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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경식 Aug 13. 2024

'국공 내전'-국민당과 공산당, 고조되는 내전의 기운

[1] 중국 대륙 패권 둘러싼 거대한 충돌

세기의 라이벌, 장제스(국민당)와 모택동(공산당). 두 사람은 전후 충칭에서 만나 회담을 가졌다.

■국민당과 공산당

192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는 두 개의 눈에 띄는 세력이 존재했다. 바로 '국민당'과 '공산당'이다. 두 세력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국민당은 1912년 '쑨원'에 의해 공식적으로 창당되기 전까지 비밀결사 조직으로 활동했다. '삼민주의'(민족, 민주, 민생)를 바탕으로 청나라 제정을 무너뜨리기 위해 결성된 중국혁명동맹회가 그것이다. 이들은 1911년 우창 봉기를 기점으로 발생한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를 멸망시켰고 공화정인 '중화민국'(中華民國)을 수립했다. 지도자였던 쑨원은 중화민국 초대 총통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북방군벌과 열강의 지원을 얻은 청년 장군 위안스카이에게 그 자리를 빼앗기고 말았다. 쑨원은 이에 대응해 중국혁명동맹회를 공개정당으로 개편하는 것을 넘어 (위안스카이의 어용정당인 공화당의 대척점에 서는) 국민당을 창당했다. 한동안 국민당과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대대적인 탄압을 받으며 큰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다 위안스카이의 실책 및 죽음과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혁명운동인 '5.4 운동' 등의 영향으로 중국 내에서 확실히 자리를 잡게 됐다. 쑨원이 1925년 사망한 후에는 그의 후계자를 자처한 정치군인 '장제스'가 국민당을 장악했다.


