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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불행은 인생 최고의 에디터 (editor)

아픔이 걸러낸 가짜(들)

by 천변만화

※ 내용에 앞서, 어쩌면 이번 글은, 여러분들께 단정적인 어조로 와닿으실 수도 있습니다.

저는 자유와 독립을 생각할 때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와 <쇼생크 탈출> 을 떠올립니다.

우리가 일상속 영위하는 소소한 자유와 독립을 넘어, 극단적 불행앞의 절대적 자유와 독립의 의미를 생각해봄은, 우리 삶이 언젠가 우리에게 보낼 풍랑 앞에 자신을 잃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지혜라 생각해봅니다.


이번 연재_29화 "자유"

"독립", 그 청초하고 청량한 맛!


아기 새는 자유와 독립을 위해 날아올라야 합니다.

그것은 자연이 심어 놓은 본능이자 태어난 이유입니다.

자유는, 육체적 독립과 정신적 독립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둥지를 걸어 나와, 부상과 죽음이 기다릴지도 모를 바닥을 향해 추락할듯,

세상을 향해 첫 날갯짓 하는 저 아기 새처럼

인간 역시 두려움과 불안과 실패를 무릅쓰고 혼자서 날아올라야 합니다.

바닥을 향해 몸을 던졌지만, 곧바로 고갤 들어 하늘을 향해 날갯짓하는 저 아기 새처럼요.


그러나 우리의 삶은, 대자연이 자유와 독립을 이루는 모습과는 그림이 조금 다릅니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갖은 고난의 삶 속에서도 (육체적, 정신적, 경제적) 독립과 자유를 이루지 않으면, 이야기는 아픔, 고통, 절망, 불행이란 이름의 장치들을 등장시켜 주인공이

"절치부심" 하며 불행이나 악 앞에 굴하지 않고 힘을 기르기 위해 각성하고 다짐하도록 만듭니다.


즉, 주인공이 스스로 독립과 자유를 원하도록 깨닫게 만듭니다.


우리의 삶도 드라마와 다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자유독립무엇인지 알고 계신가요?

또한 자유하고 독립하셨을까요?


자유란, 는 뭘 먹을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를 갈지와 같은 일상의 끊임없이 이어지는 크고 작은

욕구와 선택들에 제약 없이 행동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 보니, 어린아이들이나 청소년 그리고 일부 성인들은 자신이 생각나는대로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자유"라고 잘못 알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우리에게 자유와 독립이 무엇인지 가르치지 않았으니, 배운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독립이란 단어는, 역사 속 독립운동이나 유관순 열사님이나 김구 선생님 정도가 떠오를 뿐입니다.


때문에 지금의 사회는, 일부 청소년들과 성인들의 자유와 독립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인해

"표현의 자유"가 문란과 범죄가 되고, "육체적 독립"을 하면 그것으로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합니다.


자유의 범주가 작게는 일상의 제약 없는 영위라 말씀드렸지만, 정말로 제약이 없는 건 아닙니다.

분명한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자신을 포함하여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자유는, 그것이 자신의 잘못이 없는 억울한 일의 책임이건, 자신의 선택에 따른 문제이건, 스스로 그 문제를 직면하여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다른 누군가의 혹은 다른 기관의 (물질적, 정서적, 물리적)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러나 당장의 궁지에 몰린 상황은 편하게 피했을지언정, 결국, 또 다시 다른 무언가의 혹은 누군가로부터의 자신의 자유를 침해받게 됩니다.


자유를 빚지거나 저당 잡힌 존재가 꼭 사람이진 않습니다만, 어쨌든 우리가 그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때까지 우리의 자유는 계속해서 누군가 혹은 어딘가에 귀속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현실 속 가장 빈번한 예로는 인간관계와 채무입니다.


자유는 방종, 즉 자기 멋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자유는 책임이 따릅니다. 그래서 희생과 고통이 동반합니다.



자유독립어떻게 이룰까?


자유를 이루려면 독립이 먼저입니다.


독립은, 육체적 독립, 신적 독립, 경제적 독립을 말합니다.


그리고 누구든 위의 세 가지 중, 두 가지 이상의 독립을 이루거나 갖추었다면 우리의 삶은 그럭저럭 굴러가게 됩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이 위의 세 가지를 다 갖춘 사람임에도, 불안하고 불만족스럽고 우울하고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그건 정신적 독립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에 때문입니다.


