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은 작년 여름, 어느 암자에서 찍은 백련에, AI 배경입니다^^
※ 이번 연재는 늘 제 마음 한켠에 자리하고 있는, 어리고 젊은 나이에 세상을 등지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그들" 을 뜨겁게 떠올리고 생각하며 쓴 글입니다.
여기서 지칭하는 "그들" 은 어리고 젊은 나이에 자살을 선택했던 뉴스 속 청소년과 청년들 그리고 연예인, 더나아가 나이와 성별을 떠나 뉴스를 통해 전해졌었고 지금도 전해지고 있는 우리 곁의 세상을 홀로 이고있다 등진 "그분들"을 칭합니다.
"그들"이 제 마음속에는 매일 존재합니다.
밥을 먹다가고, 길을 가다가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기도를 하다가도......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들과 필자의 차이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성인이 된 한 사람으로써 죄스러운 마음과 동시에 그 두려움과 불안과 절망을 이해하는,
같은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내고 있는 제가, 지금도 어딘가에 있을 "그들"을
절박하게 떠올리며 뜨겁게 응원하고 뜨겁게 설득하기 위해 쓴, 너무나도 짧디 짧은 붙잡음이자 호소임을 밝힙니다.
대부분의 "그들" 이 보진 못할지라도 이제는 씁니다.
저는 지난 시간 "DIE"라는 병명을 찾기 위해 (스물 두 곳 정도의) 상급병원, 일반 종합병원, 일반병원, 한의원, 재활의학과, 개인도수치료실 등을 다니며, 그중 몇몇의 (한)의사와 도수치료사에게 환자로써도 여성으로서도 당해선 안 될 비윤리적인 말과 행동 그리고 성추행 등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연재는 그런 "사건"이나 "상처" 나 "억울함"을 말하기 위해 준비한 연재가 아닙니다.
이번 연재는, 이 세상에 이유가 없이 "나쁜 사람들" 에게 "상처" 받고, 그 "상처"의 기억으로 여전히 고통받으며 자신을 아프게 하는 "누군가들"을 위한 연재입니다.
늘 고민합니다.
분명코 도움이 되는 글을 써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번 연재를 쓸지 말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했습니다.
지난 연재에서 이웃 작가님들께 이제는 좀 산뜻하고 희망적인 제목-내용의 글로 이 연재의 끝을 펼쳐 보이겠다 했는데......
나는 이 주제를 왜 써야 하나, 무엇을 위해 쓰려 하나.
저에게는 <서른아홉, 이토록 아픈 생리통>을 통해 털어버려야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제가 다시 글을 쓸 거라고는, 그것도 심부자궁내막증(DIE)이라는 절망이 계기가 되어 다시 책상에 앉게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해 볼 수 없었던, 지금으로부터 2년 3개월 전의 저는 수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 빠져, 병명을 찾기 위해 언제 끝날지 모를 병원순례를 다니던 때였습니다.
한겨울 병원을 오가던 도로 위를, 매일 울어 터진 볼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쓰라리게 훔치며 다녔던 기억밖에는 없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서 털어 내버리고 싶었던 그 이야기는 <서른아홉, 이토록 아픈 생리통> 연재를 하는 내내 목차에서 지워지지 않고 마음을 붙잡아두고 있었습니다.
마치 "고발"처럼 혹은 "고해성사"처럼 연재 속에 한 번은 담고 싶었던 이야기.
그 이야기는 바로, 진료과정에서 당했던 믿기지 않는 처우와 성추행 등으로 입은 수치심과 모멸감, 즉 "상처"입니다.
투병당시 만났던, 잊히지 않는 "나쁜 사람들"에 대한 분기탱천 (憤氣撐天) 한 마음과 "저 이런 일까지 당했어요"라고 호소하며 위로받고 싶은 복합적인 마음을 담고 싶었을 이야기.
그런데 연재가 여기에 이르니, 그리고 마음과 몸이 회복되니 그 주제가 이제는 내게 무슨 힘이 있어 나를 괴롭히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쓰기로 했습니다.
