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기 있는 본편만큼 관심이 가는 게 비하인드다. 어떻게 해서 저 장면이 나오게 되었는지, 어떻게 하면 저런 생각을 할 수 있는지 등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숨은 내용이 담겨 있어 본편에서 받은 감동을 다양하게 음미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찾아보게 될 성싶다.
나 역시 그런 무리 중 하나이다. 이를테면 어느 유명인사가 지금과 같은 자리에 오르기까지 어떤 노력과 에피소드가 있었는지 알고 나면 그를 보다 깊게 이해할 수 있다. 대상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생기는 것은 덤이다.
가려진 이야기는 종종 책을 읽으며 찾게 된다. 밑줄을 긋거나 여백에 메모를 적어가며 여유를 부리다 보면 수수께끼를 푼 것처럼 ‘아’ 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같은 주제라도 영상물은 전개가 빠르고 확실히 다듬어졌다는 느낌을 받는데 비해 책은 (여러 번 탈고를 했겠지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속도가 한층 느리고 차곡차곡 쌓이는 느낌이다.
인터뷰 영상에 나오는 화자가 ‘지금 행복하다’ 말한다면 ‘아 행복하구나’ 하고 넘기게 되는 반면 책을 통해 천천히 곱씹다 보면 말의 행간을 깨닫는 순간이 문득 온다. 이때가 바로 숨겨진 (글쓴이가 의도했든 아니든) 비밀을 감지하는 순간이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밝은 모습인지, 혹은 이 사람이 대체로 염세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까닭은 뭘까에 대한 답을 찾게 되는 셈이다. 비하인드를 알고 나면 어떤 마음으로 저런 말을 했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그게 참 재미있다. 누군가에 대하여 입체적으로 알게 되고 나아가 내적 친밀감까지 형성되는 것은 보너스랄까. (상대는 비록 알지 못하지만) 그런 까닭에 마음이 가는 책은 시간을 두고 여러 번 읽게 된다. 볼 때마다 책에서 발견하는 의미가 달라졌던 경험 때문이다. 아예 요즘에는 다시 읽을 것을 염두에 두고 음미하고 싶은 문장에 미리 표시를 해 둔다. 때문에 설령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있더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슬슬 넘어가는 것이다.
최근에도 소소한 즐거움을 준 책이 한두 권 있다. 한 권은 내가 좋아할 것 같다며 지인이 선물해 주었고 나머지 한 권은 다른 책을 기웃거리다 연관 검색어처럼 눈에 들어와 냅다 주문한 책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와 작사가로 잘 알려진 김이나(나에게는 수식어가 필요 없는 사람). 두 권 모두 자서전이라기보다 에세이에 가까운 편인데 자신들의 생업을 주제로 했기에 담긴 통찰력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30년에 가까운 (하루키는 넘었고 김이나는 조금 덜 된 듯) 세월을 풀어내다 보니 주제도 풍부했고 깊이 또한 대단했다. 하루키는 그간 작품으로만 마주했는데 이렇게 직접 그의 생각과 목소리를 듣게 되어 무엇보다 반가웠다. 책은 몇 가지 주제에 대하여 하루키의 생각을 풀어놓는 식이었다. 어떻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 작가로서 하루를 어떻게 보내는지 그리고 좀처럼 드러내기 어려울 법한 소신 발언 등. 생각해 보니 형식만 책이지 팟캐스트와 다름없었다.
하루키가 꺼낸 첫 화제는 소설가라는 직업이었다. 유려한 문체와 창의적인 생각으로 문단에 혜성같이 나타나도 결국 얼마나 꾸준히 글을 쓸 수 있는지가 관건이라는 것. 때문에 한두 권의 작품으로 사람들에게 관심을 받는 경우에도 별로 본인의 입장에서는 위협이 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실제로 등장과 함께 주목을 받았던 신인작가들 중 대다수는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고 지금은 기억조차 남지 않는다는 다소 씁쓸하고 냉정한 현실을 짚었다.
소설가라는 직업은 머리 회전이 빠르거나 총명한 사람들 보다는 긴 호흡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더 적합하다는 게 35년 동안 전업 작가로 살고 있는 하루키의 결론이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보다는 어떤 자리에 있든 꾸준히 노력하는 사람이 더 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즈음이었기에 하루키의 말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다.
그런 사람은 낭중지추처럼 어느 순간부터 눈에 띄기 시작했다. 10대, 20대에는 누구나 열심히 살기 때문에 표가 덜 나지만 40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사람들이 점점 편하게 살려하기에 이때부터 차이가 난다는 김미경 강사의 말도 어느 정도 일맥상통하는 얘기처럼 들렸다.
