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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름바름 Apr 30. 2022

오늘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약간은 동화, 조금은 에세이

 ‘오늘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청운 빌라 앞뜰에 고무줄놀이가 한창이다. 강미가 날렵하고 유연한 미야와 같은 편이 되려고 안달이다.     


"편먹기 합시다. 편먹기 합시다."


손등을 내민 편, 손바닥을 내민 편, 두 편으로 나뉠 때까지 반복하는 편먹기, 손등을 내민 강미와 나, 손바닥을 내민 건 미야와 경민이다. 바라던 미야 대신 나와 한 편이 된 강미는 실망해 한숨부터 쉰다. 경민이는 헝클어진 고무줄을 풀며 콧노래를 부른다. 내가 왼발잡이라는 치명적인 허점이 없었더라면 강미에게 구박 따위 받지 않아도 되지만 안타깝게도 난 고무줄을 다른 아이들과 반대 방향으로 뛰고 동작도 어눌한 편, 그래서 한두 단계만 줄이 높아져도 고무줄에 딱 걸리고 만다. 내가 빨리 죽어 버리면 강미 혼자 몇 배로 잘 뛰어서 나를 살리고, 살려 놓으면 또 홀딱 죽어버리니 시작도 하기 전 강미가 한숨을 쉬는 건 그래 그럴 만하다. 미야가 선심을 쓴다. 나와 강미에게 먼저 하란다.     


"이 강산 침노하는 왜적의 무리를 거북선 앞세우고 무찌르시어....."


둘이 마주 보고 서서 고무줄을 한 발 한 발 밟아 나간다. 스텝이 꼬이면 밟은 줄을 놓치고 줄을 놓치면 바로 죽는다. 이순신 장군이 왜적을 무찌르기도 전에 내가 죽으면 강미가 또 얼마나 나를 째려볼 것인가? 발을 딛을 때마다 정성을 다한다. 뒤 돌아 고무줄을 뛸 때 손으로 고무줄 잡기는 금지다. 스텝은 꼬이지 않았는데 뒤돌아설 때 그만 나도 모르게 줄을 잡고 말았다. 죽었다. 강미도 오늘은 나를 구할 생각이 없나 보다. 잇따라 죽는다. 미야와 경민이 차례다.     


"이 겨레 구원하신 이순신 장군, 오늘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1절을 순식간에 끝낸 미야와 경민이는 죽지도 않고 깔깔대며 다음 단계로 잘도 넘어간다. 밥도 글자도 오른손으로 쓰고, 축구공도 오른발로 차면서 왜 유독 고무줄만 왼발로 뛰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이순신 장군이 자기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않은 것처럼 나도 나의 죽음을 알리고 싶지 않다. 그러나 승부의 세계는 냉정하다. 내리 4단계를 끝낸 미야와 경민이는 숨이 차서 더는 못하겠다며 쉬었다 하자 한다. 강미는 성질을 부리다 숙제하러 간다며 먼저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숨이 찬 미야와 경민은 분해하고 고른 숨을 쉬는 나는 땅따먹기나 실뜨기, 다른 놀이로 종목을 바꿀 생각에 속으로 헤헤 웃는다.

 땅따먹기는 나의 주 종목, 땅바닥에 원 모양으로 내 땅을 그리고 손가락으로 돌멩이를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내 땅 안으로 들어오게 튕겨 돌멩이가 지나간 자국만큼 내 땅으로 만드는 놀이다. 남의 땅을 빼앗을 수도 있고 남과 상관없이 저 멀리멀리 땅을 넓힐 수 있다. 미야와 경민이 땅이 곧 내 차지다. 고무줄에서 받은 설움이 이렇게 풀린다. 돌부리로 꼭꼭 눌러 그린 내 땅도 하루만 지나면 다 사라질 테지만 돌멩이 방향을 틀어라, 내 땅 빼앗지 마라, 선에 걸렸다. 안 걸렸다. 어찌나 다퉜던지 목이 싸하게 아파서야 다음 날 놀자며 우리는 그제야 헤어진다.


 그날 밤 자려고 눈을 감자 한 발 한 발 소중하게 내디딘 고무줄 위에 내 발걸음과 ‘이순신 장군’ 노래가 맴맴 된다.     


 "오늘도 씩씩하게 자라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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