받은 상처가 성숙이 되어 이제는 제 자신의 호소를 위해서가 아닌, 제가 이 주제를 써야 하는 이유-가치를 찾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사람은 자신 안에 담긴 것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세상밖에 올바른 뜻과 형태로 흘려보내야 하는 몫을 가진 유일한 존재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둘째,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자신 안의 상처와 분노를 잘 흘려 "보내줘야" 하기 때문입니다.
샛째, 바로 저와 같이 당한-당할 약자들을 위해서입니다. 혹은 저와 같이 한평생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나는 착해야 한다는 "선함"의 자기희생에 묶여, 세상의 검은 흑(黑)을 지혜로써 상대해야 함을 몰랐던 그런 분들을 위해서입니다.
"왜 사람이 사람에게 나쁘고 못되게 굴어야 하지?"
"그 사람이 내게 나쁘고 못되게 굴었다고 나도 그래야 하나?"
"그럼 대체 그 사람과 내가 다른 게 무엇이고, 세상에 선이 왜 있지?"
여기까지가 얼마 전의 제가 선(善)이 악(惡)을 대함에 대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러나 "DIE" 투병 중, 사회와 절에서 이유불문 나쁜 사람들을 겪으며 깨달은 사실이 있습니다.
순수함과 순진함은 다른 것이며, 착하기만 해선 나 스스로뿐만 아니라 주변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 있단 사실입니다.
투병 중, 숱한 군상의 나쁜 사람들을 겪으며 그 사람들이 나쁜 이유를 찾을 수도, 용인할 수도 없어, 결국 그 이유를 세상의 이치와 제 안에서 찾은 것입니다.
순수함과 순진함은 다릅니다.
어린아이들과 새끼인 동물들은 순진무구함에 실수를 하고도 그것이 왜 하면 안 되는 실수인지를 모르며, 불이나 독약을 보고 만져도 위험한지를 모르기에 자신이나 주변을 함께 위험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사람은 지혜로울 수 있으나, 그저 순진함만을 지닌 사람은 자신도 남도 피해를 주게 됩니다.
이윤,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어리석어도 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착하고 여리다고 해서 지혜를 갖춘 것은 아닙니다.
지혜는 끝없는 자기 성찰과 세상의 경험을 올바로 보고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생깁니다.
세상을 살며 "왜 내게만 이런 억울하고 믿기 힘든 불행한 일이 계속 생길까" "나는 저 사람에게 진실로 주기만 한 기억밖에 없는데, 왜 나를 음해(陰害)할까."
이윤, 제가 순진하기만 했고 어리석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흑(黑) 이 존재함과 그 이유와 이치를 받아들이고, 그런 흑(黑)을 지혜로써 멀리하고 다룰 줄 아는 힘을 스스로든 가정에서든 배워야 했음을, 그 필요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보통의 우리는 그 과정을 삶의 혹독함 속에서 겪어내며 배웁니다.
사실 여러분이 들으면 경악을 너머 읽다 화가 나거나 눈물이 날 정도로, 제게 수치심을 주고 모멸감이란 단어를 알게 하고 심지어 성추행까지 했던 (어떤 식으로든 의료계에 종사하는) 나쁜 그 사람들을 한 명, 한 명, 있는 그대로 나열하고 써서, 여러분의 위로와 분개와 응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제 상처가 그저 상처인 채로 남아있던 얼마 전까지의 제 바람처럼요.
그러나 이제는 그런 아픈 진실들을 써낼 열 손가락의 의지가 사라졌습니다. 가치가 없는 글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작가가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첫 소설이 대실패 후, 그리고 공황장애를 겪으며 글에 대한 동경이 짝사랑이 되고, 짝사랑이 애증이 되고, 더 나아가 글 자체에 염증(厭症)이 나, 글을 부정하는 일련의 시간들을 겪었습니다.
"글이란 결국 계속 읽는 사람들만 읽어, 지성인은 계속 고양되고, 읽지 않는 이들은 여전히 읽지 않고, 세상은 변하지 않고.."
"내 글이 성인들의 글처럼 세상의 빛이 되고 어벤저스처럼 지구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여기게 더해 어느 순간 내면의 쌓인 상처가 그저 고이기만 하며 인간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 갔습니다.
