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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대문 Sep 05. 2021

일요일에는 쌀도 살 수 없었습니다.

토요일에 장을 보지 않은 게으름뱅이는 하루 종일 물만 마셨어요.

때는 바야흐로 독일에 도착 한 지 만 한 달째가 되는 날이었다. 나는 아직도 그날이 선명하다. 그날의 조명, 온도, 습도..


일요일을 기념하며 느지막이 일어나 시리얼을 먹을 계획이었다. 신선한 계란을 톡톡 까서 계란 프라이도 하나 하고. 빵도 토스터에 바삭바삭하게 굽고.


전날까지 마무리해야 할 일이 있었고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호로록 잠이 들었었다. 피곤함을 핑계 삼아 잠을 잔 벌이 내려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어릴 적부터 덤벙거리는 구석이 있어서 항상 일처리에 빈 공간이 생기곤 했다. 엄마는 그 단점을 덮을 수 있도록 꽤나 계획적인 인간으로 나를 길러줬다. 그러나 노력과 결과물이 항상 비례하는 것은 아니듯 나 또한 그렇다. 완벽을 추구하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숭숭 구멍 뚫린 방충망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운이 좋았던 게 분명했다. 우연히 일요일이 되기 전에 항상 장을 봤던 것은. 보통 일주일에 두어 번, 식료품이 떨어지기 전에 요모조모 사놓은 것이 뜻하지 않은 행운이었던 모양이었다.


주로 신선 식품 위주로 장을 보던 나는 그날따라 집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리얼은 ‘한 알’이 남아있었다. 한 알.

이 한 알 때문에 버리지 않고 모셔놓았던 게 분명했다. 아니 그냥 귀찮아서였지. 매번 찬장을 열 때마다 ‘오 시리얼이 여전히 있군’하고 안심하게 만들었던 과거의 나. 남은 시리얼 한 알을 먹으며 쓰레기를 정리했다.


우유라도 마시자 하고 열어본 냉장고도 텅텅 비어있었다. 나란 사람. 먹지 않아 버리는 음식물 쓰레기는 없는 사람. 그리고 ‘만약’을 대비하지 않는 사람.


쌀이고 빵이고 계란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다. 첫 자취이다 보니 먹을 만큼만 사는 게 미덕인 줄 알았다.


여전히 정신없는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섰다. 오늘 장을 봐서 앞으로 일주일 먹을 것을 야무지게 챙겨놔야지. 머릿속으로 구매할 물건을 정리하며 장바구니도 챙겼다.




일요일의 거리는 한산했다. 빵집도 문을 닫은 게 보였다. 그제야 ‘마트도 문을 안 열었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괜히 걸음을 빨리 해서 매번 가던 곳에 가 봤지만 건물 자체로 들어가는 문이 닫혀있었다. 바로 옆의 너른 잔디밭에서는 한 가족이 하하호호 웃으며 원판 던지기를 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가족과 함께 몰려나와서 콧바람을 쐬는 사람이 한가득이었다. 가끔가다 열린 식당도 있었지만 한 끼에 10€(대략 13000원가량)을 넘는 식당들이었다. 게다가 딱히 계획에 없는 외식은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한 달. 독일에 온 지 한 달 된 그때의 나는 장을 볼 수 없다는 좌절감에 깊이 사로잡혔다. 별 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사실 찾고자 하면 어디든 문을 연 마트는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특히 대도시 같은 경우 ‘중앙 기차역’ 안에 있는 마트들은 거의 영업을 한다. 그게 아니라면 집 근처 어디든 ‚Späti‘라는 이름의 작은 마트들 중 주일 영업을 하는 곳도 있다. 파는 것은 주로 과자나 빵, 간단한 음료 정도이고 마트에서 사는 것보다 약 두배 가량은 비싸지만.


여하튼 방법이야 찾으면 있을 테지만, 그때는 또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면서 왜 일요일에는 영업을 안 하는 건지 홀로 씩씩 거리고 있었다. 한국의 다양하고도 넓은 범위의 서비스에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이런 것들이 큰 불편으로 다가왔다.


그렇게 돌아서 집으로 가는 길에 익숙한 얼굴을 지나쳤다. 마트에서 장 보고 집 가는 길에 한 번씩 들러 사 먹었던 ‘베트남 음식점’의 주인아저씨였다. 값싼 가격에 많은 양을 주는 가게라 배고픔에 허덕일 때 한 번씩 즐길 수 있는 작은 사치였다.


그 아저씨는 올망졸망한 아이들 두어 명과 아내로 보이는 분과 함께였다. 손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쥐고 마음껏 휴일을 즐기는 중인 것 같았다.


그 순간, ‘모두가 쉬는 날’의 큰 의의를 느꼈다. 해야 하는 일을 뒤로 밀고 쉴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적을 것이다. 항상 일 할 수 있는 날이라면 그날 짧은 휴식을 가지는 것도 사치라고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근데 나라에서 ‘이 날은 일하면 안 됨. 일할 거면 세금을 그만큼 더 걷을 것이다!’하고 선전포고 해 버리니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하루는 무조건 쉬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하루가 거의 모든 노동자들에게 숨 쉴 시간을 주는 것이었다.


오늘의 나는 소비자였지만 내일의 나는 노동자가 되는 것처럼, 모두가 이렇게 여러 가지 역할을 맡아서 수행하게 되니 나라에서 정한 하루의 휴일은 결국 모두를 위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즉, 일요일 장 보기를 실패한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한 것이다.




한 가족의 아이스크림 나들이에서 이것을 깨닫고는 조금 색다른 기분이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물 밖에 없었지만, 내가 어떤 나라에서 살게 된 건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밤이 늦도록 그 가족이 먹던 아이스크림이 아른거렸다. 어디서 산 건지 물어볼걸. 아이스크림이라도 먹게. 꼬르륵.

 

토요일 오후, 텅텅 비어 가는 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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