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절이 바뀌고 집주인 측에서 내용증명을 보내왔다.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 없으며 누수 건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계약 기간이 남아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집주인과 우리는 분명 동상이몽이었다.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원칙대로 따지자면 우리가 계약 해지를 요청하고 3개월 뒤에는 보증금을 돌려받아야 했으며 법의 테두리 안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조치도 있었다. 누수 건을 빌미로 보증금 전부를 돌려주지 않는 것은 누가 보아도 억지였다. 그럼에도 이 건을 해결하지 않고는 집주인은 순순히 돈을 내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사건을 해결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인터넷 여러 곳을 검색하여 시(市)에서 운영하는 분쟁조정위원회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집주인과 직접 상대해봤자 평행선 같은 대화가 이어질 뿐이고 도움을 줄 주변 사람도 없었기에 분쟁조정위원회에 전화를 걸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담당자와 통화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나 여쭈어 보려고요. 임대차 보증금 반환 때문에 전화드렸어요…”
우리의 상황을 대략적으로 설명하니 분쟁조정위원회에 분쟁 내용을 접수하여 진행할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서류를 작성하기 위해 방문 날짜를 잡았다.
크리스마스이브에 찾아간 사무실에서 임대차 관련 분쟁을 오래 담당했다는 주무관을 만날 수 있었다.
몇 가지를 묻더니 주택임대차 계약과 관련된 기본적인 설명을 해주었다. 이후 분쟁조정위원회가 진행되는 절차에 대해서도 알려주었다. 서류를 작성해서 시청 민원실로 갔다. 임대차 분쟁조정 신청을 접수하고 마치고 인근 카페로 향했다.
누수 건과는 별개로 현재 계약 상황이 ‘묵시적 갱신’이라는 점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조언에 따라 집주인에게 보낼 내용증명을 썼다. 계약 해지를 통보한 지 3개월이 훌쩍 넘어 있는 시점이었다.
새해가 되었다. 집주인에게 연락이 닿았을까 궁금하던 차에 주무관에게 전화가 왔다.
“접수하신 분쟁조정 건으로 연락드렸습니다.”
“네네”
“피신청인(집주인) 측과 연락이 되었고요. 분쟁에 대한 조정위원회가 0월 0일에 열립니다.”
통화를 하며 얼른 달력을 살펴보았다. 오늘로부터 한 달 뒤에 잡힌 날짜였다. 하루하루 애가 탔지만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네, 감사해요. 혹시 저희 쪽에서 준비해갈 내용이나 서류가 있을까요?”
“특별히 없을 것 같네요.”
남편에게 꼭 참석해 달라고 일렀다. 남편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대답없는 그는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점심시간을 넘기고 조금 일찍 분쟁조정위원회가 열리는 사무실로 갔다. 우리 건은 점심 식사를 마치고 첫 번째 케이스로 다룰 예정이었다. 집주인 부부는 아직 오지 않은 것 같았다. 얼마 뒤에 남편이 도착했다. 복도에서 주춤거리자 주무관은 잠시 기다려 달라며 우리를 옆 방으로 안내했다. 작은 공간 안에서 우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집주인 부부가 도착했고 곧 위원회가 열렸다. 안내에 따라 회의실로 들어가니 상석에 세 사람이 앉아 있었다. 분쟁 조정을 돕기 위해 자리한 법조인들이었다. 참석자들이 모두 배석하자 주무관이 안건을 소개했다. 위원들은 자료를 넘겨보기 시작했고 주무관은 우리에게도 두툼한 서류를 하나 건네주었다.
집주인 측에서 제출한 역류와 누수에 대한 자료였다. 사건의 경위와 배수관 내시경 사진, 2층 천장과 옆 집 현장 사진도 함께 담겨 있었다. 마지막으로 공사 지출 비용과 견적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이해관계에 얽힌 갈등 상황이었지만 우리 부부와 집주인 부부는 서로 큰소리를 내거나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대략의 경위와 두 집 사이의 기류를 파악한 위원들은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이렇게 점잖은 분들이 아직까지 정리를 못하셨나요. 오늘 마무리를 지으시죠."
