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버스

속도와 비용, 그것을 뺀 나머지 가치들의 합

by Who am I

지난 4월 16년 된 파란 모닝을 폐차장으로 보낸 후

버스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사는 집과 마트는 직선거리로 약 2km 정도 차이가 있는데 차를 타면 10분 걸리지만

대중교통이 딱히 없어서 버스를 타려면 30분 기다리는 것은 기본이다.

심지어 버스는 거치는 정거장들이 많아서 기다리는데 30분. 도착지까지 30분이었다.

택시도 없는데 심지어 요금마저 비싸니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차가 없어진 이후엔 공유자전거로 달려보기도 했는데 전기 자전거라서 그런지

그렇게 힘은 부치지는 않았지만 처음에는 2킬로를 달리는데 무려 7000원이

부과되니 그렇게 달린 날은 점심을 굶었다.


결국 마음을 비우고 정거장에 앉아 버스를 기다렸다.


다리가 아프지 않으려면 버스를 기다려야 한다.

주문처럼 외우면서


신혼여행지에서 렌터카 없이 신랑과 버스를 타고 하와이를 돌아다녔던 10년 전 그날처럼.



정거장은 ㄱ 자로 생겼지만 딱히 햇볕은 가려지지 않는 이상한 구조다.

듬성듬성 철골로 된 지붕은 비가 오면 비가 그대로 통과하는 이상한 모양이다.

아마도 이 정거장을 만든 시 관계자는

버스를 기다려본 적이 없었나 보다. 쇠로 만든 의자가 여름에는 얼마나 뜨겁고

겨울에는 얼마나 차가운지 알까.

서성이다가 내려놓고 마음을 비우고 있다 보면

마치 정지된 시간 속에 내가 갇혀있는 듯하다.

1초, 1초가 헤아릴 수 있을 것처럼 천천히 다가오다가 의자에 떨어지는 뜨거운 햇볕아래 녹아버리고 사라지는 것도 그날의 날씨를 온몸으로 느끼는 이 시간도 정말 이 순간 밖엔 없다.


마침내 오전 9시 30분 저 멀리서 천천히 오는 버스는 낭만 그 자체를 닮은 듯 천천히 다가온다.


시작점인 이번 정거장은 손님을 태우고도 바로 출발하지 않는다.

기사님이 밖에서 믹스커피를 한잔 마시거나 화장실을 다녀와도 아무도 서두르지 않는다.


여기는 미국도 아니고 인도도 아닌 한국이니까

언젠가는 반드시 출발하겠지.


기사님은 정복을 입은 깔끔한 중년 신사다. 비록 오래되고 느려도

버스는 깔끔한 자신만의 멋을 갖고 있다.

중년의 목소리로 느긋한

인사하는 이 버스 안은 기사님 만의 공간에

깔리는 음악은 느긋하고 낮게 울려 퍼지는 색소폰 연주곡으로 조용히 채워진다.

손님들의 대화를 방해하지 않는 잔잔한 이 음악은 서두르지 않는 이 버스의

분위기를 그대로 담고 있는 것 같다. 여가수의 노래가 정확한 박자에 맞춰 흘러나온다.

적어도 이 버스를 타고 가는 동안은 그 분위기에 동화되어서 마음을 내려놓고 그 느린 박자에 귀를 기울여본다. 카페는 아니지만.


나이가 든다는 것. 서두르지 않는 것. 낭만을 배우는 것.

자기가 가는 곳을 정확하게 아는 것. 온갖 정보가 나오는 시끄러운 미디어 스크린은 걷어치우고. 라디오에 흘러나오는 옛 노래에 맞춰 굴러가는 이 공간. 누군가에게 운전을 맡기고 나는 비로소 자유롭게 창밖 풍경을 볼 수 있었다


버스에 타고 내리는 사람들은 마치 물 흐르듯이 나오고 들어가고 부드럽게 오르내린다.


이런 시간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삶의 틈에서 얻어지는 약간의 사치에 가깝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해도

너무 번잡한 곳에 곳에 살지 않는 것. 바쁘고 숨 가쁘게 출근하는 시간을 피할 수 있다는 것.

나의 서두름으로 누군가를 재촉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 시간을 '관찰'할 수 있는 시간을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드문 것인가. 아무것도 추가되지 않은 듯한

공간과 시간에 그 자체로 머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버스는 조용히 도시를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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