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족이 되고 나서도 집은 셋이 살았던 반지하방 그대로였다. 내 방은 따로 있었고 동생이랑 엄마랑 둘이 쓰던 방에 아빠까지 같이 쓰고 셋이서 잤다. 안 그래도 좁은 방구석에 사람이 한 명 늘어서 더 비좁아졌다. 사실 방이라고 하기도 민망한 TV 있는 공용 방 ? 공용 거실 ? 느낌의 작은 공간이었는데 이불 깔고 셋이 누우면 방이 꽉 차서 지나다니기조차 힘들었다.
그런 공간에서 넷이 TV라도 보고 앉아있으면 왠지 너무 갑갑해서 같이 좀 앉아 있다가도 나는 혼자 방으로 들어가서 누워있고 그랬었다. 그럼 몇 분 뒤에 엄마가 와서 내 방 문 빼꼼 열고는 혼자서 뭐하냐고 나오라고, 나는 싫다고. 셋이 있을 때처럼 마냥 편하게 막 있을 수가 없다 보니 자꾸 혼자 있게 됐던 것 같다. 불편했던 건 아니지만 편하지가 않았다.
어느 날은 버스를 타고 상록수역 주변을 지나가는데 창밖에 아빠가 있었다. 이직 때문에 인력사무소 이곳저곳을 다니고 있던 때라 그날은 상록수역 주변에서 볼 일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창밖으로 아빠를 봤지만 못 본 척했었다. 창문을 열어 아빠를 부를 수도 있었는데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왜 그랬을까.
그때 살았던 반지하방 바로 옆에 신축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소식이 있었다. 저녁 먹고 넷이서 근처 산책 나갔다가 들어가는 길에 신축 아파트 자리를 보고 이런 집에 살고 싶다고, 우리 넷이 나중에 꼭 이런 집에 살자고 지나가듯이 얘기했었다. 그 후에 갑자기 아빠가 엄마 몰래 대출을 받았었다.
안 그래도 갚아야 할 빚도 남아있고 빚이라면 치가 떨리는 엄마는 아빠의 대출 사실을 나중에 알고선 울며불며 아빠 등짝 스매싱을 날리면서 많이 속상해했었다. 수중에 돈이 없는 게 불안해서 대출을 받았다는 아빠. 지나가면서 했던 자식들의 말들이 아빠에겐 큰 부담이었던 것 같다.
2012년 겨울, 아빠가 갑자기 뇌경색으로 쓰러졌었다. 쓰러지기 전에 언제부턴가 아빠 얼굴이 눈에 띄게 붉었고 걷는 자세도 어딘가 이상하고 말도 술 취한 사람처럼 어눌했었다. 뇌경색증상이었다. 아빠가 고대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은 내 몫이었다. 장소만 바꼈지 집에서처럼 여전히 서먹서먹하고 무뚝뚝한 딸이었지만 할 수 있는 건 그래도 열심히 했었다.
아빠 머리도 감겨주고 병원에서 같이 밥도 먹고 옆자리 간이침대에 누워서 잠도 자고. 그때 맞은편 자리에 입원해 계시던 어떤 아저씨가 굉장히 부러워했었다. 말 많고 개구쟁이 같은 아저씨였는데 병원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게 지겨우셨는지 아빠 병문안을 가면 늘 휠체어를 타고서 이리저리 바퀴를 굴려 좁은 병실을 왔다 갔다 하시며 유쾌하게 말 붙여주셨던 아저씨였다.
저녁때 엄마가 퇴근하고 병원에 오면 나도 그제야 같이 집으로 갔다. 병원에 있을 때 아빠 몰래 투박한 아빠 손 옆에 내 손 나란히 붙여놓고 사진을 찍었었는데 그게 아빠랑 나랑 단 둘이 찍은 처음이자 마지막 사진이다. 그러고 1년 후 2013년 6월, 아빠는 갑작스럽게 우리 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