김이나 역시 비슷한 맥락을 이야기했다. 곡을 쓸 때 노래를 부를 가수를 생각하면서 그의 입장이 되어 노랫말을 쓴다고 했다. 여러 가사를 쓰면서 빠지지 않았던 얘기는 작곡가가 곡을 건네줄 때 이 곡은 어떤 느낌이에요라고 하며 가이드로 넣은 흥얼거림 (보통 외계어인 경우가 많다고 한다 ‘우르차차’ 뭐 이런 식으로)그대로를 살린 가사가 제일 잘 어울린다고 한다. 이를 테면 ‘으치으치’라고 표현한 구간에는 ‘빛이 빛이’ 같은 가사를 넣는 식이다.
그 역시 수 백곡에 가까운 노랫말을 써왔으면서도 매번 곡작업을 할 때마다 작곡가의 가이드를 듣고 노래 전체의 느낌을 보고 노래를 부를 가수를 떠올리면서 멜로디와 어울리는 가사를 찾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부르기 쉽고 대중의 귀에 잘 꽂히는 단어를 고른다.
오랜 세월 동안 숱한 노랫말을 쓰고 그보다 몇 배가 되는 연습을 했지만 곡에 가사를 붙일 때는 늘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라 했다. 이 대목을 읽는데 마치 내가 시지포스인 양 돌을 끊임없이 밀어 올리는 힘겨움이 느껴져 나도 모르게 목이 말랐다. 돌 굴리는 작업(?)을 무려 삼십 년 동안 하고 있다니 두 사람 모두 경지에 다다랐다고 감히 표현해도 될까?
어떻게 삼십 년 동안 이토록 싱싱하게 업을 이어갈 수 있을까 궁금했다. 책을 다시 뒤적이며 하루키가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던 순간을 찾았다. 하루키는 대학생 때 결혼하게 되어서 (그냥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회사에는 취직하고 싶지 않아 가게를 차렸다. 낮에는 커피를 팔고 밤에는 술을 파는 가게였다. (‘스즈메의 문단속’을 보면 집을 나온 고등학생 스즈메가 이런 곳에서 잠깐 일하기도 했으니 아주(?) 성인 전용은 아닌 듯하다) 재즈 뮤지션들과 라이브를 하며 가게를 운영하는 일이 즐거웠지만 기반이 잡히지 않았을 때라 어려운 시간도 많이 보냈다.
심한 욕을 듣거나 억울한 일을 겪기도 하면서 '고급 주택가에서 곱게 자란 학생'은 어느덧 ‘어른’이 되었다. 빚은 있었지만 가게가 안정세에 접어든 어느 날, 하루키는 야구를 보러 갔다. 방망이에 맞아 상쾌한 소리로 날아오는 공을 보며 아무런 맥락이나 근거도 없이 문득 생각했다. ‘나도 소설을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시합이 끝나자 서점에 들러 원고지와 만년필을 샀다. 밤늦게 가게 일을 끝내고 주방 식탁에 앉아 소설을 썼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의 첫 작품인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훗날 숱한 교정 끝에 처음 쓴 원고와는 퍽 다른 내용으로 출판되었지만 원고지를 채워가는 과정에서 하루키는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그는 이 부분을 힘주어 말했다. 얼마나 잘 썼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 갔다는 사실에 스스로 효능감을 느끼게 되었다고. 그것이 35년이 넘는 대여정의 시작이었다.
김이나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작사가라는 구체적인 직업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나마 음악 산업에서 일하고 싶었다. 공연기획사에 지원해 보고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성과와 관계없이 계속 음악 주변을 맴돌았다. 핸드폰에 들어가는 벨소리를 고르는 일을 맡게 되었을 때도 음악 일을 한다며 밤샘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블로그에 포스팅한 글을 유명 작곡가가 읽게 되면서 작사를 제안받았고 그렇게 가사 쓰는 일을 시작하게되었다.
책을 읽다 보니 업을 시작하게 된 순간부터 어떻게 글을 쓰는지 얘기하는 대목까지 두 사람에게 결이 비슷한 정서가 있었다. 책표지를 장식하는 유명인의 미소 뒤, 저 담담하고 결연한 감정이 뭘까 싶었다. 책을 덮고 한참을 그대로 두다가 문득 떠올랐다.
간절함.
하루키는 장편소설을 쓰기 시작할 때 국내 생활을 정리하고 해외로 나가 한적한 마을에 자리를 잡는다고 했다. 혹여 산만하게 되어 집중력을 잃지 않도록 퇴로를 없앤 것이다. 김이나는 음악 산업에서 일하고 싶다는 마음 하나로 주어진 어떤 일이든 했다. 그에게 벨소리는 ‘고작’이 아니라 ‘음악 그 자체’였다. 배수의 진이란 이런 것이구나. 그 마음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먹먹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