공산당은 1921년 천두슈, 리다자오의 주도 하에 창당됐다. '중공'(共)으로 약칭하기도 한다. 러시아 혁명으로 집권한 소련 볼셰비키당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5.4 운동의 시류를 타고 만들어졌다. 학계에선 1920년에 결성된 사회주의자동맹이라는 단체가 공산당의 시초라는 주장이 있다. 상하이 창당 모임 당시, 50여 명의 당원들을 대표하는 13명의 중국인과 2명의 외국인이 참가했다. 추후 중국 공산당 최고지도자가 되는 '모택동'도 이 13명 중의 한 명이었다. 공산당은 모스크바에서 창설된 공산주의 국제연합인 '코민테른'의 지도를 받았고, 도시 노동자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세력을 불려 나갔다. 초창기 공산당의 대표적인 활동은 홍콩 선원 파업 등 각지에서 발생한 노동쟁의를 조직, 후원하는 것이었다. 한동안 천두슈와 리리싼이 선두에서 공산당을 이끌며 활동을 주도했다. 모택동은 뒷선에서 나름의 활동을 펼치며 서서히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당세가 외부의 공격으로 급격히 위축되자 대안으로 모택동이 급부상하며 공산당을 장악했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국내외 정세에 따라 물리적으로 힘을 모으기도 했지만 화학적 결합은 될 수 없었다. 쑨원 시대에는 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에 공산당원 대표들도 참가하는 등 '제1차 국공합작'이 이뤄졌다. (중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 했던 소련이 코민테른을 통해 "공산당은 국민당에 협조하라"라고 지침을 내린 것이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쑨원 사후 장제스 시대에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장제스는 극단적인 반공주의자였고, 이러한 성향을 결코 숨기지 않았다. 국민당의 지지기반인 자본가, 중산층은 공산당이 사유재산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를 대놓고 표출했다. 공산당 역시 국민당 우파를 배제한 중국 대륙의 완전한 공산화라는 야망을 심심치 않게 드러냈다. 불길한 기운이 고조되는 가운데, 1926년 장제스는 국민혁명군을 이끌고 1차 북벌(군벌 타도를 목적으로 행한 출병)을 감행했다. 북벌이 전개되는 동안 국민당과 공산당 간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공산당은 비대해지는 장제스의 힘을 견제하기 위해 왕징웨이 등이 중심이 된 국민당 좌파와 연합, 장제스에 대한 공격을 가했다. 가뜩이나 공산당에 대한 거부감이 컸던 장제스는 참을 수 없었다. 그는 1927년 4월 공산당을 타도하기 위한 '상하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로 인해 공산당은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 이후 장제스는 국민당 좌파의 우한 정부와 구별되는 난징 정부를 세웠다. 국민당 좌파의 경우 상하이 쿠데타가 발생했음에도 여전히 공산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코민테른에서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를 장악하라"라는 새로운 지침이 내려온 뒤 공산당이 왕징웨이를 압박하자 국민당 좌파도 공산당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공산당은 상하이 쿠데타에 대한 대응으로 광저우 등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 폭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6만 명에 달했던 당원의 수는 1만 명으로 급감했다. 극히 어려운 상황임에도 모택동과 주더 등 유격대 지휘관들은 굴하지 않았다. 정강산 투쟁을 시작으로 중국 곳곳에 소비에트 지구를 건설해 나갔다. 특히 강서성에 건설된 강서 소비에트는 지속적으로 확대돼 중앙 소비에트로 지칭됐고, 1931년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내부 갈등이 뒤따랐다. 모택동과 상하이의 임시 당 중앙위원회의 대립이 격화하면서 모택동이 실각했다. 오토 브라운과 28인의 볼셰비키라고 불리는 소련 유학파들이 군사 노선 등을 지휘하게 됐다. 공산당의 소비에트 지구 건설에 큰 위기감을 느낀 국민당 정부는 공산당을 완전히 섬멸하기 위한 대대적인 작전을 펼쳤다. 이른바 '초공작전'이다. 이 작전은 총 5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특히 1933년의 초공작전은 공산당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중앙 소비에트를 비롯한 여러 소비에트 지구들이 분쇄됐고 중화소비에트 공화국은 멸망했다. 최악의 상황 속에서, 조만간 공산당 조직 자체가 완전히 소멸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잡초처럼 살아남았다. 잔존 병력과 당원들을 재편한 후 부대별로 해방구를 탈출, 중국 북서부에 있는 산시성 '옌안'으로 이동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대장정'이다. 모택동은 대장정에서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치며 두각을 나타냈다. 더욱이 기존 공산당 지도자들의 실책이 부각되면서 모택동은 반사이익까지 얻었다. 이제 차기 공산당 최고지도자로서 각광을 받기 시작했으며, 1935년 마침내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거머쥐었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끝장내고 싶었지만, 일본과의 전쟁 기운이 고조되면서 접어야 했다. 되레 다시 한번 공산당과 힘을 합쳐야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장제스는 장쉐량이 일으킨 '시안 사건'까지 겪은 뒤 마지못해 '제2차 국공합작'의 길로 나아갔다. 1937년 '중일 전쟁'이 발발하자 장제스 및 국민당 인물들, 그리고 주요 공산당 인물들까지 참가한 회의에서 항일전이 공식 선포됐다. 당초 국민당의 국민혁명군과 공산당의 홍군은 적절히 협력해 잘 싸울 것처럼 보였다. (홍군은 국민혁명군 휘하에 편입됐다.) 하지만 이 같은 전망은 오래가지 못했다. 시간이 갈수록 홍군은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일본군에 정면으로 대항하는 것보단, 자신들의 지배 영역을 넓히는데 더욱 중점을 뒀다. 가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는 모습도 보였지만 기껏해야 국지전에 불과했다.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국민혁명군 사령관의 명령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는 엄연히 협정 위반이었다. 분노한 장제스와 국민당은 공산당에게 수차례 항의 및 경고를 했다. 그럼에도 공산당은 훗날 국민당과의 일전을 대비한 세력 확대에 집중할 뿐이었다. 결과적으로 공산당의 전략은 성공적이었다. 미약했던 공산당은 이 시기에 1억 명에 달하는 인구와 100만 명 넘는 군대를 보유하게 됐다. 지배 영역은 화북에서 서북으로 확대됐고 장강 중하류까지 미쳤다.