위원회는 우리와 집주인 측 얘기를 각각 들어보고자 했다. 우리가 얘기하는 동안 집주인 부부는 회의실 밖에 나가 있었다. 우리는 실제 사건의 경위가 제출된 자료와 다르다고 했다. 얼마간 우리 얘기를 듣더니 위원 중 한 명이 중간에 말을 잘랐다. 여기 온 목적은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니고 말 그대로 분쟁을 조정하는 목적 즉, 합의를 하기 위한 자리라고 말해주었다.
사건의 전말이 무엇이었는지는 여러 건의 분쟁조정을 다루는 위원들에게는 참고 사항이었다. 때문에 누수 사건에 대한 소명 자료를 집주인 측에서만 받아도 충분했던 것이다. 누수의 책임이 우리가 아니라는 주장에도 위원 중 한 명은 자료를 휙휙 넘겨보며 “신축인데..” 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어서 위원들은 얼마 정도면 합의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남편과 나는 머뭇거렸다.
분쟁조정위원회가 처음이었고 어떤 목적으로 가야 하는지 몰랐거니와 그저 안건 중 하나로 쫓기듯 다루려는 느낌이 들어 기분이 이상했다. 법의 절차는 있겠지만 당사자는 우리였다. 분위기에 휩쓸려 원하지 않는 금액으로 그저 ‘합의’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마음이 다시 움츠러들었다.
원칙적인 입장을 말했다. 견적서와 일부 진행한 공사에 대한 금액은 알겠지만 누수는 우리의 잘못이 아니기에 책임 소재는 없다고 대답했다. 때문에 도의적인 차원에서 위로금 조로 얼마 정도를 지급할 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또한 현재 상황이 ‘묵시적 갱신’에 해당되는지도 물었다. 위원 한 명은 서류를 되짚어 보더니 상황 상 그렇다고 답했다. 나는 이 부분도 집주인과 의견이 다른 점이니 확인해주기를 부탁했다. 위원들은 알겠다고 했다.
우리가 밖으로 나가고 집주인 부부가 회의실로 들어갔다. 믹스커피 한잔을 타면서 잠시 숨을 돌렸다. 안에서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주무관은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집주인 부부와 위원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위원들은 집주인 측이 이미 지출한 공사비와 견적서의 적힌 비용 그대로 받기를 원한다고 했다. 금액 차이가 너무 컸다. 그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에게 모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었다.
합의는 서로가 어떤 형태로든 책임이 있음을 인정하고 법의 판결을 따르기 전에 마무리짓자는 개념인데 집주인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지막으로 위원들은 여기서 조정되지 않을 경우 남은 방법에 대하여 설명해주며 집주인과 우리의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집주인은 단호했다. 누수의 책임은 일백 프로 우리에게 있으며 우리가 책임져야 한다고 했다.
받아들일 수 없었다. 조정은 그렇게 결렬되었다.
검토해준 위원들에게 감사하다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남편은 회사 미팅이 있다며 곧 자리를 떠났다. 집주인 부부와 나는 복도에서 어색하게 마주했다.
“정리가 안되면 소송으로 가는 거죠.”
집주인이 방어적인 태도로 말을 꺼냈다. 집 계약이 묵시적 갱신임을 이제 이해한 것으로 보였다. 임차인이 보증금 반환을 위해 밟을 수 있는 법의 절차를 위원회로부터 설명 들은 뒤였다.
나는 차분히 말했다.
“지금이 소송 가기 바로 전이에요. 보통 합의를 먼저 권하니까요. 저희가 다음 달에 이사를 나가려고 합니다.”
한층 누그러진 표정으로 집주인은 대답했다.
“날짜가 정해진 건 가요? 전세금을 마련하려면 적어도 몇 주는 필요해요.”
“네, 최소 4주 뒤로 날짜를 잡을 게요. 저희도 여러 일정을 맞춰야 해서요. 다시 연락드릴게요.”
이사를 나가는데 집주인과 동의한 것만 해도 큰 진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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