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독립선언

by 들송날송

나는 인간관계에서 늘 타인이 먼저였다. 상대의 표정 하나, 말투 하나에 쉽게 휘청였다. 주변 사람들이 기분이 나빠 보이면 ‘내가 뭐 잘못했나?’부터 생각했다. 무언가를 나눌 때도 내 것을 챙기기보다, 내 안의 것을 탈탈 털어 남을 채워주곤 했다.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다. 초등학교 때 카네이션을 만드는 시간, 내가 손재주가 좋다는 이유로 친구들이 다 몰려와 “이것도 잘라줘!”라며 부탁을 했다. 나는 거절 한 번 못 하고 다 도와주다가 정작 내 것을 만들 시간은 남지 않았다. 수업이 끝날 무렵, 허겁지겁 만들다 가위에 손가락을 크게 베였다.


그게 내 인생 첫 ‘자기소진’의 기억이었다. 왜 이렇게 됐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부모님은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지원해주셨지만, 집안 분위기는 늘 불안정했다. 감정 기복이 심했던 엄마의 눈치를 보며 자랐고, 언제 집안 공기가 바뀔지 몰라 늘 긴장했다. 그 습관이 커서도 남았다.


남의 기분을 먼저 살피고, 불편함이 생기면 내 탓부터 찾는 어른이 되었다. 통제적인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끝나고서야 비로소 그 사실을 똑바로 봤다. 나는 늘 남의 감정에 맞추느라 정작 내 감정은 돌보지 못했다. 그게 ‘배려’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나를 버리는 일이었다.


이걸 깨닫고 나서 한동안 우울했다. 내가 나를 챙기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또다시 남을 먼저 생각할 때마다
‘또 멍청하게 굴었네’ 하며 자책했다. 그래서 요즘은 ‘한 박자 쉬기’를 연습 중이다. 누군가 나에게 부탁을 할 때, 바로 대답하지 않고 잠시 멈춰서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다. 그리고 상대의 표정이 변해도 속으로 되뇐다.

“어쩌라고, 내 잘못 아니야.” 이건 책임 회피가 아니라, 내 감정을 지키기 위한 방어다.


아직 완벽하지는 않지만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남보다 나를 먼저 돌보는 일이 절대 이기적인 게 아니라는 걸.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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