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식 훈련을 받는 중국 국민당 군대. 국민당군은 밖으로는 일본군과, 안으로는 세력을 확대하는 공산당군과 싸워야 했다.
■폭파된 황허강, 우한 함락
일본군은 우한을 공격하기에 앞서 '정저우'를 먼저 획득해야 했다. 이 도시는 동서남북을 연결하는 두 간선 철도가 교차하는 지역이었다. 정저우가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지면, 우한에 이어 시안마저 위기에 처할 터였다. 5월 말, 일본군은 정저우에서 겨우 40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했다.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 속도가 생각보다 빠르고, 어떻게 해서든 그 속도를 늦춰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정저우와 우한을 최종 방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을 법하다. 그렇다면 최소한 일본군의 진격속도만이라도 늦춤으로써, 우한에서의 최후 항전 및 '충칭'으로의 철수 준비 시간 등을 벌어야 했다. 그러나 장제스는 일본군의 진격 속도를 늦출 만한 방안을 좀처럼 찾아내지 못했다. 고심이 깊어지는 가운데 제1전구 사령관인 '청첸'이 뜻밖의 방안을 제시했다. 요지는 "물로 군대를 대신하자"라는 것이었다.
중국 중부 지역에는 문명의 발상지로 여겨지는 '황허강'이 흐르고 있었다. 일본군은 우한에 진입하기 위해선 이곳을 거쳐야만 했다. 청첸은 황허강의 물길을 통제하는 (정저우 주변부에 있는) 거대한 제방에 구멍을 뚫자고 했다. 그렇게 한다면 대홍수가 발생해 일본군의 진격을 획기적으로 지연시킬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다만 커다란 문제점이 병존했다. 대홍수의 여파로 중부 지역 대부분이 침수되고 수많은 중국인들이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높았다. 장제스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론은 '제방 폭파'였다. 장제스는 최후의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우한이라는 주요 도시 하나가 신속하게 넘어가는 것은 물론 국민당 지도부도 충칭으로 제때 철수하지 못해 사로잡힐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새 일본군은 더욱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에 신속한 폭파가 이뤄져야 했다. 중국군은 소도시인 자오커우 등에서 폭파를 단행했지만, 제방이 워낙 단단해 목표한 바를 달성하지 못했다. 폭파 작전 총책임자인 웨이루린 장군은 재조사 끝에 화위안커우가 폭파가 용이하게 이뤄질 장소라고 결론 내렸다. 2000여 명의 병력이 해당 지역에 투입돼 폭파를 단행했다. 제방은 몇 시간 만에 파괴됐고 수백 미터 폭의 거대한 물줄기가 동남쪽으로 쏟아졌다. 순식간에 5만 4000평방 킬로미터에 달하는 지역이 물에 잠겼다. 허난성, 안후이성, 장쑤성 등 수많은 도시들이큰 피해를 입었다. 약 85만 명이 사망했고 480만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국민당 정부는 이 사건이 일본군의 공습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은 즉각적으로 부인했다. 추후 미국 대사 등 수많은 사람들의 진술에 따라 중국군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중국군은 막대한 인명 손실을 무릅쓰고 일본군의 우한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하는 데 성공했다. 중국군은 우한에서의 항전을, 국민당 지도부는 충칭으로의 철수를 어느 정도 준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일본군은 진격을 재개했다. 강이 범람함에 따라 도시 북쪽에서 진격하는 것은 곤란했다. 해군의 도움을 받으며 창장강을 따라 도시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우수한 화력을 선보이며 중국군을 몰아붙였다. 하늘에선 일본 폭격기들이 날아다니며 중국군 요새 등을 무차별 폭격했다. 뚜렷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은 결사 항전을 이어갔다. 일본군은 예상보다 강한 중국군의 항전을 무력화하기 위해 '독가스'까지 살포했다. 이는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었다. 어느덧 일본군은 신양을 함락시키며 핑한 철도의 통제권을 확보했고, 머지않아 우한도 함락될 게 불을 보듯 뻔해졌다. 장제스는 우한을 지키는 중국군에게 "끝까지 도시를 방어하다가 장렬히 전사하라"라고 외쳤다. 그는 다른 장성들과 함께 꽤 오랜 시간 우한에 남아 항전하다가 극적으로 철수했다. 결국 1938년 10월 25일, 우한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 직후에 중국군은 '창사'라는 도시가 일본군의 다음 표적이 될 것이라 예상해 도시 전체에 불을 질렀다. 그러나 일본군은 당장 창사로 진격하지 않았다.)
