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아픈 사람들을 보면 유독 여자분들이 많다. 그런데 그분들은 사실 술 담배도 안 하시고 음식도 적게 먹고 나름 건강의 원칙을 지키는 사람들도 있는데 왜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몸이 더 아픈 걸까? 어쩌면 그분은 감정노동과 메시지 불통의 병에 걸려있는지도 모른다.
아침에 우연히 길에서 지인을 만났다. 꽤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운 마음에 인사를 하고 안부를 물어보는데 반응이 영 시원찮다. 짧게 인사한 후에 가버린 그녀. 나는 그녀가 나에 대해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어서 인가 생각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물어볼 수는 없었다. 나는 아마도 최근에 그녀가 몸이 건강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하고 말았다. 그녀는 아마도 속사정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차마 말을 할 수 있는 그런 건 아니어서 참고 있는 것이다. 나와 관련된 게 아니라도.
우리가 사회에서 사람을 만나 관계를 맺을 때, 때로는 직접적으로 서로에 대한 정보를 물어볼 수는 있지만 없는 경우도 있다. 그 가운데 하나의 이유는 사소한 정보를 나누기엔 서로 친하지 않다는 것이다. 친하지 않은데 내 정보를 다 주었다가 그 사람이 나에게 편견을 가질 까봐 서로 위험해질까 봐 몸을 사리는 것이다. 그래도 어쨌든 물리적 거리를 가까이하고 있을 때는 눈에 보이는 정보로 상대방을 판단한다. 얼굴색이라든가 표정 몸짓 말투 기타 등등. 그러나 이러한 정보로 짐작한 정보는 사실 일반적이긴 하지만 정확한 건 아니다. 그래서 반은 맞고 반은 틀린다. 이것을 우리는 눈치라고 부른다. 어쨌든 어색하지만 첫 단계에선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단계이다. 하지만 만난 지 꽤 되었으면 그것도 아니다.
위의 경우가 그래도 사적인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눈치라면, 좀 더 조직적인 회사 생활과 영업적인 관계, 상하 관계에서 알아야 하는 눈치싸움은 철저하게 약자 쪽에 불리하게 설정되어 있다. 어쨌든 약자 입장에서는 말을 하지 않아도 ‘갑’이라고 불리는 쪽에 내 감정을 맞춰야 한다. 어쩌면 그게 생존이고 월급을 받는 입장이고, 가정과 조직을 지켜나가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학교에서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이러한 기술을 우리는 매일 쓰면서 살아간다.
출처:게티이미지뱅크
이것이 바로 감정노동이다. 상대방의 감정에 나를 맞춰가는 일. 감정뿐 아니고 몸도 생활 패턴도, 돈도 시간도 맞추는 일 말이다. 이 감정노동이 사람을 상하게 한다. 주변의 여자들이 유독 아픈 건 이 이유였다. 그 사람들은 노동의 강도는 세지 않지만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감정노동을 하고 있다. 특히 특정인 사이에선 이 감정교류선이 가장 많을수록 친밀함의 강도도 더 높다고 믿는 어떤 신화가 있다. 어릴 때는 부모님, 친구, 주변 사람들. 커서는 아이들과 남편에게 밖에서는 상사에게 혹은 지인에게 걱정과 염려와 감사와 칭찬의 감정을 매일매일 주고 산다. 나는 이런 감정교류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감정노동이 서로 간에 주고받는 에너지가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감정 소모는 그것도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어 사람을 지치게 할 수 있다. 더 놀라운 점은 정말로 솔직하고 정말로 친한 관계에서는 오히려 먹히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다 알고 있다. 옆집 아줌마가 나에게 하는 칭찬과 우리 엄마가 하는 말의 차이가 어떤 것인지를.
건강하지 못한 인간관계에서 감정 노동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어차피 사회생활이 나 혼자 편하게 살자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이라면, 눈치 게임이나 한쪽의 일방적안 감정 소모 없이 정말로 건강한 관계, 친밀한 관계에서 서로를 발전시킬 수는 없을까?
지도력교육과 심리에 탁월한 이론을 제시한 미국의 심리학자 토마스 고등에 따르면 교사라는 창을 통해 들어오는 학생의 모든 행동과 태도를 수용과 거부의 두 형태로 그려볼 수 있다.
엄격한 교사는 거부의 창이 좀 더 크지만, 너그러운 교사는 수용의 창이 좀 더 크다. 이것은 사각형을 그리고 두 개로 나누는 선을 그렸을 때 그 모델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교사의 수용 창이 너무 작은 경우 학생이 그 안으로 들어오기가 너무 어려우니, 수업이 잘 진행될 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교실에서의 상황이라면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상대방에게 열려있는 수용의 창이 현저히 적은 경우를 들 수가 있다. 수용의 창은 적지만 위장 차원에서 감정노동이라는 가짜 창문이 있는 것,
그런데 그 수용의 문제는 사실 학습 그 자체에 대한 것보다도 잔소리가 더 많은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예를 들어 수업 이전에 교실의 정리나 분위기 학생의 겉모습 같은 것들로 벌써 갈등이 빚어져 에너지가 모두 소모된다. 교사가 이렇듯 교실에 대해 잔소리를 하며 학생들의 군기를 잡는 사이 학생들은 교사가 오늘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어 눈치만 보다가 시간과 에너지를 모두 써버리고 만다. 그래서 원래 있어야 할 평등한 관계에서의 교육적 목표는 위장창문과 감정소모로 무산되었다. 이것은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문제의 소유는 누구인가?