국민당의 인내심은 한계에 봉착했다. 이럴 바엔 국공 합작이 깨져도 상관없다고 판단했다. 급기야 공산당에 대한 물리적인 공격도 계획했다. 구체적 표적은 국민당의 거점에서 활개를 치고 있는 공산당 신4군이었다. 이 군대의 규모는 10만 명에 달했던 만큼 국민당에게 매우 위협적인 존재였다. 우선 국민당은 신4군을 황허강 이북으로 철수시키라고 공산당에게 요구했다. 만약 이 요구가 수용되지 않을 경우, 즉각 신4군을 공격해 전멸시킬 태세였다. 공산당은 처음에는 해당 요구를 거절했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안전을 보장받은 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장제스와 국민혁명군은 신4군이 순순히 철수를 하고 있음에도 곱게 놔두지 않기로 했다. 1941년 1월 국민당 정찰대와 국민혁명군 7개 사단의 무차별적인 공격이 신4군에게 가해졌다. 이 공격으로 신4군 수천 명이 목숨을 잃었다. '환남사변'이었다. 국공 합작은 사실상 파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후 일본이 패망할 때까지 국민당은 거의 단독으로 항일전을 치렀다. 수백만 명의 전사자가 나왔고 공산당과의 지속적인 대립도 감수했다. 이에 반해 공산당은 항일전 기간 동안 뚜렷한 피해를 입지 않으며 서서히 세력을 넓혔다. 결과적으로 중일 전쟁은 국민당에게는 큰 어려움이 된 반면 공산당에게는 반전의 초석이 됐다.


■고조되는 내전의 기운

1945년 8월 마침내 연합군에게 패한 일본이 무조건 항복했다. 중일 전쟁도 중국(국민당)의 승리로 끝났다. 길고 끔찍했던 전쟁의 포성이 멎자 중국인들은 환호했고 앞으로 평화가 확고히 정착되길 희망했다. 국민당은 승전의 기쁨을 만끽할 겨를이 없었다. 일본군이 점령했던 지역들을 신속히 장악해야만 했다. 국민당이 바삐 움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공산당 때문이었다. 모택동은 일본이 항복한 직후 기다렸다는 듯 팔로군에게 점령지를 확대하라고 명했다. 장제스는 공산당에게 경고했다. 군대를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국민혁명군 소속인 각 전구 사령관의 명령을 따르라고 했다. 일본군에게는 "국민혁명군 이외에 그 어떠한 군대에게도 항복해선 안 된다"라고 못 박았다. 공산당은 즉각 반발하며 장제스의 조치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벌써부터 국민당과 공산당 간 신경전이 달아오르고 있었다. 국민혁명군은 부득이 미군의 수송 지원을 받기로 했다. 베이핑, 상하이, 난징 등 주요 지역으로 국민혁명군이 공중 수송됐다. 전국 각지에도 국민혁명군이 급파됐다. 이러한 작전은 효과를 거둠으로써 국민당은 핵심 도시들을 어느 정도 장악할 수 있었다. (국민당은 주로 대도시와 철로 등을 점령했고 공산당은 도시 외곽이나 농촌 등에 근거지 또는 '해방구'를 만들어 대응했다.)