즉, 내가 나로서 존재하는 일 말입니다.



아픔이 걸러 낸 가짜(들)


인간이 위 세 가지 독립을 이루고 자유하려면 가장 먼저 거쳐야 할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가짜"를 알아보고 걸러내는 시간입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일부러 애써 하기에는 여러모로 꽤 어렵고 아픕니다.


일단, 세상과 내 안에는 너무 많은 가짜가 있고, 그 사실을 깨닫는 것이 성장 혹은 지혜입니다.


다음은, 세상에 보이는 대부분이 그리고 내 안의 원하는 것들이 사뭇 가짜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세상이 더 나아지는 쪽으로 걸어가기로 선택하는 것이 성숙입니다.


그런 면에서

불행인생 최고의 에디터 (editor)입니다.


자신 안의 가짜와 자신 주변의 가짜를 힘들이지 않고, 속전속결 걸러내는데 불행만 한 것이 없습니다.


"DIE"로 인해 제 인생에서 애쓰지 않고 걸러진 가짜-허구-허상들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만 괜찮다면, 이제는 춤이라도 추면서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토록 오랜 세월 몸부림쳐도 벗어나지지 않던 관계, 상처, 결함과 결핍, 피해의식 등 외에도 그토록 간절히 원하느라 그 길이 나의 길도 아니고, 내가 진정 원하는 길도 아니며, 그 헤매는 시간 자체가 삶의 낭비이자 고통인 줄 몰랐던 바람 혹은 욕망들 말입니다.


* 불행의 가장 큰 장점가짜였던 관계, 인연들이 힘들이지 않고도 알아서 정리된다는 점입니다.


절대 본질일 수도, 우선순위가 될 수도 없는 대부분의 관계들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외로움과 소속감과 인정"이라는 결핍-욕구를 채우기 위해 상상이상의 시간과 감정을 쏟습니다.


나도 모르게 관계와 분위기에 휩쓸려 뜻 없고 마음 없이 오가게 되는 텅 빈 소모성의 대화들, 동조들, 질문들, 리액션과 감정들. 그 사이에서 느끼는 피로감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


그러나 불행의 밑바닥까지 떨어져 보면 가장 먼저 알게 됩니다.

"관계, 인연"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요.


그들이 있어서 해결되는 삶의 본질은 없으며, 그들이 없어서 외로웠던 건 더더욱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보다 그들처럼 살지 못해 제가 불행하거나 초라한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지요.


사람이 사회적 동물로써 그 기능을 잃지 않고 도태되지 않으며, 건강한 정신을 유지하며 자신의 삶을 만족하고 공유하는 데에는 정말로 딱 한 두 사람이면 충분합니다.

어쩌면 그조차도 많을지 모르지요.


** 불행의 두 번째 장점은, 가족, 혈연과의 "정서적 독립" 입니다.


가족-혈연으로 인해 상처받고, 불행하다고 해서 "서로에게 해가 되는 관계" 저절로 쉽게 분리되는 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끊기 어려운 것이, 가족에 대 실낱같은 기대와 희망입니다.


통증의 고통으로 마른 누룽지를 입에 물고 방바닥을 길 적에도 내 곁에 와줄 가족이 없음을 깨달았을 때, 한 평 남짓의 객방에 누워 생사를 오갈 때 마저 내 마음을 벼랑끝에 몰고 상처 주는 존재가 혈육임을 깨달았을 때, 그리고 "가족"이라서 참았던, 그 인내의 시간들이 결국 나를 병들게 했단 사실을 자각했을 때


그제야, 오랜 세월, 어떤 다짐과 각오, 누군가의 충고나 조언으로도 놓지 못했던, "건강하지 않은 관계"를 두려움과 죄책감 없이 놓게 되었습니다.


"아프고 상처받는 관계" 를 놓지 못하고 매달린 건 제 자신이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할 줄 모르고, 그들에게 맞춰주기 위해 그들이 날 일상처럼 업신여겨왔듯, 내 스스로 역시 나를 렇게 대하고 취급했음을, 투병을 하면서 겨우 깨달았음을...고백합니다.


정말로 날 상처 주는 가족이든, 아님 나 스스로가 그렇게 정의 내리고 가둬버린 가족이든,

어느 쪽이 되었건 서로에게 진실되지 못하고 건강하지 못한 관계라면 거리를 두고 독립적인 삶을 살아감이 옳습니다.


