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저희 집 목단에, 배경은 AI 입니다^^
늘 제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어리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을 뜨겁게 떠올리고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그들"은 어리고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했던 뉴스 속 청소년과 청년들
그리고 연예인, 더 나아가 나이와 성별을 떠나 뉴스를 통해 전해졌었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우리 곁의 세상을 홀로 이고 있다 등진 "그분들"을 칭합니다.
"그들"이 제 마음속에는 매일 존재합니다.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기도를 하다가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과 필자의 차이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투병을 할 적, 산사(山寺)의 객방의 홀로 누워 묻곤 했습니다.
"그들과 내가 뭐가 다르기에 나는 살았고, 그들은 갔나."
"나는 뭐가 잘나, 뭐를 잘 살았기에 이곳 산사(山寺)에 와 이런 관심과 보살핌을......"
어릴 적부터 품어온 죄책감이지만서도, 이제는 성인이 된 한 사람으로서 죄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그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을 이해하는, 같은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제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그들"을 절박하게 떠올리며 뜨겁게 응원하고 뜨겁게 설득하기 위해 쓴,
너무나도 짧디 짧은 붙잡음이자 호소임을 밝힙니다.
이 세상 모든 "그들" 이 보진 못할지라도 이제는 씁니다.
저에게는 산사(山寺 )에 들어가기 전까지 불행리스트가 적힌 종이가 있었습니다.
남들에겐 버킷 리스트라는 게 있다는데, 저는 그런 리스트를 써보고 싶지도, 써볼 엄두도 나지 않았습니다.
처음부터 불행 리스트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어느 날, 살아도 살아도 도저히 다음 장으로는 넘어가지 않는 제 삶을 인지했을 때, 저는 제 삶(의 불행)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곤 갑자기 눈앞에 보이던 손바닥만 한 분홍색 포스트잇에 깨알 같은 글씨로 숫자를 적어 불행의 목록을 작성해 보았습니다. 그것을 내려다보며 스스로 적어놓고도 해괴한 짓 같았지만, 제 불행이 온전하게 보였습니다.
단순한 불행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불행 따위는 적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삶이 불행한 이유를 뿌리까지 쥐고 있는 그런 불행들이 거의 스무 개가 넘었습니다.
어느 날, 각각 서로 알지 못하는 저의 지인들이 저와 통화를 하며 제게 분이 나듯 말했습니다.
제가 행복해지지 않는다면 자신(들)은 신을 믿지 않겠다고요, 신은 없는 거라고요.
아이러니하게도 한 지인은 모태신앙의 기독교신자였고, 또 다른 지인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저런 말을 해도 되나, 듣는 저의 간담이 서늘하면서도 그들의 신앙을 제가 흔드는 것만 같아 미안함과 난처한 마음마저 들었습니다.)
어느 날 저 역시 생각했습니다.
정말로 신이 있다면 내 불행 목록이 단 한 개라도 지워져야 된다고요.
그리고 이번 생 저의 무덤까지 함께 묻힐 줄 알았던 그 불행의 목록들은 지금 제 인생에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심부자궁내막증(DIE)이란 불행을 겪으며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때문에 제가 DIE를 겪기 전과 겪을 때 저를 알았던 모든 사람들은 (혈육이든 남이든) 이제 저를 알지 못합니다. 그때의 저는 이제 없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색이 바래고 헤진 불행 리스트는
산사(山寺)에서
잠시 집에 들렀던 어느 날
의미 없는 종이 쪼가리가 되어
제 손에서 갈기갈기 찢기어 버려졌습니다.
불행은 보통 관계-인연, 돈, 건강, 직업, 꿈, 가정 등을 잃으며 시작됩니다.
그리고 (신비롭게도) 인생의 다음 장은 그것이 불행이든 행복이든 임계점에 다다라야 끝이 나고 시작됩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인생의 법칙처럼, 불행이 날 이길 것이냐, 내가 불행을 이길 것이냐란 시험의 관문에서 우리가 성숙된 자제로 성장한다면, 마치 누군가 계획한 듯이 인생의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시간들, 새로운 일들이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저에게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지독한 질문이 하나 있었습니다.
왜 인간은 불행해야 하는가!
왜 인간은 불행하게 태어나는가!
왜 인간은 불행함에도 살아야 하는가!
왜 불행은 사람을 가려서 찾아오는가!
왜 착한 사람은 계속해서 불행하고, 나쁜 사람들은 처벌받지 않는가!
왜 신이 있다면 인간의 불공평한 불행과 악행을 보고만 있는가!
결국, 인간의 존재 이유와, 선과 악을 지닌 인간 본질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저에게는 아주 어릴 적부터 이어져온 지독한 병(病) 이 하나 있었습니다.