장제스는 공산당과의 협상 필요성도 느꼈다. 모택동에게 편지를 보내 "충칭에서 국가의 미래를 함께 논의하자"라고 제안했다. 이는 공산당과의 협력을 바라는 미국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초 모택동은 본인이 가지 않고 저우언라이 등을 보내려 했다. 충칭에 갔다가 자칫 변고를 당할 수도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장제스는 모택동이 와야만 한다고 고집했다. 공산당 수뇌부에선 모택동의 충칭 방문을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결국 "주석이 가면 여론이 우리 쪽에 설 것"이라는 '주더'의 의견이 받아들여져, 모택동이 직접 충칭을 방문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저우언라이, 왕뤄페이 등이 동행했고 류샤오치는 남아서 주석 대리를 맡았다. 모택동은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 미국 대사인 '헐리'가 충칭까지 동행하도록 조치했다. 충칭에 있는 소련 군사대표단에겐 피난처를 마련해 달라고도 했다. 8월 25일, 마침내 충칭에 도착한 모택동은 초반부터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공항에서 "장제스 만세"를 외쳤고, 평소 이미지와 달리 부드럽고 겸손한 태도를 유지했다. 적들의 경계를 완화하고 국민들에게 우호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한 계책이었다. 잠시나마 협상에 대한 긍정적 전망이 나오기도 했지만 오래가진 못했다. 장제스와 모택동은 '연합정부'에는 대체로 동의하면서도 민감한 세부 사항에 대해선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다. 장제스는 홍군의 규모를 대폭 줄임과 동시에 국민혁명군 관할 하에 둬야 하며, 국민당 정부의 통치력이 중국 전역에 확고히 미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택동은 홍군이 공산당 관할 하에 있어야 하며, 공산당도 베이핑 등 주요 지역에 대한 실질적 통치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두 사람 간 협상 및 실무진들의 협상이 이어졌지만, 획기적인 합의는 도출되지 못했다. 현저한 의견 차이만 확인할 뿐이었다. 그럼에도 장제스와 모택동은 국민들에게 무언가를 내놔야만 했다. 이에 10월 10일 '쌍십 협정'이 체결됐다. 여기에는 국공 양당이 민주, 평화, 단결, 통일을 기반으로 장기적으로 합작하며, 국민당의 훈정(일당 체제)을 조속히 종료하고 헌정(헌법 체제)을 실시할 것 등이 담겼다. 민감한 사항들은 추후에 계속 협상하기로 했다. 기실 쌍십 협정은 별다른 성과가 없을뿐더러 앞으로도 합의가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방증하는 셈이었다. 모택동도 이 협정에 대해 "한 장의 종이쪼가리에 불과하다"라고 혹평했다. 더욱이 이미 이 시점부터 양당의 군대는 동시다발적으로 무력 충돌을 벌이기 시작했다. 내전의 전초전이었다. (국공 내전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대표적인 충돌은 전략적 요충지였던 산시성의 '상당 전투'였다. 이 지역은 일본군이 일정 부분 점령은 했지만 공산당군도 진입해 항일 근거지로 삼았던 곳이다. 일본군이 사라지자 '옌시산' 이끄는 국민혁명군(산시군)이 이곳을 탈환하려 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결과는 국민혁명군의 참패였다. 류보청과 등소평이 지휘했던 공산당 팔로군은 우세한 병력 규모를 기반으로 매복 및 포위 공격을 적절히 구사해 적군을 궤멸시켰다. 국민혁명군 3만 5000여 명이 전사했고 주요 장교들이 사로잡혔다. 다음으로 화북 지역에 있는 허베이성 '한단'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마파우와 가오수쉰이 이끄는 4만 명의 국민혁명군이 해당 지역으로 진격했다. 이번에도 류보청이 우세한 병력 규모를 가진 팔로군을 이끌고 출전했다. 그런데 뜻밖의 지점에서 전투의 승패가 갈렸다. 국민혁명군의 가오수쉰이 자신의 병력을 거느리고 공산당 진영에 투항한 것이다. 가오수쉰은 장제스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평소 공산당에 대해서도 큰 반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이 점을 간파한 류보청이 가오수쉰을 적극 설득해 아군으로 만들었다. 이후 팔로군은 전의가 꺾인 국민혁명군을 허베이성 최남단에 있는 린장현 일대에서 격파했다. 모택동과 공산당은 상당 전투에 이어 한단 전투마저 승리하면서 커다란 자신감을 갖게 됐다.