■왕징웨이의 변절
국민당 정부는 중국 동부 지역을 일본에 완전히 내줬다. 발달된 국가기반시설과 주요 곡창지대 등을 잃었지만 항전의 동력이 절망적으로 꺾인 것은 아니었다. 이제 '자유 중국'의 새로운 대일 항전 중심지는 충칭이 됐다. 수많은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충칭의 인구는 단기간에 급증했다. 이 도시는 마치 국가의 축소판 같았다. 다만 충칭에서의 생활은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아 어두컴컴했고 식수는 턱없이 부족했다. 사람들이 생활할 만한 거주지도 마땅치 않았으며 판자촌이 크게 형성됐다. 무엇보다 충칭의 중국인들을 괴롭게 만든 것은 일본군의 공습이었다. 1939년 초부터 본격적인 공습이 이뤄졌다. 일본 폭격기들이 굉음을 내며 나타날 때마다 천둥이 내리치고 땅이 갈라지는 듯했다고 한다. 미처 방공 시설로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속절없이 죽임을 당했고, 설령 방공 시설로 대피했어도 지극히 갑갑한 상황을 마주해야 했다. 공습의 여파로 길거리에 시체들이 즐비했기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전문 시체 운송원들을 쉽게 목격할 수 있었다.
국민당 정부는 국가 차원의 구호위원회 등을 만들어 기본적인 도움을 제공했다. 일자리와 생필품을 지원하거나 효과적인 피란을 위한 수송 시설을 만들었다. 피란을 간 중국인들을 일본 치하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만들려는 공작을 저지하는 선전 활동에도 힘을 썼다. 정부는 여성들도 각종 사업에 투입해 적극 활용했다. 하지만 전시 상황을 뒷받침하는 경제 실정은 녹록지 않았다. 세입보다 세출이 많아지면서 재정이 큰 폭으로 감소했다. 군수 산업을 비롯한 전시 산업경제도 적절히 가동되지 않아 중국군의 전쟁 수행 능력을 향상하지 못했다. 한편 일본은 점령지에서 친일 부역자들을 선발해 괴뢰정부를 세웠다. 상하이 등에서 대도정부, 중화민국 유신정부 등이 수립됐다.
장제스는 중일 전쟁을 '혁명전쟁'으로 규정하며 여전히 항전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군사회의를 소집한 자리에서 중국의 긍정적 역사를 거론하며 희망을 전파하려 노력했다. 중국군의 전력을 한층 강화하기 위한 군사 개혁안들도 공유했다. 그런데 이 즈음에 모든 사람들이 항전 의지를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전쟁보다 일본과의 평화 협정을 선호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등이었다. 이전부터 협정에 뜻을 뒀지만 우한 함락으로 입장이 더욱 분명해졌다. 마침 고노에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아시아에서의 '신 질서'를 강조하며, 중국과 일본이 대등한 위치에서 힘을 모아 공산주의에 맞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도 무력 일변도보단 화전양면이나 '분열' 전술의 필요성을 느꼈던 듯하다.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등은 마음이 크게 흔들렸다. 왕징웨이는 비밀리에 상하이로 측근을 보내 일본과 평화협정 관련 구체적인 조건을 논의했다. 여기서 왕징웨이를 수반으로 하는 신 정부가 일본군 미 점령 지역에 수립되고, 일본군은 평화가 회복된 후에 철수한다는 1차 합의가 이뤄졌다. (만주국 승인, 배상, 치외법권 등 민감한 문제에 대한 격한 논쟁도 오고 갔다.) 왕징웨이는 오래된 정적인 장제스에 반대하기 위해서가 아닌 오로지 평화를 위해 일본과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중국의 국부인 쑨원이 표방한 '대아시아주의'도 일본과의 평화 및 협력에 방점을 두고 있다고 첨언했다. 그는 일찌감치 국민당 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망명'을 한 상태였다.
왕징웨이와 저우포하이 등의 변절을 알아챈 장제스는 당황했다. 그는 일기에 "왕징웨이가 정신을 차리고 돌아오기만을 희망할 뿐"이라고 썼다. 아울러 왕징웨이가 긍정적으로 평가한 고노에의 신질서는 중국인들을 노예화하고 다른 지역들을 점령하기 위한 술책이라고 비난했다. 중국의 거의 모든 언론들과 국민들이 왕징웨이 등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머지않아 국민당 정부는 왕징웨이를 공식 지위에서 해임했다. 아마도 왕징웨이는 자신의 주도 하에 평화나 중국의 재통합이 정말로 이뤄질 것이라 믿었을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꿈은 빠르게 깨졌다. 일본은 본색을 드러냈다. 다시 열린 협상 테이블에서 일본 측은 자국의 군대와 고문단이 중국에서 철수하지 말아야 하며 중국 북부 지역 분리, 상하이 등 특정 지역에 대한 일본의 통제, 주요 산업에 대한 특혜 등을 평화협정 조건으로 내걸었다. 왕징웨이의 신 정부도 여러 괴뢰정부 중 하나로만 인식했다. 이미 국민당 정부와 결별한 왕징웨이 등은 명백히 불리한 조건을 수용하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들만의 평화 협정은 체결됐고 1940년 3월 왕징웨이 정부가 난징에 세워졌다. 극히 소수의 친 왕징웨이 언론이 "정통 국민당 정부가 부활했다"라고 썼지만, 아무런 힘도 없는 친일적인 정부에 불과했다. 실체를 눈치챈 중국 국민들은 이 정부를 지지하지 않았다. 왕징웨이를 통해 중국의 분열을 획책하려 했던 일본의 전략도 무위에 그쳤다.
