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피칼 아일랜드와 덤 앤 더머
찬 바람이 불면 뜨끈한 공기가 그렇게나 그리워진다. 특히 한국에서 사우나를 사랑했던 사람으로서 더더욱이나. 수건을 돌돌 말아 머리에 척 얹어 놓고- 양머리, 요즘도 이 양머리를 하나요?- 소금방, 한증막 등등 근본 없는 것 같지만,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있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는 훈훈한 사우나. 사우나용으로 받은 옷이 땀에 흠뻑 젖을 때쯤 나와서 시원한 식혜에 잘 익은 쫄깃한 계란 탁탁 까 먹는. 지금은 글을 쓰는 내내 입맛이 동한다.
하늘 높은 지 모르고 치솟은 가스비와 물세 덕분에 여기저기서 ‘샤워를 맨날 할 수가 없다’ 던 지, ‘뜨거운 물 샤워는 최대한 짧게 해야 한다’는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농담 같은가? 진심이다. 한 친구는 집안 온도를 18도로 맞추고 겨울을 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집 안에서도 얇은 패딩과 털옷으로 무장하고 지낸다고. 1년 치 가스비를 모아서 연말 정산 후에 금액을 더 청구하던지 혹은 냈던 금액보다 적게 사용하면 돌려주는 독일식 정산 시스템 때문이다.
‘도대체 얼마를 더 내야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최대한 아껴보려고’라고 말하는 친구는 , 한 달 내내 감기에 걸려 있었다. 전쟁의 여파가 이렇게 닥쳐오다니.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이 있는 판국에 이런 우는 소리는 좀 그렇지만, 그래도 삶의 무게가 좀 더 무거워진 느낌이긴 하다. 추워도 꾹 참아야 하는 시간들이라니.
그런 고로, 전쟁과 코로나가 닥쳐오기 전, 아직 내가 파릇파릇했던 독일 새내기일 적에 다녀온 ‘트로피칼아일랜드- 사우나 편‘을 풀어볼까 한다.
어째 자꾸 이야기들이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 같은데, 일상의 흐름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과거가 미래가 되고 현재가 과거가 되고 그런 거지.
트로피칼 아일랜드 (Tropical island).
비행기 격납고를 실내 워터파크로 개조한 곳이다. 실내 수영장 치고 거대한 규모로 유명한 곳이다.
독일은 지나간 시설들을 이용 무언가를 만드는데 꽤나 좋은 성과를 거둔다. 베를린에만 해도 만든 곳이 또 하나 있는데, 공항이었던 곳을 공원으로 개조한 (Tempelhof fled) 도 있다. 비행기 활주로였던 곳을 자전거나 킥보드 같은 것들을 이용해서 씽씽 달려볼 수 있다. 워낙에나 넓어서 한쪽은 바비큐 공간, 한쪽은 강아지 운동장, 한쪽은 선탠 하는 사람들 등등 자유롭게 넓은 공간을 사용할 수 있다. 트로피칼아일랜드 역시 상상이상의 큰 규모를 자랑한다.
여튼, 설명은 이쯤 하고, 독일에서 실내 수영장이나 사우나를 갈 때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우리 둘은 한놈은 반만 알았고 한놈은 아예 몰랐다. 그래서 아이고 어이구 곡소리를 내었지.
바로 슬리퍼. 그리고 샤워가운이다.
나는 나름대로 체력을 관리해 보고자 헬스장을 다니던 때였다. 그때 헬스장에 딸려 있는 작은 사우나와 수영장을 사용할 때 그놈의 슬리퍼를 꼭 신어야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리고 샤워가운도.
