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7일 금요일, 여느 때와 다름없이 빵집에 출근을 했고 퇴근 3시간을 남겨둔 나른한 오후시간 때 갑자기 막내이모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나는 카운터에서 계산 중이었고 앞에 놓아두었던 휴대폰 액정에 뜬 막내이모의 전화 한 통이 그날따라 묘했다. 평소 같았으면 넘기고 나중에 다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겠지만 그날은 바로 받아봐야 할 것 같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수화기 너머 차분하고 무덤덤한 이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빠가 좀 아프다며 병원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뇌경색 때문에 또 쓰러진 건가? 물어볼 생각도 안 들 만큼 그때는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머뭇거리다 ‘응.’ 대답 한마디만 하고서 통화를 끝냈다.
하던 계산을 마무리하고 손님을 보냈고 그때 바로 엄마한테 전화가 걸려왔다. 이모와 했던 무덤덤한 통화랑은 다르게 엄마의 상태는 너무 달랐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엄마는 숨이 넘어갈 듯 울고 있었고 말 한마디도 제대로 못하는 상태였다. 나는 전화를 받자마자 엄마의 그런 상태에 정신이 아득해졌었다.
직감적으로 알아챘던 것 같다. 아빠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말을 엄마한테서 음성으로 듣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았고 눈물이 주체가 안 될 정도로 흘렀다. 갑자기 혼이 나가버린 것 같이 어지럽고 정신이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보던 그런 상황을 겪는 것 같았다.
카운터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울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주저앉았다가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매장에서 빵을 드시던 손님 두 분이 자기들이 가게에 있을 테니 얼른 나가보라며 나를 달래주셨다. 그런 상황에도 나는 내가 지금 나가버리면 가게를 지킬 사람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이 됐다. 그냥 아무 판단이 서질 않았다. 손님 덕에 잠깐 정신을 차리고 사장님과 통화를 한 후 바로 가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맑은 햇살이 비쳤다. 그날따라 대학가의 분위기는 너무 평화로웠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은 시간 때 날이 좋아서인지 학생들이 유난히 많았고 초여름 오후 바람에 파릇파릇한 나뭇잎들이 반짝거리며 살랑였다. 그 사이로 나는 택시를 찾아 정신없이 뛰었다. 건너편으로 달려가 택시 하나를 잡고 시화 센트럴 병원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가는 내내 동생과 통화를 하면서 정신없이 울었고 택시 기사님은 아무 말씀 없이 최선을 다해 병원으로 달려가주셨다.
노을이 질 때쯤 병원에 도착해 장례식장 사무실로 향했다. 우리 엄마는 이미 울다 지쳐 녹초가 돼있었고 누군가가 엄마를 붙잡고 서있었다. 엄마도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달려갔지만 엄마가 응급실에 도착했을 때 우리 아빠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예고도 없이 찾아온 아빠의 죽음. 모든 게 믿기지 않는 날이었다.
장례식장 사무실에서는 맘 놓고 슬퍼할 틈을 주지 않는다. 고인의 영정사진을 만들기 위해 엄마에게 갖고 있는 아빠 사진 중에 정면으로 잘 나온 사진을 요구했고 엄마는 휴대폰 앨범을 뒤적여 사진을 찾았다. 정신이 없다 보니 단번에 찾아지지도 않고 조급해지는 마음에 엄마는 휴대폰을 꼭 쥐며 계속 울먹거렸다.
어디서 장례를 치를지, 고인을 어디에 안치해 놓을지, 장례를 며칠 치를지 가족과 의논하고 비용을 정산하고 모든 결정이 끝날 때까지 사무실 옆 복도에 앉아서 기다리는 동안 나는 아빠의 영정사진을 받았다.
어젯밤에 본 아빠인데,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도저히 말도 안 되는 이 상황에 받자마자 눈물만 주룩주룩 흘렀다. 그리고 아빠가 어떻게 사망하게 됐는지 듣고서 나와 동생은 대성통곡을 했다. 같이 일하던 동료의 실수로 아빠는 공장 기계에 몸이 끼었고 그대로 짓눌리는 바람에 갈비뼈가 전부 으스러져 폐를 찔렸다. 헐떡이는 숨이 겨우 붙어있는 상태로 급히 응급차에 올랐지만 아빠는 이송 중에 사망했다.
장례식장 사무실 지하 복도가 쩌렁쩌렁 울리도록 소리 내서 울었다. 아빠의 사망일 6월 7일 금요일 저녁. 장례를 치르기 시작했다. 우리 아빠는 50세의 나이에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는 46살, 나는 22살, 남동생은 15살 중학교 2학년이었다. 22살 나이 때까지 나는 장례식장을 가 본 적도 없는데 이렇게 일찍, 그것도 아빠의 장례를 치르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우리 세 가족은 나란히 상주복을 입고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했다. 교회 분들은 아빠를 매주 봤으니 신발장에서부터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을 하며 선뜻 들어오지 못하고 서성이는 분들이 많았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상주들도 밥을 먹어야 하는데 수저를 뜨는 것조차 이게 맞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한 숟갈 떠서 입으로 가져가는 게 너무 힘들었다.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먹으라고 옆에서 도와줘도 나는 수저를 뜨다 그냥 울기만 했다. 친구들도 덩달아 울어버렸다. 억지로 울면서라도 먹어야 했다. 힘내서 장례를 치르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