가수 김윤아의 노래 "검은 강"처럼 인간의 존재이유도 세상의 존재이유도 찾을 수가 없었으며, 신이 있다면 왜 인간은 이토록 불행하고 악해야만 하는가, 늘 고통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세상의 선함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무엇보다 괴로웠던 사실은, 모순이 없는 일, 앞과 뒤가 똑같을 수 있는 일-직업(職業)은 아무리 찾아도 세상에는 없단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두길보기" 처럼 글에 한 발을 두고 살면서도, 또 다른 길에 한 발을 담근 채, 내 길이 아닌 다른 길을 모색하며 짧지 않은 날을 방황했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더 이상 방황조차 할 수 없는 몸으로 병이 들어,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줄 알았던 제가 인생의 가장 큰 불행을 홀로 겪으며 글을 써야 하는 이유-가치를 의도치 않게 찾은 것입니다.
(그토록 오랜 시간 간절히 원하고 찾아 헤맬 때는 도저히 보이지 않던 이유와 가치 말입니다.)
<서른아홉, 이토록 아픈 생리통>의 책 소개처럼, 이 "DIE"라는 질병이 화가 날 정도로 너무나도 끔찍스러워, 저와 같은 이들에게 단 한 명이라도 더 이 질병에 대해 알리고, 그런 이들을 돕고자 시작한 간절한 마음이, 결국 저로 하여금 (위에서도 언급한) 다음과 같은 이유-가치를 깨닫게 했으며 다시 펜을 잡게 했습니다.
첫째로, 사람은 자신이 삶을 살며 배우고 경험하며 깨달은 것들을,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세상 밖에 올바른 뜻과 형태로 흘려보내기 위해 태어난 존재입니다.
즉, 대가 없는 나눔입니다.
둘째는, 우리는 스스로를 성숙시키고 살리기 위해, 자신 안의 상처와 분노를 잘 "흘려보내주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글에 염증마저 느꼈던 제가, 제 안의 상처를 성숙으로 흘려보내고, 사람의 존재 이유(태어난 몫)이자 글쓰기의 가치를 깨달을 수 있었던 기적 같은 힘은, 바로 이 글을 읽어주고 계신 여러분 덕분입니다.
세상 사람들 일정수(一定數)는 여전히 책을 보지 않을지라도
세상의 선은 여전히 미약해 보이고 악이 이겨 보일지라도
나의 글이 세상을 구하진 못할지라도
내가 애써 포기하지 않고 써 내려간 글이
이 세상 누군가, 단 한 사람에게라도 도움이 되고
마음을 줄 수 있는 한 줄의 글귀가 된다면
그것으로써 쓰는 일의 몫이 다하였음을요.
저는 여러분들의 꾸준한 응원과 격려와 진심 어린 평가 속에서 2년 3개월 전의 믿지 못할 나쁜 사람들도,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받은 잔인한 상처와 수치심도, 또한 도저히 눈물이 아니고는 입이 떨어지지 않던 이 "DIE" 질병의 고통과 절망과 두려움도 이제는 "상처"가 아닌 "성숙" 이 되어 꽤 우아한 방법으로 제 안에서 멀리멀리 흘려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안의 "상처"와 "화(火)를 어떤 식으로 흘려보낼 것인가를 성찰하게 해 주시고, 더 나은 감정과 방법으로 흘려보내도록 "선택" 하게 해 주신 독자 여러분과 이웃작가님들께 다신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다시) 찾은 "글"의 힘입니다.
그러나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 중, 자신 안의 응어리진 감정들을 어떤 식으로든 흘려보내는 일은 고사하고, 일상을 살아가는 일마저 힘겨울 만큼, 끝이 없어 보이는 절망스러운 상황을 홀로 감당중인 분들도 분명 계실 겁니다.
어떤 분들은 몸은 건강하지만 사람과의 관계나 경제적인 어려움 속에서, 또 어떤 분들은 환자의 상황으로 써요.
제가 살면서 가장 힘들고 억울했던 점은 일방적인 공격과 무시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들을 무조건적으로 참고 받아들여야 했던 시간들입니다.
같은 말로 상대방의 인격이 부족하여 나의 잘못이 없음에도 당한 억울한 일들입니다.
그런 나쁜 사람들과 상처들은 매일 아침 기도를 하면서도 종종 잊히지 않고 무의식에 떠올라 자꾸만 그 시간 속으로 저의 마음을 묶어 들어갑니다.