당시 나보다 한 1년 정도 먼저 독일에 나와있던 내 친구 놈은 그걸 몰랐었다. 그러니 여러분 다들 운동하십시오. 잡다한 지식이 쌓여 바닥이 오돌토돌한 트로피칼 아일랜드를 걸을 때 필요한 슬리퍼를 지참하고 가는 지혜가 생깁니다. 아구 추워하는 비명이 샐 때 몸 위에 걸친 샤워가운도 챙겨가는 지혜도 생깁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하면- 실내수영장에 수영복을 입고 입장 한 곳부터 모래가 깔려있고 몸을 물에 담글 수 있는 장소까지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는 말이다. 가는 길에 홍학-물론 살아있는-들도 볼 수 있고 환상의 나라에서나 들을 수 있는 녹음된 온갖 잡다한 동물들의 울음소리도 들을 수 있다. 사람들이 미끄러져 넘어질까 걱정이 되었던지 바닥은 넘어지는 순간 갈려버리는. 오돌토돌한 미끄럼방지 바닥이다. 당당하게 맨발로 입성했던 내 친구는 맨발로 거니는 것이 처음에는 좀 부끄러웠고 나중에는 바닥이 너무 아팠던 모양이었다. 나중에는 내 슬리퍼를 번갈아 가며 신다가 한놈은 오른쪽만 한놈은 왼쪽만 슬리퍼를 신고 다니는 진기명기를 펼쳤다. 다들 얼마나 우리를 바보라고 생각했을까.
조금 더 시간을 앞 순서로 당겨볼까. 왜 우리가 그곳을 갔는지-부터 이야기해볼 시간이다.
유학생의 신분으로 독일을 마주하던 시절. 나는 정말로 학교와 도서관, 집을 오갔다. 새로운 일정이라고 해봤자 어학원 가기, 혹은 전시회 가기, 오페라 보러 가기 등의 문화생활 향유. 엉덩이를 흔들면서 놀러 다니는 게 참 마음이 그랬다. 친구 놈도 별반 다르지 않았는데 어느 날 이 녀석이 때를 써대기 시작한 것이다.
너는 베를린에 살지 않느냐, (당시 내 친구는 바다가 있는 도시에서 유학했다.), 너는 거기가 코앞인데! 우리가 청춘을 이렇게 공부만 할 거면 독일을 왜 왔느냐, 내가 이 년 동안 공부만 했는데, 나는 그 워터파크를 가보고 싶다. 내가 이러다가 귀국을 하면 어쩌느냐 , 나 귀국 전에 한 번은 가야 하지 않겠냐! 나는 친구가 너뿐인데! 네가 안 가면 나는!
뭐 대충 이런 이야기였고, 나 역시 친구가 그놈 하나뿐이어서 어영부영 트로피칼아일랜드라는 곳을 가보자! 하는 덤 앤 더머 파티가 결성된 것이다. 공부하라 보내준 돈을 으른이라 불리는 나이가 되어서도 받는 게 죄송스러웠는데, 그걸 노는데 쓰다니- 하는 마음이 거세게 일었지만, 이때 아니면 또 언제 가보겠나 하는 마음으로 엉덩이를 흔들며 기대하기 시작했다.
가자- 하고 결정을 내리자 두 녀석의 마음에는 두근거림이 일기 시작했는지 맨날 똑같은 내용의 통화를 하루가 멀다 하고 했다. 쓸데없이 날짜를 또 체크하고, 친구가 베를린에 도착하는 날을 다시 체크하고, 우리가 그곳에 언제 가서 언제 돌아오는 기차를 탈지, 옷은 뭘 입고 갈지, 수영복은 너는 무슨 색이네, 나는 무슨 색을 입네, 튜브를 써도 되는지 안되는지 등등. 아주 신이 나 버린 것이다.
그리고 친구는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하나 더 던졌다.
야 우리 사우나도 들어가야 해.
라고.
하지만 나는 이미 위에서도 말했듯이, 이놈 저놈 다 섞여 들어 운동을 해대고 땀을 빼는 헬스장에 다니고 있었다. 나름대로 콩만 한 수영장도 생색내기 용으로 가지고 있고 한 칸짜리 이지만 사우나도 보유한 곳이었다.
뭐 이렇게 비장하게 이야기를 해- 하며 아주 가볍게 대꾸했다.
사우나, 그거 많이 비싸냐?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