만적인 방식을 동원해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한 나라의 군왕과 왕비의 침소에 긴 칼을 찬 일본 낭인들이 무단으로 난입했다. 이들은 궁궐을 수비하던 군사들과 궁내부 대신 및 궁녀들을 참혹하게 죽였다. 그런 다음 민비를 찾아내 음부 검사를 한 뒤, 여러 군데 칼질을 했다. 고통 속에 몸부림치는 민비를 발로 밟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증거 인멸을 위해 민비의 시신에 기름을 부어 불태워버렸다. 일본은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천인공노할 만행을 통해 조선 조정에서 다시금 주도권을 쥐었다. 고종은 일본에 대한 공포감 속에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나갔다. 머지않아 생존을 위한 몸부림을 펼쳤다. 1896년 2월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몰래 거처를 옮겼다. '아관파천'이었다. 이를 통해 조정에선 다시 친일 내각이 몰락하고 친러 내각이 수립됐다. 이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선 조선을 둘러싸고 크고 작은 신경전이 계속됐다.


이런 가운데 1899년 청나라 북부 지역에서 러일 전쟁의 결정적 배경이 되는 '의화단 운동'이 일어났다. 이는 극단적인 외세 배격 운동이었다. 의화단은 청나라 정부와 손을 잡고 톈진과 베이징 등을 누비며 외국 공사관들을 습격했고, 외세에 도움이 되는 철도와 전신선 등 핵심 시설들을 파괴했다. 영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8개국은 연합군을 결성해 의화단 진압에 나섰다. 이에 약 2년에 걸쳐 일어났던 의화단 운동은 완전히 진압됐다. 진압이 된 이후, 각 국의 군대는 청나라에서 철수하는 것으로 돼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의 경우, 자국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만주에 계속 주둔시켰다. 영국과 일본은 물론 미국까지 러시아의 움직임에 분노를 표출했다. 영국은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일본과의 밀착에 나섰다. 비록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소국으로 인식됐을지언정, 영국 입장에선 러시아를 막는 방파제로 써먹을 필요가 있었다. 일본도 러시아를 혼자 상대하기 버거운 마당에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이의 결과로 1902년 '제1차 영일 동맹'이 체결됐다. 영국은 조선에서의 일본 우위를 승인했고 저리로 전쟁 자금까지 지원해 줬다.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갖는 이 동맹으로 말미암아, 일본은 비로소 러시아와의 전쟁을 각오할 수 있게 됐다.


■전쟁 대비 실태

러일 전쟁 이전, 양국의 전쟁 대비 실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러시아는 곳곳에서 단점들이 노출됐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일본을 얕잡아 봤다. 여전히 약소국으로 인식했고, 유럽에서의 전쟁 대비에 큰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갈등을 일단락 지으려 했다. 이에 만주 지역에 충분한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일본이 감히 강대국 러시아를 선제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도 기저에 깔려있었다. 만에 하나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더라도 반드시 격파할 수 있을 것이라 장담했다. 일본군은 뤼순, 랴오양, 블라디보스토크 등 두 곳 이상을 공격할 역량을 갖추지 못했으며 랴오둥 반도로의 상륙 시도는 꿈도 꾸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러시아는 일본의 군사적 발전상을 고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과거의 기준에만 입각해 일본군 전력을 과소평가하는 오류를 범했다. 더욱이 러시아는 해군력을 집중하지 않고 분할함에 따라 일본군의 공격 시에 취약성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첩보 활동도 게을리해서 사전에 적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만주로의 병력 충원도 느리게 이뤄질 터였다. 무엇보다 시베리아 횡단철도가 아직 단선이었고 환바이칼 구간이 준공되지 않았다. 이에 러시아군 지휘부는 전쟁 발발 후 6개월 정도는 지나야 전면적인 공세를 감행할 수 있을 것으로 봤다. 그전까지는 주로 방어 전술을 구사하며 적군의 진격을 지연시키고, 전력을 한데 모을 시간을 벌려고 했다. 이는 일본군의 적극적인 공세와 극명히 대비될 대목이었다. (러시아 내부에서 서서히 달아오르는 '혁명'의 열기는 러시아의 전쟁 수행에 지장을 초래하는 또 하나의 요인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심각하게 바라보며 철저히 준비했다. 일본은 주도 면밀한 분석에 의거해 자국 함대가 우세하다고 판단, 이에 기반해 전쟁 초기 뤼순에서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궤멸시켜 제해권을 장악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조선의 제물포와 한양 등에도 신속히 병력을 상륙시키고, (유럽으로부터의 병력 충원이 완료되기 전에) 만주에 있는 러시아 육군을 격파한다는 목표였다. 특히 만주의 일본군에게 군수물자를 빠르게 공급할 중간 보급기지로써 조선을 이용할 것이었다. 일본 육군은 '우회'와 포위라는 명확한 공격 전술을 수립했으며, 전반적으로 일본군은 육군과 해군의 능동적인 협력 하에 전개될 예정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와 달리 전장에서의 첩보 활동도 활발히 전개할 만반의 준비를 했다. 이에 적군의 전력과 진격 경로 등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대처할 수 있었다. 최악의 경우, 일본은 든든한 후원자인 영국이 직접 나서줄 것이라는 믿음도 있었다. 이는 일본의 군사 행동에 상당한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자, 일본은 마침내 전쟁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 첫 단계로 일본에서 군신으로 추앙받는 명장 '도고 헤이하치로'의 함대가 뤼순에 정박 중인 러시아 태평양 함대를 공격하고, 우류 소토키치의 함대는 제물포에 정박 중인 러시아 순양함 바랴그호와 포함인 코레예츠호를 공격하기로 했다. 첫 전투에서의 완벽한 성공을 위해 일본은 '선전포고 없이' 기습 공격을 감행할 것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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