"생각할수록 정말 나쁜 사람이구나......!"
그런데요 여러분, 우리가 받은 상처의 진실이 정말로 일방적인 것이었든 아님 상호 간의 것이었든, 받은 상처의 결말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라는 결말에서 멈추면 우리 자신이 살 수 없습니다.
제대로 숨 쉴 수 없습니다.
나쁜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멀쩡한데 말이지요.
병명을 찾고 치료를 받기 위해 나쁜 사람들에게 듣고 당했던 상처들이 떠오를 때마다 묻고 또 물었습니다.
"왜 그랬을까, 왜 나였을까, 나는 왜 당당하게 대처하지 못했나."
그리고 어느 날 질문에 대한 답을 내렸습니다.
제가 찾은 이 답이, 부디 현재의 자신의 상황이 너무 초라하고 척박하여 세상의 무례함과 무지함과 폭력에 정당한 항변은 고사하고, 지나가는 소리로조차 표현할 수 없는 분들께, 자신만의 답을 찾는 작은 지표가 되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써봅니다.
세상은 일정수는 여전히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고 함부로 대합니다.
환자의 절박한 호소, 오랜 시간 고통에 시달려 초라하고 구색조차 맞지 않는 행색,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인해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먼저 낮은 자세로 자신의 위태로운 마음을 호소하는 그 모든 연약함과 절박함을 무시와 무례로 대하는 영혼이 척박한 사람들.
그러나 상대방을 겉모습과 처한 환경만으로 무시하는 것은 사람이 가진 안 좋은 본성 중 하나일 뿐입니다.
게다가 안 좋은 본성을 스스로 깨닫고 고칠 필요를 의식하지 못하며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일정수를 채우고 있습니다.
또한 그 사람의 학식과 직업이 그 사람의 인격을 대변하지도 않습니다.
직업적 윤리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 그 사람들의 현재의 "자리"는 어쩌면 순전한 그 사람의 환경의 뒷받침과 운덕뿐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좋은 머리와 노력도 필요했겠지만요.
그럼에도 자신이 가지고 누린 위치와 권위를 마치 자신이 잘났기에 당연히 누리는 듯 착각하며, 평생을 오만함 속에 살아가도 아무렇지 않은 사람들도 이 세상에는 일정수 늘 존재합니다.
때문에 여러분이 환자의 입장에서든 아니든, 누군가에게 잊히지 않을 상처를 받으셨다면, 그건 더 이상 여러분이 고통 속에 질문해야 할 "상처" 나 "사건"이 아닙니다.
그 "상처"는 여러분이 이 세상에 일정수 존재하는 "나쁜 사람" , "모자란 사람"을 만났던 것뿐입니다.
혹은 내 상황이 열악하다 보니, 나 자신이 절박하다 보니 그런 사람과 환경에 더 노출되었던 것뿐입니다.
"그 사람이 왜 내게!"
" 왜 자꾸 나한테만 이런 일이!"라고
여러분을 "질문지옥" 속에 가두지 마세요.
내가 연약하고 여려졌-었-기에, 상처를 받을 더 많은 경우의 수에 노출됐던 것뿐입니다.
혹, 도저히 법으로도 정의로도 돈으로도 힘으로도 되갚아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나요?
그래도 자신을 "질문지옥" 속에, 그들을 응징하는 상상 속 고통의 매듭 속에 자신을 묶어 들어가지 마세요.
거기에 이유는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여러분입니다.
여러분이 사는 것이 우주가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없다면, 이 우주도 없습니다.
내가 존재함에 이 세상이 존재합니다.
나쁜 사람들이 여러분을 상처 준 일에는
어떤 논리적인 이유도 없습니다.
그런 "당연히 나쁜 사람들"을
흘려보내지 않는다면
세상이 여러분을 향해 웃어 보여도
여러분은 그 웃음을 마중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건, 상처 준 "나쁜 사람들"에게
영원히 제대로 지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너무도 멀쩡한데
왜 우리가
아무도 답을 주지 않는 그 이유를
끝없이 붙잡고 불행해야 할까요?
상처가 있어도 억울해서라도
우리는 그것을 나의 상처가 아닌
나쁜 사람들이 준 가소로운 것으로
비웃으며 나의 행복을 위해
다시 살아가야 합니다.