어느 쪽이 어느 한쪽을 절대적으로 부양하고 보살피는 책임을 져야만 하는 환경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혼자가 되기 두려워, 함께이면서 서로를 애증하고 탓하며 스스로와 상대방에게 크고 잦은 정서적, 육체적 상처를 주는 관계를 되풀이하다보면, 자신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더이상 사랑은 고사하고 연민하며 그리워할 수 조차 없게 됩니다.


그렇담 언제까지 거리를 둬야 할까요?


어느 한쪽이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 수 있을 때까지, 혹은 상대방을 용서친 못해도 서로의 관계에 어느 한 쪽이라도 다른 한 쪽을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관계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을때라고 생각합니다.

아님 용서도 용기도 없지만 가족이 그리워질 때까지요.


누군가 한 사람만큼은 온전하고 건강해야 서로를 돌보고 지킬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두 사람다 눈이 먼 장님이 함께 벼랑끝을 걷는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벼랑으로 몰아넣게 됩니다.


나 없는 그 사람이 걱정스러워, 혹은 그 사람 없는 내가 두려워 서로 상처 주면서도 벗어나지 못했던 가족이란 이름의 굴레.


그러나, 미성년자이거나 심신의 자유를 상실한 상태가 아니라면, 인간은 모두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다 살아집니다.


가족이라는 "관계" 에서조차 버림받으면 하늘이 무너지고 숨 조차 쉴 수 없을 것 같은 불안감과 잘못된 죄책감 때문에, 답없는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도 '건강하지 못한 관계" 에 집착하고 매달리던 저같은 나약한 사람도 건강하게 이겨내고 "정서적 독립" 을 해냈으니까요^^


이제는 나를 지키고, 변하지 않는 상대방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저는 정서적으로 건강해졌습니다. (물론 상처주는 가족으로부터의 정서적 독립은, 자신이 그러한 관계에 매몰되어 있었단 사실을 자각한 후에도 꽤 긴 시간의 노력과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외에도 제 인생에서 아픔이 걸러낸 가짜들은 정말 많습니다.


덕분에 인생의 좋은 것도
예고가 없이 찾아온다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가짜가 걸러진 인생은 혼란과 불안이 사라지고 "진짜" 나의 것들이 선명하게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인생의 가짜들을 들어내자, 살며 바래본 적도 없고 알려하지도 않았던 "자유"가 찾아온 겁니다.

이 모든 행운이 인생의 "불행"을 홀로 겪으며 이루어진 일입니다.

때문에 저는 불행이 찾아온 이유도, 불행의 결말도 지금 너무 만족하고 고맙습니다.




불행의 마지막 장점

내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인간이 지구상 그 어떤 생명체보다 나약하단 사실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이 사실을 늦게 깨달을수록 우리는 늦은 나이에 많은 신체적-감정적 위기를 만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그리곤 그 원인과 해결과 도움을 가족과 주변과 외부에서만 찾으려 하는 슬픈 실수를 하게 됩니다.

결국, 주변의 짐이 되거나 불편한 사람이 되기 쉽겠죠......


인간이 내가 나약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아는 과정은 결국 세상과 타인에 대한 이해와 배려와 존중과 사랑하는 마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자신의 나약함과 부족함을 인정하고, 실패와 불완전함 앞에 순응할 줄 아는 지혜와 용기야 말로 우리 자신을 비로소 강인하게 만듭니다.




"용기"

영화 속 주인공만 내는 게 아니다


가짜는 결국 "용기"가 있어야 버릴 수 있습니다.


"용기"란 인생의 위기와 절망을 자신 힘으로 이겨내겠단 결단을 내리는 순간, 내 안에서 생겨나는 신비롭고 불가사의한 에너지입니다.


는 서른아홉 해 가까이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신이, 허구한날 불행하면서도 "자유"가 뭔지도 모르고, "독립"은 원하지도 않는 어리석은 저에게 화가 나, "DIE" 란 불행의 끝으로 저를 몰아, 제 안의 "용기"를 스스로 각성하길 바랐다고요.


"용"

"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용기"란 단어가 참 낯설고도 새롭게 보입니다.