눈과 귀로 보고, 읽고 들은 누군가의, 그리고 동물들의 불행한 일들이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사십 년이 되도록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고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불쑥불쑥 떠올라, 하던 일을 멈춰야 할 만큼
고통스럽고 괴로움을 느끼는 병(病)입니다.
특히나 어린아이들과 동물들의 아픔과 고통에는 더욱 심한 고통을 느낍니다.
저도 모르게 (그들의 사건이 떠오르면) 밥을 먹다가도, 아무 일이 없이 즐겁다가도
안면을 찡그리고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몸을 움츠리며 모든 사고와 행동이 멈추게 됩니다.
예전에는 위와 같은 증상과 함께 도저히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한 기분이 동반되는 증상이 오랜 시간 이어졌었지요. 그땐 세상이 다 멈춥니다. 그 괴물 같은 기분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숨죽인 채요.
위에 적은 불행에 대한 저의 의문들이 너무 오랜 시간 쌓이면서 저는 세상에도 사람에게도 회의적인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제가 염세주의자나 은둔자같은 성향의 사람으로 살았다면 믿으실까요?
도저히 받아들일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세상의 고통에 대한 의문 앞에 저는 제2의 인격을 택한 겁니다.
그러나 늘 바랐습니다.
내가 불행한 건 둘째치고 제발 세상 사람들과 동물들만이라도 불행하지 않길 매일같이 기도하며 바랐습니다.
그랬던 제가 "DIE"라는 질병으로 모든 것을 다 잃고 밑바닥에 있는 지금, 불행의 본질은 행복을 구하기 위함이라고 이야기하려 합니다.
살면서 우리가 겪는 불행이나 절망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아플 수도 있고, 자식 같은 저의 반려견이 제 곁을 떠날 수도 있고, 제 탓이 없는 또 다른 사건과 사고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염세주의자나 은둔자가 다시 되지도 않을뿐더러 불행과 멱살잡이 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이젠 세상뿐만이 아닌, (저의 반려견을 위해서) 제 자신의 건강과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불행 덕분에 이룬 인생의 크나큰 쾌거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시 언제 무너질지 모를 깨달음과 믿음이자, 다시 언제 찾아올지 모를 시련과 불행일지언정, 지금의 제겐 불행이 없습니다. 그러니 지금이 행복입니다.
설령 저에게 다시 불행이 온다 해도 이제는 그 모든 것이 제 인생에 준비되었던 것이며, 그 모든 것이 이유와 가치가 있는 계획이었으며, 그렇기에 그 모든 것이 결국은 받아들여야 하는 일임을 이제는 압니다.
결국 "불행"이라 칭하기보단, 저라는 한 사람의 "인생"이라 말해야겠지요.
그래서 저는 매일 "오늘"을 삽니다.
오늘 제게 주어진 하루치의 희망과 믿음을 손에 쥐고 말입니다.
때문에 제가 할 일은, 어떤 시련 앞에서도 불행의 본질은 내게 더 높은 가치와 성숙을 바라는 일임을 잊지 않음과 동시에 유려하고 강인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일입니다.
흡사 그것은 기도의 마음을 닮았습니다.
불행이 없다고 말하는,
아무것도 아직 이룬 것도 가진 것도 없는 지금임에도
현재가 행복이라 말하는 저의 삶을 한 번 적어봅니다.
과거의 상처와 선택을 인정하는 삶.
과거의 상처를 나의 성숙의 시간으로 이해하는 삶.
과거의 선택을 책임지며 억울해하지 않는 삶.
현재를 스스로 선택하고 만족하는 삶.
사람은 누구나 나약하며 혼자임을 깨닫는 삶.
외로움과 불안과 우울함의 본질이 사람-관계에 있지 않음을 아는 삶.
외로움과 불안과 우울함의 본질이 "내가 나로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임을 깨닫는 삶.
사랑, 관계, 돈, 성공, 인정, 외모, 나이, 직업의 불만족 때문에 삶이 불행하지 않음을 깨닫는 삶.
불행이 내게 원하는 바대로, 내 불행의 가치와 성숙을 믿는 삶.
불행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꾸준히 실천하고 나누는 삶.
불행이 누구의 탓과 이유이건 그 해답을 타인이 아닌 내 안에서 이루려는 삶.
결국, 정신적- 육체적 자유와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삶.
우리는 백살이 되어도 우리 자신으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 하고 갈 수도 있습니다.
그 사실이 인간과 삶의 가장 큰 고통의 원인입니다.
신은 사람에게 매일매일의 저마다의 희망과 믿음을 줍니다.
