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청의 역사 16] 자국 문화, 자국민들 파괴한 집단광기 전말
#. 아래 내용은 2023년 10월에 출간된 '숙청의 역사-세계사편'의 서두 부분.
"의심할 여지없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 중에 무산계급 신사조, 신문화, 신풍속, 신습관이 지주들과 기타 착취 계급의 구사상, 구문화, 구풍속, 구습관 이런 부패한 것들을 대체할 것이다. 위대한 마오쩌둥 사상으로 무장해 떨쳐 일어선 중국 인민들은 반드시 온갖 잡귀신들을 쓸어버릴 것이다." -중앙문혁소조장 천보다 연설 中
현재 중국 대륙을 통치하고 있는 '공산당'은 1920~30년대까지는 중국 내 소수 세력에 불과했다. 당시 중국 대륙의 중심 세력은 장제스가 이끄는 '국민당'이었다. 그들은 공산당과 비교할 수 없는 압도적인 군사력 및 행정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공산당과의 경쟁에서 항상 우위에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일 전쟁이라는 거대한 전란이 끝난 이후에도 중국 대륙은 변함없이 국민당의 통치 하에 있을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최후의 승리자는 공산당이었다. 그들은 중일 전쟁 중 기묘한 전략으로 힘을 키웠고 부정부패에 물든 국민당의 연이은 실책 등으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다. 본편에서 다뤄줄 주인공인 '모택동'은 바로 이 공산당의 승리를 이끈 주역이었다. 그의 탁월한 군사 전략가로서의 면모는 공산당 승리의 핵심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그런데 모택동은 군사적으로는 탁월했을지 모르나 행정가로서는 최악이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건설한 후 모택동이 야심 차게 추진한 주요 정책들은 대부분 뼈아픈 실패로 끝났다. 특히 서방 국가들을 따라잡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대약진 운동'은 중국 국민들을 대기근으로 몰아넣는 참사를 낳았다. 정상적이라면 이때 모택동은 모든 책임을 지고 뒷선으로 완전히 물러났어야 했다. 실제로 후임자였던 류샤오치와 등소평은 모택동과 다른 노선을 걷거나 그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흔적 지우기에 나서는 모습까지 보였다. 그러나 모택동은 끝내 물러나지 않았다. 당시 사회에 불만을 갖고 있는 대학생들의 마음을 악용해 자신의 충견들인 '홍위병'을 만들었고, 이를 기반으로 '문화대혁명'을 일으키며 권력의 중심에 다시 들어섰다.
문화대혁명은 '혁명'이라는 용어 때문에 자칫 긍정적인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대규모 '반달리즘'(파괴) 운동이었다. 봉건적이고 부르주아적인 '낡은 것'들을 청산해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목표였지만, 매우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방식으로 전개돼 수많은 대상들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 유무형의 전통문화재가 대거 파괴됐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오로지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 홍위병들만이 안전지대에 있었다. 당초 내세웠던 평등은 모두가 못 살고 모두가 못 배우게 되는 퇴보한 평등으로 변질됐으며, 류샤오치 시대에 회복되는 듯했던 중국의 경제는 다시 나락으로 떨어졌다. 결국 모택동과 그 추종자들의 권력욕과 허무맹랑한 이상에서 비롯된 문화대혁명은 중국 사회의 근간을 뒤흔들고 무너뜨린 '문화대숙청'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모택동은 자신이 건설한 국가를 자신의 손으로 파괴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 셈이다. 그럼에도 현대의 중국인들이 모택동을 국부로 여기며 숭배하고 있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보이기에 충분하다. 자국 문화와 자국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한 집단광기, 모택동의 '문화대혁명' 전말을 되돌아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