혼자여도

환자여도

다 잃어도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환자이자 모든 걸 잃고 의지할 가족도 없던 제가, 제 안과 밖의 가짜였던 것들을 망설임과 두려움 없이 버릴 수 있었던 용기와 결단은, 삶에 찾아온 불행과 절망을 "오롯이" 혼자 겪어냈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삶, 알고 배운 모든 것들, 의지하고 믿었던 마음들, 붙잡고 있던 꿈들과 가진 모든 것들이 사라져 버리면, 절대적인 것들만 남게 됩니다.


생존 그리고 나

내가 나로서 건강하게 사는 일


저는 이마저도 갖추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몸은 병들었고, 서른아홉 해를 나 없는 나로 불행하게만 살았기 때문입니다.


풀지 않은 숙제는 도래했고, 저는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러나 만약, "살겠단" 쪽을 선택한다면 두 번 다시 그전의 나로는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이 모든 불행을 혼자 감당하고 이겨낸 제가, 자유와 독립을 알아버린 제가, 더 이상 불행의 호구가 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 이상 십 대가 아니라면, 주어진 삶의 행복도 불행도 성인이 된 각자의 선택이자 만족일 뿐입니다.


아무리 행복하고 평탄한 삶을 살아온 사람일지라도 인생의 한 번은 자신 스스로에게 자신을 증명해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그 증명은 오직 혼자만이 해 낼 수 있습니다.

그땐 세상 모든 것이 떠나가고, 세상 모든 것이 내 편이 아닌 쪽으로만 돌아가는 듯합니다.


증명은 그 가운데서 해내야 합니다.

늘 말씀드리듯, 더 나은 성장과 성숙을 위한 쪽으로요.

그래야 증명의 몫을 다 하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이제는 그런 시련을 누가
왜 주는지는 궁금하지 않습니다.

리는 우리 자신 안의 것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가짜와 공존합니다.


그 가운데서 삶은, 우리가 삶의 궁극적 목적인 "자유와 독립"을 이루도록 "성장과 성숙"을 도모합니다.

그를 위해 인생은 때론, 우리가 태어나 존재하는 이유와 몫을 찾아가려는 쪽으로 삶의 방향을 휘게도 합니다.


인간이 하나의 우주라면, 우리가 저마다의 별이라면 우리 모두는 각자가 주인공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자신의 주인공으로써 저마다의 드라마를 완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저마다의 별들은 서로 다른 크기와 빛과 힘을 갖고 태어났습니다.

그 힘을 자신 안에서 각성하고 발현시키는 것은 오로지 자신만의 몫입니다.


만약 당신의 인생에 불행이 찾아온다면, 만약 당신의 인생에 불행이 계속된다면, 그건 당신이란 우주가, 행성이 이뤄내야 할 "진화-미션" 이 남았기 때문입니다.




마치며


인생이 행복해지는 방법을 서른아홉 나이에 알게 된 저는 (서른아홉 해의 불행했던 삶과는 다르게) 어쩌면 운이 정말로 좋은, 성공한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과거의 저와 현재는 저는 크게 달라진 게 아직 없습니다. 제가 투병을 하는 동안 산적한 현실적 문제들이 임계점에 다다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적, 육체적 독립을 이루고 자유를 배운 지금, 더는 불행하지 않습니다.


인생이란 망망대해 한가운데, 변화무쌍한 시련들에 "나"라는 배가 흔들리고 젖어도, 이내 흔들리는 이유를 알고 중심을 잡고 노를 젓습니다.


우리는 불행의 반대말을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행복은 드라마틱한 감정이나 사건의 연속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행복의 조건은 돈, 성공, 백마 탄 왕자님도 다 아니었습니다. ^^
행복은, 의외로 단출하고 담백하며 편안한 상태의 유지-꾸준함이었습니다.


불행도 행복도, 자유도 독립도 정말로 별 것 없습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진리를 깨닫고 나면
"부끄럽지 않게 죽는 일" 외에는
그리 대단할 일도 없으며
마음의 구분 역시 사라집니다.


불행이냐, 행복이냐를 따지고 바라기보단, 내가 나로서 홀로서기했는지, 내가 나로서 자유한지만 남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불행하고 우울한 이유는 독립하지 못하고 자유하지 못해서입니다.


내가 나이자, 내가 아님을 모르면 어떤 사람과 함께여도 외롭고 불만족스러우며
내가 나이자, 내가 아님을 모르면 어떤 일을 하며 어떤 성공을 이루더라도 결국 다시 외롭고 방황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가 나로서 사는가는, 독립하여 자유한 자만이 알 수 있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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