타인이 쏜 화살을 깊이 맞았다면
독하게 뽑아버리고
땅바닥에 미련 없이 던져 버린 채
피 흘리는 여러분을 더욱 치유하고
사랑해 주세요.
나쁜 이들로 하여금 도저히 용서할 수도 잊을 수도 없는 "상처"를 입은 "누군가"에게는 저의 이 모든 말과 글이 사치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혹은 마음에 닿지 않는 말처럼 들릴 수도 있습니다.
잘 압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저 역시 여러분이 입었을 "말 못 할 혹은 다신 그 일을 당하기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상처들을 겪어왔기 때문입니다.
(가정이나 학교나 직장이나 종교 집단 내의) 오랜 세월 지속된 학대, 세뇌된 폭력과 무시, 이성과 윤리가 부재하는 따돌림과 음해, (오래 세월 공공연하게 지속된 권력 집단 내의) 성추행과 성폭력과 그것을 은폐하고 방관하는 사람들, 주기만 하고 돕기만 했던, 믿었던 사람(들)의 침묵과 배신, 결국은 나의 사랑과 신의를 자신(들)의 이익으로 소모해 버리는 사람들. 오랜 세월 내가 믿었던 가치들을 의미 없는 것으로 전락시키고 부정하게 만드는......
그리고 그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악한 말과 행동이 "기억이 안 난다." "나는 그런 적이 없다." 입니다.
당연합니다.
한참을, 정말 수십 년의 시간을 그들을 헤아리는 일로
제 인생을 할애한 후회야 깨달았습니다.
그 사람들은 타인의 상처 혹은
자신이 타인에게 주는 상처에 관심이 없습니다.
즉, 공감에 대한 능력이 그 부분의 "사고" 가
현저히 떨어지는 "부족한" 사람이었던 겁니다.
그러지 않고선 설명할 수 없는
이 세상 인간의 나쁨이자 모순이자, 악입니다.
때문에 물리적이 아닌 세계에선
정말로 불쌍하고 아픈건 그들입니다.
그러나 "상처"는 비단 사람 때문에만 입진 않습니다.
감당 못 할 경제적인 어려움 또는 예고 없는 질병과 사고, 누군가의 죽음 등......
세상의 "상처" 들은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우리에게 혹은 우리 곁에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간 존재 이래의 현실입니다.
요즘 사람들 사이에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삶의 지혜가 있다고 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자신의 약점과 어려움과 치부를 말하지 말라고요.
"쟤가 먼저 빌미를 줬으니 그랬겠지!"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겠어?"
"저 사람은 몸과 영혼이 더럽혀진 사람"
"산전수전 다 겪어 닳고 닳은 아이"
"그러니까 네 부모가, 네 형제가 너를"
그럼에도 저는 여러분께 지금 이렇게 잘난 척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상품팔이나 사연팔이처럼 이용하려 함이 아닙니다.
"당신이 내가 겪은 일을 안 당해봐서 그렇지"라고 말할지도 모를 그 말을 원천봉쇄하기 위해서입니다.
왜일까요.
일평생 죽는 것만이 유일한 삶의 길이고 답이자 소원이었던 저 같은 사람도 사십 평생이 되어서라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상처"는 결코 여러분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상처"를 붙잡고 있지만 않다면요.
상처받고도 "행복"할 수 있으며
상처받고도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상처받기 전과 똑같이요.
아니 더 넘치게요.
(성추행과 성폭행 이야기를 떠나) 만약 여러분이 인생을 살며 누군가에게 꾸준히 호의를 베풀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인연의 끝이 좋지 않았다면 저처럼 한 번만 돌아보시면 어떨까요?
실은 내가 너무도 외로워, 너무도 사람과 사랑이 그리워, 가진 게 너무 없는 나 자신 스스로가 오랜 시간 위축되어 (그)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바람에, 혹은 나의 트라우마를 감추기 위해서 혹은 반대로 내가 가진 상처를 위로받고자, 자신도 모르게 주변 사람과 세상을 대함에 필요 이상의 낮은 자세와 무조건 적인 선의를 베풀진 않았는지를요. 아주 오랜 시간을요.