국민혁명군이 의미 있는 전과를 올린 경우도 있었다. '수성의 명장'이었던 '푸쭤이'는 장제스의 명령을 받들어 쑤이위안성 일대를 점령했다. 공산당 팔로군은 이곳을 빼앗기 위해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푸쭤이는 정면 승부를 하지 않고, 성도였던 구이쑤이로 후퇴해 방어전에 돌입했다. 풍부한 실전 경험을 갖췄던 그는 공산당군이 공성전에 취약하다는 간파했다. 전략은 들어맞았다. 팔로군은 한 달 가까이 구이쑤이를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시키지 못하고 물러났다. 비슷한 시기에 양당의 군대는 공산당의 핵심 근거지에서도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펼쳤다. 한동안 무력 충돌이 이어지는 가운데, 이를 근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세력이 있었다. 미국이었다. 시종일관 미국은 중국에 민주적인 연합정부가 세워지길 희망했다. 그래야 소련을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12월 전직 육군참모총장인 '조지 마셜'을 중국에 파견해 양당을 중재하도록 했다. 구체적으로 내전을 중단시키고 양당의 군대를 하나로 통합하며 주요 당파가 참여하는 정치협상회의 개최 및 연합정부 수립이 목표였다. 국민당과 공산당은 일단 미국의 바람을 수용하는 듯했다. 둘 다 미국에 잘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1946년 1월 10일, 양당은 '1차 정전협정'에 합의하며 휴전했다. 정치협상회의도 개최해 연합정부 구성 등에 대해 논의했고 국민혁명군과 홍군의 병력을 조정하는 협정도 체결했다. (국민혁명군 50개 사단, 홍군 10개 사단으로의 감축이 골자였다.) 해당 협정은 만주와 화북, 서북 지역 등에서 공산당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음에도 모택동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며 협정을 준수하려 했다. 그만큼 미국에 의한 평화를 낙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전 협정의 효력은 오래가지 못했다. 마셜이 중국을 떠나자마자 국민혁명군은 예사롭지 않게 움직였다. 31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동원해 동북(만주) 지역에 대한 공세에 착수했다. (앞서 소련군이 진주해 있었는데, 그들은 노획한 일본군의 무기들을 공산당에게 대거 넘겨주는 등 공모하는 모습을 보여 국민당의 격한 반발을 불렀다. 소련과 국민당 정부가 체결한 '중소우호조약'에 위배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 장제스는 공산당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것만이 능사라고 확신한 상태였다. 국공 간 무력 충돌은 4월 18일 남만주의 요충지인 '쓰핑'에서 벌어졌다. 국민혁명군은 공산당의 동북민주연군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모택동은 "그 어떠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쓰핑을 사수하라"라고 외쳤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전황은 갈수록 국민혁명군에게 유리해졌다. 공세 병력이 크게 충원됐고 신6군이 측면에서 동북민주연군을 포위했다. 전멸 가능성을 우려한 동북민주연군 지휘관 '린뱌오'는 퇴각 명령을 내렸다. 쓰핑 전투로 인해 남만주의 모든 도시가 국민혁명군에게 넘어갔고 동북민주연군은 하얼빈으로 쫓겨났다. 이후에도 국민혁명군은 승승장구하며 북만주의 쑹화강 남쪽까지 빠르게 진격했다. 이대로 가면 동북 지역에 있는 공산당군이 완전히 궤멸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장제스가 진격 중지 명령을 내린 것이다. 극한 위기에 몰린 공산당이 마셜에게 국민당의 정전협정 위반 사실을 알렸고, 이를 들은 마셜은 장제스에게 싸우지 말라고 윽박질렀다. 이 상황은 훗날 장제스가 '천추의 한'으로 여긴 대목이다. 만약 이때 국민혁명군이 동북 지역 전체를 접수했다면, 국공 내전은 국민당의 조기 승리로 귀결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기사회생한 공산당은 해당 지역 농촌에 근거지를 마련하거나 추후 전투를 대비해 나갔다. 국민당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미국의 추가 개입으로 6월 5일 '2차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다만 이것은 정전 유효 기간이 15일에 불과한 한시적 협정이었다. 조만간 내전의 서막이 본격적으로 올라갈 참이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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