■짙어지는 암울함
이 시기에 중국군이 항상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요충지였던 창사에서 일본군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나아가 80개 사단을 동원, 북부의 산시성에서 남서부의 광시성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탈환하기 위한 '동계 공세'도 감행했다. 비록 일본군의 반격으로 공세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중국군이 방어를 넘어 공세도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일본군을 무척 놀라게 했다.
중일 전쟁이 한창 진행되고 있을 때, 유럽의 상황은 심상치 않게 돌아갔다.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소련과 '독소 불가침 조약'을 체결한 뒤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이는 장제스에게 지극히 불리한 일로 여겨졌다. 그동안 서유럽 국가들은 중일 전쟁에 대한 관심이 낮았는데,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이에 대한 관심이 더욱 낮아질 것이라고 봤다. 장제스가 상당히 의존했던 소련도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과의 조약 체결로 인해 대놓고 일본과 각을 세울 수 없었다. 아울러 비공식적인 원조 루트도 막혔다. 영국, 프랑스 등 일부 서유럽 국가들은 중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진 않았지만, 자유 중국에 대한 연민의 감정 등에 기반해 은밀히 전쟁 물자를 공급했다. 이제 세계대전의 여파로 버마, 남중국해, 인도차이나 등을 통한 원조가 중단됐다. 중국은 그 누구의 조그마한 도움도 기대할 것 없이, 철저히 혼자서 싸워야 하는 형편이었다.
1940년 대내외적으로 암울한 상황이 지속되는 가운데, 장제스는 중국 공산당의 움직임에도 신경 써야 했다. 앞서 국공 합작을 바탕으로 공산당은 국민당의 지휘 하에 대일 항전에 적극 나서기로 했었다. 그러나 공산당은 중일 전쟁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한 적이 거의 없었다. 주요 전투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옌안 등을 근거지로 삼아 세력을 넓히는 데에만 집중했다.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것은 펑더화이가 지휘한 '백단대전' 뿐이었다.) 전쟁 이전에 비해 공산당이 영향력을 미치는 지역이 크게 확대됐다. 군사력도 눈에 띄게 증강됐다. 장제스는 더 이상 좌시하지 않고 40만 병력을 동원해 공산당이 관할하는 핵심 지역들을 봉쇄했다. 이 지역들은 흉작까지 겹치면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또한 국민당군 지휘부는 공산당군이 이동할 것을 요구했다. 정해진 기한 내에 정해진 경로를 따라 공산당 신4군은 황허강 이북으로 북상해야 했다. 국민당군은 만약 요구를 수용하지 않을 경우 "관용 없이 처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공산당군 지휘부는 어떤 행동을 취할지를 두고 깊이 고심한 끝에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국민당군은 신4군의 이동 여부와 상관없이 일찌감치 공격 계획을 세워놨다. 신4군이 어느 장소에 진입했을 때, 갑자기 국민당군이 나타나 가차 없이 공격을 가했다. 신4군은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수천 명이 죽임을 당했고 지휘관인 샹잉도 목숨을 잃었다. (모택동은 당내 유일한 경쟁자였던 샹잉의 죽음으로 정치적 이득을 봤다.)
학살에 가까운 국민당군의 행위는 거센 역풍을 불러일으켰다. 국민들은 손을 잡고 일본과 싸워도 시원치 않을 판에 장제스가 국내의 적을 제거하는 데 혈안이 돼 있다고 비판했다. 해외 언론에서도 비판이 제기됐다. 장제스는 공산당을 더는 제어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전시에 일본군과 더불어 공산당과도 싸우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은 전쟁 뒤로 미루기로 했다. 국민당의 방관 하에 공산당은 계속해서 세력 확장에 나설 수 있었다. 한편 국민당 정부의 수도인 충칭을 겨냥한 일본군의 극악한 공습은 종료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수많은 중국인들이 방공호 안팎에서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고,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르는 공습에 몸서리를 쳤다. 전쟁의 일상화에 중국인들은 점점 지쳐갔다. 암울함이 짙어지던 중 1941년 극적인 변화가 감지됐다. 미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시 미국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충칭에 특사를 파견해 군수 장비 지원을 약속했다. 비슷한 시기에 이미 영국에 대한 원조도 시행했고, 그해 6월 독일군이 불가침 조약을 파기하고 소련을 공격한 뒤에는 소련에도 상당한 원조를 했다. 독일, 일본 등 파시즘 세력의 위험성을 직감한 미국이 그동안의 중립 노선에서 벗어나 전쟁의 문턱으로 서서히 진입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