제가 그랬거든요.
결국 제게 돌아오는 상처와 악함에 저는 너무 오랜 시간을 질문의 고문 속에 저를 묶고 그들을 (혈육이든 남이든) 수천번 등장시키며 제 인생을 그들의 무대로 늘 꽉 채운 채 살았었습니다.
'DIE'라는 질병을 만나 회복하기 전까지요.
여러분, 세상의 나쁜 사람들이 여러분의 그런 연약함과 착한 미소와 예의 바른 태로를 무례하게 낮추어 대하더라도 당황하지 마세요. 상처받지 마세요.
여러분의 곁에도 자신의 직위, 권위, 혹은 자신의 성격이나 스타일, 솔직함 등을 무기로 여러분에게 무례를 일삼는 사람들이 있나요?
열 번이면 열 번 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의를 저버리는 사람들로 상처받은 적 있으신가요?
그 어떤 이유와 핑계를 대더라도 사람은 사람에게 예의 바르고 친절해야 합니다. 또한 받은 마음의 신의를 지키려 애쓰는 모습을 보이려 노력해야 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보면 연민과 측은지심이 먼저 이는 인지상정의 마음.
울고 있는 사람은 먼저 달래 주고, 배고픈 사람에겐 먹을 것을 나눠주며
추운 사람에게는 먼저 자신의 옷을 벗어 주고, 목마른 사람에겐 먼저 물 한 잔을 가져다줘야 합니다.
옳은 일도, 그른 일도 뭐든 그다음입니다. 그러나 당신을 상처 준 사람들은 이 마음을 모릅니다.
이건 누군가 가르쳐 줘야 아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나쁜 사람들은 대부분 스스로 부족한 사람임을 모르기에 자신의 잘못도 모릅니다. 자신이 모자란 사람임을 무의식적으로 감추기 위해 상대방에게 더욱 강하게 말하고 행동합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가져본 적 없는 선한 마음과 순수한 진심을 품은 여러분의 마음을 업신여길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에게 수없이 상처받았어도 여전히 한결같은 진심과 순수함과 신의를 내고 지킬 수 있는 여러분이야말로 진정으로 용감하고 강인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만이 나쁜 그들이 (언젠가는) 받아드려 할 답이자 진실입니다.
그러나 나의 선함과 진심이 다치고 왜곡 당했다 하여, 내 권리와 호소가 패배하고 훼손되었다 하여 상처 받은 우리가 반대로 세상과 남에게 자기 멋대로 비난하고 방종(放縱) 하게 대한다면, 나쁜 사람들과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 전의 저처럼 그런 처우에 눈물과 수치심과 분노가 아닌, 당당하게 똑바른 발음으로 우아하고 명확하게 알려주세요!
"당신은 지금 내게 무례하며!
나는 그 무례함을 참을 이유가 없으며!
당신이 어떤 자리의 어떤 사람인 것과는 별개로
당신은 기본적으로
사람은 사람에게 친절해야 함을 못 배운
불쌍하고 나쁜 사람이군요!"
라고요.
여러분, 살아보니 나를 지켜주는 것은 오직 나 자신입니다.
아흔아홉 번의 상처를 받았어도 괜찮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억울한 시간들이 여러분을 너무 오랜 시간 침식해 왔나요?
내 몸 하나 스스로 어찌할 수 없는 환자이고 가진 것이 턱없이 초라해도 괜찮습니다.
"이제부터"이며 "이제라도"입니다.
아흔아홉 번의 상처를 넘어, 백 번째의 상처를 주려는 상대방에게 단호히 알려주세요.
나는 당당하고 행복할 자격이 있고, 당신에게는 나를 상처 줄 권리가 없다고요.
여러분의 불행한 "상처"와 "기억"에게도 단호히 말해주세요.
너는 죽은 시간, 과거는 더 이상 아무 힘도 없는 시간, 더 이상 나를 착각 속에 가둬 두지 말라고요.
이유가 없이 나쁜 사람들에게는 우아하게 가르쳐주고, 기나긴 시간의 질문과 위로로도 나를 떠나지 않는 '상처"에게는 이제 단호하게 작별을 고할 때입니다.
"상처야, 잘 가. 안녕. 나는 나로 살겠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