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글을 쓰는 이유
태국 한 달 살기 짐을 꾸릴 때 가장 고민스러운 건 책과 노트였다. 옷과 다른 짐은 줄일 수 있었지만, 노트는 결국 다섯 권을 챙겨왔다. 올해 쓰고 있는 불렛 저널, 새해에 쓸 예비 노트, 필사 노트, 모닝 페이지, 그리고 태국 일상 노트까지. 책은 도서앱으로 대체했지만, 노트만큼은 포기할 수 없었다.
매일 아침, ‘모닝 테이블’이라 이름 붙인 공용 정원에서 모닝 페이지를 쓴다. 한국에서는 시간을 재며 써 내려갔지만, 이곳에서는 느긋하게, 한 바닥을 채울 때까지 쓴다. 종종 남편과도 함께하는데, 모닝 페이지를 쓰는 동안 크리스마스 카드를 쓰던 그의 모습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
태국 일상 노트에는 이름처럼 태국에서의 하루하루를 기록한다. 이 노트에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 바로 왼쪽 페이지에 영수증을 붙이는 것. 한국의 펭수격인 버터 베어 캐릭터가 인쇄된 카페 영수증은 귀여워서, 교통카드 충전 영수증은 처음 해본 일이 기특해서, 뒷면에 ‘LOVE LIFE’가 적힌 영수증은 그냥 예뻐서. 영수증이 글 못지않게 많은 기억을 붙들어주는 것 같다.
요즘 불렛 저널은 투두 리스트와 일정 기록용으로 사용하고, 필사 노트는 아직 펼친 적이 없다. 사실 노트가 아닌 노션이나 브런치에도 글을 쓴다. 노션엔 5년 일기나 작심사녀의 글을 쓰고, 브런치에는 태국에서의 일상을 좀 더 정돈해서 쓰고 있다. 가끔 남편이 뭐 하냐고 물으면 일기 쓴다고 대충 둘러대는데, 그러면 남편은 도대체 하루에 몇 번이나 일기를 쓰냐며 놀린다.
태국에 글 쓰러 온 사람 마냥 요즘 나는 매일 글을 쓴다. 어쩌다 나는 글쓰기에 빠져버린 걸까. 왜 나는 글을 쓰는 걸까.
써야지만 나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쓴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숨겨진 나의 진심이, 상대방의 말에 상처받은 이유가, 내가 품고 있는 고민과 생각이 써야지만 들여다 볼 수 있어서, 그러니까 나를 들여다보려면 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말은 글보다 빨라서 나의 무의식을 쉽게 지나치고, 상처를 마주하는 일은 두렵고, 고민과 생각은 휴지통처럼 이것저것 뒤섞여 있다. 그래서 내게 글쓰기는 지난 일을 다시 불러와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머릿속 파편을 다 쏟아내 다시 정돈하는 일이다. 그러면서 나는 나를 위로한다. 타인에게는 다정하면서도, 정작 나에겐 소홀했던 마음을 되돌아보며.
글을 쓸 땐, 미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생각하며 쓴다. 나이 든 내가 내 글을 읽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글은 누가 뭐래도 내가 쓴 글일 테니까, 노년의 내가 즐겁게 글을 읽으며 시간을 보내길 바란다. 이런 바람도 있다. 글을 읽으며, 미래의 내가 과거의 나를 그리워하지 않기를. 젊은 시절의 부침과 고민을 지나 찾은 한 줌의 평안에 감사하기를, 그리움 대신 평안한 회상을 할 수 있기를. 또, 젊은 시절의 실수와 후회를 반복하지 않길 바라며, 지금을 생생하게 쓰려 노력한다.
언젠가 글로 돈을 벌고 싶었던 적이 있다. 작가는 아니고, 파워 블로거가 되어 원고료나 협찬받는 삶을 꿈꿨다. 지금은 글쎄, 갈수록 글쓰기 어렵고 게을러서 포기했다. 다만, 내 글의 가장 열렬한 독자는 나일테니, 다양한 이야기를 꾸준하게 쓰고 싶다. 미래의 내가, 나를 긍정하며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그거면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