맨 처음의 경우로 돌아가 보자. 오늘 만난 누군가는 나에 대한 반응이 좋지 않았다. 그러면 그것은 나의 문제인가? 그 사람의 문제인가? 토머스 고등은 이에 대해 문제를 가진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해결도 달라진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화가 난 사람이 문제도 가진 것이라는 것이다. 만약 상대방이 ~~ 한 문제를 갖고 있다고 이야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면 그건 그 사람의 문제가 된다. 그런데 만약 그 사람으로 인해 내가 기분이 나쁘다면 나의 문제가 된다.
예를 들어보자
상대방이 분노와 실망을 털어놓는다. (상대방이 문제를 가진 경우)
상대방이 즐겁게 이야기한다. (문제없음)
상대방이 우리 집 물건을 쓰고 있다. (내가 문제를 가진 경우)
누가 문제를 소유했는가를 확인하려면
아래의 질문에 답해보자.
1. 이 사람의 행동이 나에게 실제로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그 행동으로 말미암아 내 욕구가 방해받아 수용할 수 없다고 느끼고 있는가?
2. 실제로는 문제 될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게 다른 행동, 즉 내가 생각하는 대로 바라는 대로 행동해 주길 원한다는 이유로 그 행동을 수용할 수 없다고 느끼지는 않은가?
2의 질문에 대한 답이 긍정적이면 상대방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고 1의 경우는 내가 문제를 가진 것이다. ‘문제’는 사건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책임을 갖고 마음을 쓰는 쪽을 말함을 알게 된다. 다시 말해 ‘불편함’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다.
이러한 문제 소유의 개념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관계는 좋아지지 않는다. 관계에서의 ‘문제없음’의 영역은 넓어져야 하고 상대를 보는 창은 확대되어야 한다.
상대가 문제를 소유했을 때의 의사소통
인간관계에서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어느 쪽도 기울지 않고 두 사람이 비슷한 상태를 유지하면서 던지고 주고받는 게 자연스러워야 한다는 것이다. 두 개의 원을 그렸을 때 한쪽의 원이 감정이 꽉 차 있는 상태이면 이야기를 통해서 그 흐름을 빼줄 필요가 있다. 비난이나 무시 없이 상대방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주는 것은 상대방의 감정 상태를 원활하게 해서 다시금 의사소통의 원활한 궤도를 찾게 한다.
그것을 Active listening(반영적 경청)이라고 한다. 이는 더욱 적극적으로 상대방의 메시지를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어떤 직원이 사장님에게 “지금이 6시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시간 말하는 것을 넘어 퇴근하겠다는 뜻이다. 사장님이 말을 듣고 직원의 얼굴을 보니 피곤하고 지친 것을 파악하고 퇴근하라고 말을 한다. 이것은 메시지에 대한 소통이다.
반면 앞서 말했던 불평등한 관계에서의 감정노동은 직원이 사장님에게 직접 말을 하지 않는 상황이다. 직원은 사장님에게 말하는 대신 눈치만 본다. 사장님은 이 직원에게서 집에 가고 싶다는 직접적인 메시지를 받지 못했다. 전달이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장님은 직원의 불편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것은 메시지의 실패다. 직원은 비언어적으로도 언어적으로도 상대방에게 불편함을 알리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눈치라는 말 대신에 비언어적인 메시지라는 말을 쓰고자 한다. 먼저 언어적인 메시지가 우선이지만 비언어적인 메시지가 결합이 되면 의사소통이 더 확실해진다. 인간관계란 확실한 소통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는 관계다.
내가 문제를 소유했을 때 의사소통
그렇다면 만약 내가 불편하다면 상대방에게 어떻게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할 수 있을까. 부모교육에서도 자주 나오지만 ‘나- 전달법’이라는 것이 있다.
1번은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비난 없는 서술이다. 앞서 들은 예를 다시 가져오자면
어떤 방문객이 우리 집에 와서 물건을 만지는 것을 봤을 때,
(상황 자체가 실질적인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지만 불편함을 전하고 싶을 때)
“(내가) 당신이 우리 집에 와서 물건을 만질 때….”
2번은 상대방의 행동으로 인해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이다.
“물건이 유리라서 깨질 수 있어, 그러니 (내가 걱정된다.)”
라고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이때 전달하는 것은 나의 일차적인 감정인 걱정과 두려움 불안에 대한 전달이며, 더 발전된 분노나 화에 관한 내용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이 의사소통에 실패하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불편함에 대한 메시지가 화로 전달될까 봐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그건 좋지도 싫지도 않지만 사람의 정신건강을 좀먹는 이유 중 하나다)
또 불편함에 대한 표현을 직접적인 화로 표현하는 때도 많다. 그것은 사실 내 안에서 나온 메시지가 나 스스로 잘못 읽히고 상대방에게 잘못 표현한 경우다. 어디까지나 정중하게 전달된 나의 의사는 상대방에게 웬만한 경우 수용될 수 있으며 경청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과의 관계 자체가 문제일 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메시지는 관계에서 태어난 소중한 새싹이고 병아리 갖은 존재에서 소중하게
그리고 정확하게 전달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서로를 보지도 않은 채 막 던지고 막 받는 그런 사이가 아니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