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개혁, 개방의 어두운 그림자..등소평의 '천안문 사태'

[숙청의 역사 20] 중국판 '5.18 항쟁' 전말

by 최경식
다운로드.jpg 등소평.

#. 아래 내용은 2023년 10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세계사편'의 서두 부분.


"20만 명의 목숨을 희생시키는 한이 있더라도, 국면을 통제하고 향후 20년의 안녕을 쟁취할 것이다.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겠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보도록 하라." -등소평 무력진압 명령 中


1980년대,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 국가들이 개혁과 개방, 자유화의 길로 나아가려는 모습이 뚜렷이 나타났다. 이와 동시에 냉전을 넘어 전 세계에 평화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했다. 중국도 이 같은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등소평'이 집권한 후, 중국은 모택동 시대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개혁, 개방'의 길로 나아갔다. 실용주의 노선에 입각한 등소평의 개혁, 개방 정책은 '표면적으로' 중국을 도태가 아닌 성장의 길로 이끌었다. 하지만 이것은 명백한 모순이 내재된 성장이었다. 개혁, 개방 하에서 각종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이 독버섯처럼 자라났다. 과거에 쉽게 볼 수 없었던 이러한 문제들은 중국의 국민들, 특히 대학생들의 격한 반발을 불렀다. 그 반발의 정점에 바로 '천안문 6.4 항쟁'이 있었다.


천안문 항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중국 현대사에 큰 족적을 남긴 사건으로 평가를 받는다. 우선 일반 시민과 학생, 노동자 등이 총체적으로 연대해 저항 운동을 전개했다. 그 저항은 결코 폭력적이지 않았다. 대체로 비폭력적이고 평화로웠으며 한 때는 '민주주의 축제'를 연상케 할 정도의 모습도 나타났다. 그 안에서 자유와 창발이 거침없이 분출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천안문 항쟁을 프랑스의 '68 운동'에 비견하는 평가도 나왔다. 모택동 시대의 중국만을 생각했던 국제 사회는 이 당시 중국에서 발생한 새롭고 건강한 저항 운동을 크게 주목했다. 개혁, 개방에 따른 중국의 경제 성장에 이어 천안문 항쟁에 따른 중국의 정치사회적 자유 및 민주주의 발전이 조만간 나타날 것으로 기대됐다.


그러나 천안문 항쟁은 비극적인 결말로 귀결되며 미완의 가능성으로 남았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용납할 수 없었던 중국 정부는 천안문 항쟁을 '반혁명 동란'으로 규정, 매우 폭력적인 방식을 동원해 짓밟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계엄군의 무차별적인 발포에 쓰러졌고 그 시신은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다. 유혈 진압이 종료된 후에도, 항쟁을 주도했거나 가담한 수많은 사람들이 체포돼 고문을 당하고 사형에 처해졌다. 여기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해외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중국 정부는 강제적인 정치 및 사상 교육 시행,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말살 등을 통해 '국가 통제'대폭 강화했다. 국제적인 흐름과는 정반대로 중국에서는 명백한 '퇴행'이 나타났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중국 정부가 느꼈던 '천안문 항쟁 트라우마'가 극심했다는 것을 방증한다. 그 결과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중국에서 아래로부터의 개혁 요구나 저항 운동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천안문 항쟁이 반드시 중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민주주의 항쟁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5.18 항쟁'이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됐던 것처럼, 이와 비슷한 천안문 항쟁이 훗날 중국 민주화 운동의 밑거름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 현대사의 중대 분수령, 개혁·개방의 어두운 그림자인 '천안문 항쟁' 전말을 되돌아봤다.

keyword
최경식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기자 프로필
구독자 2,973
이전 09화이란의 신정 국가화..호메이니 '이슬람 근본주의 혁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