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전성기
기분에 취해 있을쏘냐. 이럴때는 빠른 문제해결을 위해 머리를 굴려야 한다. 아핫 이런 어설픈 나. 하고 주저앉아 있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것은 아니니까.
지금 내가 할 일은 멍청비용을 지불하기 위해 당장 뛰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선 핸드폰부터 저전력 모드로 바꿔놓고, 온 우주가 나를 도와주기를 짧게 기도하면서 방 문 밖을 나섰다. 호텔 침대에서 늘어져 휴식을 취하려던 계획은 온통 사라졌다.
나가는 길, 잊지도 않고 야무지게 챙겨 온 작은 에코백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물도 하나 사와야 하고. 그러보니 저녁도 먹어야 하니까. 이 에코백 챙길 정신으로 충전기를 챙겼다면 참 좋았을 텐데. 하핫 이런 어설픈 나. 다시 한번 스스로에게 눈물 겨운 찬사를 보내주며 땅층으로 내려왔다.
나가는 손님에게 눈인사를 건네는 직원을 보고 혹시나 하고 프론트에 한번 들러보기로 했다.
“있잖아, 내가 핸드폰 충전기를 집에 두고 왔어. 혹시 빌릴 수 있을까?”
“오우!”
외마디 감탄사와 함께 미중년의 아저씨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커다란 상자를 텅 내려놓는 것이 아닌가.
“시도해보자. 여기에 뭐가 많거든!”
그렇게 상자 뚜겅이 열리고 요모조모 잘 정리된 케이블들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너무 슬프게도 10개 남짓 되는 것들 사이에 아이폰 충전기는 없었지만.
“그러면 충전기 헤드만 빌려줄래? 내기 케이블은 지금 사러 가려고”
“오! 당연하지. 지금 가져가”
Samsung 이라는 자랑스런 문구가 박혀 있는 충전기 헤드를 빌리고 그대로 호텔 문을 나섰다. 사랑해요 삼성. 화이팅!
버스를 타러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호텔 근처에 평점이 꽤나 좋던 수제버거 집에 사람이 빼곡한게 보인다. 현금 계산만 가능하다고 떡하니 써 있으니 오늘 저기서 밥을 먹을 수는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미 햄버거에 정신이 팔려버려서 저녁 메뉴는 햄버거로 결정났다. 이럴때는 대기업을 찾으면 문제가 거의 해결된다. 카드 계산도 되고, 햄버거도 파는 모두의 M. 그 노란 간판을 찾으러 구글지도를 펴 보니, 어엉? 달랑 두개가 도시 중심으로 부터 멀리도 있다.
우선 가장 급한 아이폰 케이블을 사야한다. 독일의 올리브영 같은 역할을 하는 DM을 찾았다. 여차 하면 여기서 보조베터리도 하나 구매하려고 했는데 수요가 없는지 케이블만 판단다. 멍청비용을 지불하는 중이어도 분홍색과 퍼런 색 중에 맘에 드는 색은 신중하게 골랐다.
핸드폰 생명 줄을 구매하고 보니 근처에 슈퍼마켓도 있고 KFC도 있다. 어영부영 왔는데 필요한게 한가득 몰려 있다.
한손에는 치킨을 한 손에는 사과와 물 한 통을 , 주머니에는 케이블을 성공덕으로 구매해서 호텔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만하면 사고친 거 치고는 땀만 조금 흘리고 다 해결했으니 다행이다.
어느새 밤이 내려앉은 도시는 색다르게 이쁘다. 다만. 커다란 차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이라 정신 바짝 차리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설상가상으로 편한한 옷을 입고 온다고 온통 새카맣게 입은 통에 내가 보이지 않을까 잠시 두려웠다.
여차저차 다시 돌아온 호텔. 프런트 옆 호텔 레스토랑에 손님이 밀려들고 있다. 꽤나 차려입은 모양새의 손님들이 있는 걸 보니 가격대가 높을 모양이다.
안쪽으로 들어가 세상에서 제일 느리게 운행하는 엘레베이터를 기다렸다. 독일에는 이렇게 직접 문을 열어서 타야 하는 엘레베이터가 꽤 많다.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줄만 알았던 엘레베이터도 이런 과정을 거쳐 지금 우리가 아는 모습이 된 것이다.
덜컹덜컹 하면서 영원과도 같은 시간을 기다리자 드디어 다시 호텔방에 들어섰다. 분주하게 손을 씻고 톨-깍 하며 캔콜라를 열었다. 크으- 이 맛이지.
쌉쌀하게 올라오는 탄산에 긴장감과 걱정 같은 감정을 싸 하게 내려버린다. 시간은 어느덧 20시. 도시에는 해가 완전히 내려 앉았다. 여전히 뜨끈한 치킨 한 조각을 와앙 베어물었다. 주문의 가장 마지막 순간, 햄버거와 치킨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선택했는데,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 없었다. 느긋하게 냠냠 먹고서는 온 몸의 피로를 씻어내고 널찍한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그저 한번 깜박였을 뿐인 것 같은데, 이미 아침이 밝았다. 바쁘게 움직이며 일정을 처리하고 나니 어느새 다시 기차에 올라타 엉덩이를 혹사시킬 시간이다.
그런데, 뜻 밖의 행운을 마주했다. 중앙역이랑 약간 떨어진 거리에서 출발해야해서 별 생각 없이 근처의 작은 역을 찾았다. 이름은 Hof-neuhof (새로운 역). 꼬불꼬불 작은 길을 따라 걸으니, 상상하던 작은 소도시의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마주했다.
가을이, 햇살이, 따스함이 가득 내려앉은 작은 기차역. 30분에 겨우 한대 뿐인 한칸짜리 기차만 운행하는 곳. 바람조차 고요하게 불어오고, 양 옆으로 빽빽한 나무들은 거리의 온갖 산만한 소리를 막아준다.
나무에게도 최고로 빛나는 순간이 있다면 지금이 아닐까. 움틔우는 순간을 지나 가장 푸르던 순간을 지나 온전히 무르익는 시간.
종종 청춘을 여름에 비유하지 않나. 그렇게 모두가 무성하게 가지 뻗는 순간에 나는 여전히 제자리에사 움틔우는 중인것 같아, 혹은 이미 청춘의 푸르른 순간이 지나 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나의 전성기는
이미 지나간게 아닐까. 나도 모르게. 뭐 이런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오늘, 온전히 무르익을 준비를 하는 나무의 모습을 보니 계절마다 저마다의 모습으로 전성기가 있겠다 싶다. 가을에는 오히려 뚝심있게 푸르르기 보다는 그을려 색을 입는 나무가 더 아름다워보이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세월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는 모습도 괜찮겠다 싶다. 뿌리만 단단히 박혀 있다면 나라는 존재는 항상 그대로니까. 단풍나무가 싹을 틔울 때에도, 초록잎일 때에도, 붉게 노랗게 물들 때에도, 이파리 대신 눈꽃을 피워내도 달라지지 않는 것 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