우리가 실제보다 더 절망하고 불행한 이유는,
오늘이 아닌 내일 당장, 그리고 먼 미래의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이루어지지 않을까 봐 전전긍긍하며,
미래의 희망과 결과를 당겨 쓰길 바라기 때문입니다.
"DIE" 고통으로 움직일 수조차 없어, 배고픈 속에 마른 누룽지를 입안에 물고 집안을 기다 쓰러질 적,
"DIE"의 통증으로 인해 직장을 잃고, 경제적으로 모든 걸 다 잃고, 의자에 앉는 일을 할 수 없어, 진통제를 빈 속에 먹어가며 새벽 5시에 대전 여기저기 빌딩과 원룸 청소를 다닐 적,
지하부터 지상 8층까지의 계단과 복도의 난간을 부여잡고 걸어 오르고 내릴 적,
남모를 이들의 쓰레기와 먼지와 오물을 쓸고 닦고 비우며 빌딩 하나당 하루에 단 돈 1만 원을 받을 때,
그리고 내 곁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을 때,
성경 속 욥(Job)이 떠올랐습니다.
지금도 그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릅니다.
그는 과연 그 고통을... 어떻게 견뎠을까. 그는 과연 하나님에 대한 그 억울함과 비통함을 어찌 견뎠을까.
그는 과연 그를 쉬게 하지 않는 고통 속에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여러분, 부처님도 예수님도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세상 수많은 성인과 지위가 높았던 왕들조차 고난을 겪고 세간의 음해와 배신과 욕을 받아야 했습니다.
눈앞에 베란다 창을 열고 떨어져 죽고만 싶었던 통증의 시간들을 짧지 않은 시간 버텼고, 정말로 죽으려는 찰나, 저는 계획도 없던, 산사(山寺)에서 몸을 의탁하게 되었으며, 그리고 어느 날 저의 원인 모르고 뜻 모를 고통과 불행을 저는 욥을 생각하며, 성인의 고난을 기억하며 그렇게 견디고 이해했습니다.
그들도 받은 고통인데......
그들보다야 나의 고통이......
불행을 겪어보면 압니다.
결국 불행을 겪는 것도, 그 불행을 치고 올라오는 것도 자신 혼자서만이 가능하단 사실을요.
때문에 사람의 자존심, 자존감, 인격, 존엄성이 무너질 정도의 절망의 바닥을 혼자 딛고 서면 드디어 알게 됩니다.
아! 사람이나 돈이나 사랑이나 성공 따위 때문에 외로운 것도, 고독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었구나!
인생이 정말로 별 것 없는데, 내가 나를 모르고, 나 없는 삶을 살며 그토록 전전긍긍, 애를 태우며 살았구나! 가족에게, 혈육에게, 세상에 인정받기 위해, 내가 나 없이 살아서 그토록 불안하고 불행했구나!
그리곤 가장 중요한 진리를 깨닫게 됩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생사보다
더한 큰일과 불행은 세상에 없는 거구나!
그렇게 제 인생의 모든 불행 목록은 사라졌습니다.
어머니의 태중에서부터 사십 평생이 불행했고 불운했던 사실도 별것 아닌, 하찮은 일이 되었습니다.
불행의 끝은 나를 찾게 합니다.
그러니 그것이 행복입니다.
그리곤 나 자신과 세상에 나의 이야기와 가치를 나누고픈 의지와 믿음과 희망이 비로소 생깁니다.
저에게는 불행 덕분에 "환자"라는 명사가 하나 생겼습니다.
지금도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가치와 뜻을 해석하며 동행하는 연습을 하는 중입니다.
종종 한탄스러운 마음이 치솟기도 합니다.
"내가 아프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몸만 건강했다면!"
그러나 틀린 말입니다.
제가 환자가 되지 않았다면 지금만큼 열심히 살 수 없었을 겁니다. 다시 글을 쓰지도 않았을 것이며, 글을 가치를 기여코 찾아내지도 못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럼에도 이 세상에 제가 태어난 이유와 몫을 찾지도 믿지도 못했을 겁니다.
보통은 내가 아프지 않았으면 날아다녔을 거라고 말하지만 그것은 사실 착각입니다.
아팠기에, 잃었기에 소중한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신이, 제게 오지 않던 인생의 두 번째 장을 위한 조건으로 "성장과 성숙"을 이루게 하기 위해 심부자궁내막증 (DIE)이라는 불행을 준비했단 사실을 이제 압니다.
원래 이번 연재의 제목은 '수심 천 미터 짜리의 불행이 바라는 건, 그 끝에 행복을 구해내는 일'이었습니다.
바다의 깊이를 말할 땐 km 단위가 아닌 보통 m 단위를 씁니다.
이윤, 바다는 단 몇십 m만 달라져도 생물 분포, 빛의 양, 압력 등이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깊이가 깊어질수록 더하겠지요.
그래서 단순히 바다의 넓이를 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정밀함 등을 위해서 m 단위를 쓴다고 합니다.
과학적으로 사람은 수심 천 미터를 내려갈 수 없습니다.
바닷물의 10m를 내려갈 때마다 약 1 기압이 증가합니다. 그렇담 1000m는 약 100 기압일 겁니다.
그 압력은 사람의 몸을 수 십 대의 트럭이 누르는 힘이고, 금속이 순식간에 납작하게 찌그러지는 힘입니다.
강철도 버티지 못합니다. 일반 잠수함의 잠수 깊이가 보통 300m 정도라고 하니까요.
1천 미터의 심해는 완전한 암흑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 겪어내는 불행은, 우리에게는 수심 천 미터보다 더 지독하고 혹독하게 느껴집니다.
사람들은 종종 불행을 끝도 없고, 빛도 없는 암흑 같은 긴 터널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저는 늘 제 인생이 도저히 다음 장으로는 넘어가지 않는, 그런 지긋지긋한 불행이라 생각했었습니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이 이렇게까지 불행할 수 있나! 목숨만 안 뺏으셨고, 누군가,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지 않고, 신체의 장애만 주지 않으셨다 뿐이지, 세상 불행은 결국 골고구 다 주신게 아닌가!
결국 내 불행은 희망고문으로 시간만 끌다 이번 생을 끝내겠구나. 하고요.
그러나 세상에 그런 불행은 없-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는 선택(시간)은 있어도
돌이킬 수 없는 불행은 없습니다.
이윤, 수심 1천 미터짜리 불행이 우리에게 바라는 건, (그게 누구의 의도이자 계획이건) 결국 불행과 함께 온 "행복" 혹은 "행운"을 우리 스스로가 찾아내 구해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즉, 스스로의 구원입니다.
불행은 반드시-어김없이 행복과 행운의 손을 잡고 옵니다. 사람마다, 그의 환경과 노력마다의 시간차가 있을지라도요.
여러분이 이 사실을 믿지 않으면 삶이 던지는 불행에 고통과 절망만 답습하다 생을 마감해야 합니다.
모든 게 행복했는데 갑자기 불행이 닥친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그게 누구의 의도이자 계획이건) 이 우주가 혹은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에게 더 나은, 더 깊어진 성숙을 통해 세상에 혹은 자신과 주변에 더 가치 있는 무언가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나아가기 위한 시험의 문을 준비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런 성숙도, 그런 가치와 희생도 원한적 없고, 원하지 않는다고 하는 건, 여러분이 불행을 벗어나는 답이 아닙니다.
다만, 불행이 우리에게 온 이유를 알아채고, 그 가치를 믿고, 낙심하지 말며 끝까지 불행의 손에 잡힌 행복과 행운을 구해내는 일.
(그게 누구의 의도이자 계획이건) 하늘이 인간 모두에게 바라는 일입니다.
때문에 불행이란 심해 속에 우리가 갖출 장비란, 지혜로운 모색과 결고 포기치 않는 바른 노력입니다.
수 십 년이 걸릴 수 있습니다. 수 천, 수 만 번의 모색과 시도, 실패와 좌절이 필요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랬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불행이 제게 행복을 주기위해 왔음을 믿기로 했습니다.
제 스스로의 존엄성을 증명하고 이번 생을 떠날 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로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불행의 본질이 행복이라니, 더 나은 가치와 성숙의 추구 있다니, 불행이 시험의 관문이라니! 더군다나 불행이 반드시 행복의 손을 잡고 오다니!
여러분, 누군가에겐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잔인하고 잔인한 말일 수 있습니다.
저는 종종 영화 "밀양"과 "신부가 된 복서"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러나... 행복도 불행도 결국, 결국은... 자신의 선택과 만족입니다.
바꿀 수 없는 고통과 현실 앞에 나는 우리는 -죽을 수 없다면- 과연 어느 쪽, 어떤 선택으로 살아가기로
작정할 것인가!
인생의 허울과 상처와 결핍을 벗어버리고, 독립과 자유를 이루는 일, 세상과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대가 없이 나누는 일이 불행이 찾아온 본질과 가치임을 깨닫거나 인정치 못하더라도요.
여러분, 불행이 우리에게 가장 원치 않는 일은, 우리가 불행과 멱살잡이 하며 불행만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여기까지 읽어주신 여러분, 대단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