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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윤선 Mar 25. 2021

상상해보세요. 공항에서 그 날을

스탠바이 미, 스탠바이 티켓  

                  

  해외여행 못 가본 지가 1년이 넘어가니, 이제 슬슬 외국이 그립다. 비행기를 타고 낯설고도 설레는 땅을 밟고, 온 감각이 살아나는 여행을 하고 싶어 진다. 이럴 때일수록 나는 전직 승무원으로서 여행의 기억을 일상에서도 소환해낼 이야깃거리가 많은 추억 부자다.

   내가 다녔던 항공사는 90% 할인된 항공권을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었다. 항공사 직원용 티켓을 ‘Standby Ticket’(스탠바이 티켓)이라고 한다. 비행기에 자리가 남아야만 확실하게 탈 수 있는지 공항에 가봐야 알 수 있어서 절실하고 아슬아슬하다. 그래도 부담 없는 항공권 가격에 내가 원하는 곳을 어디든 갈 수 있다는 매력적인 복지 혜택이 있다. 항공사에 근무하는 동안 여행할 기회를 많이 만들려고 스케줄을 짰다.

호주 시드니에서 휴가를 보내고 두바이로 돌아가기 스탠바이 티켓으로 예매를 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기를 바라며 시드니 공항으로 갔다.

  여유롭게 선두로 질주하여 4시간 전부터 와서 기다렸다. 시드니행 비행기가 탑승 절차를 모두 마칠 때면 빈자리의 여부를 알 수 있었다. 여유 좌석이 없으면 튕겨 나간다고 표현하고 오프로드(OFF LOAD) 된다고 말한다. 바라는 것에는 조바심이 생기는 법이다. 탑승해야 할 시간이 다가와도 탈 수 있는지 모른다. 서둘러도 탈까 말까 한 지경에 이르러서도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미 다른 승객들은 탑승 수속을 마치고 검색대를 지나 비행기에 타고 있었다. 마라톤에 비유하면 결승선을 통과하여 테이프를 끊고 집에 돌아간 셈이다. 공항 직원은 한 자리가 남았으니, 마지막 손님이 오지 않으면 내가 탈 수 있으니 끝까지 기다려달라고 했다.

   어떤 한 남자가 달려오고 있다. 그는 오지 말았으면 했던 내가 탈 비행기의 마지막 승객이었다. 이제야 결승지점에 나타나 지친 몸과 가방을 질질 끌면서 나타나, 탑승구가 닫히기 직전에 체크인 카운터에 도달했다.

오사카에 도톤보리에 가본 적이 있다. 두 팔을 벌려 승리를 향해 달려오는 남자 앞에서 나도 만세~하며 사진을 찍었었다. 세상에서 가장 오래 걸린 완주를 상징하는 글리코 맨이었다. 많이 봤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는 결승 테이프를 끊으려고 공항에 달려 들어와 기쁨의 손을 뻗어 여권을 내밀었고, 난 내밀렸다.

오사카 도톤보리에서 본 이미지

  직원들은 그의 컴백을 환영하며 신속히 수속했다. 그가 매달 목에 걸듯 고개 숙여 직원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탑승권을 받고 돌아서 안심하는 그의 표정이란. 나는 토끼, 그는 거북이였다. 내가 아무리 공항에 일찍 와서 기다려도 소용없었다. 거북이가 막판에 승리했다.

  설마설마했는데, 나는 비행기 좌석을 얻지 못해서 공항에서 잠을 자야 할 신세다. 다음 비행기는 내일 아침이다. 나에게도 마라톤의 지구력과 정신력이 필요했다.

 시드니 공항에서 노숙을 하고 말았다. 영화 터미널의 톰 행크스가 했던 행동을 나도 따라 해 본다. 내 집 화장실이 되고 소파가 된다. 같은 처지인 사람들이 주변에 듬성듬성 보인다. 이럴 땐 긍정적인 생각과 기도가 효과가 있다. 내일 아침이면 비행기를 탈 수 있을 거라며 마음을 비웠다. Maybe.


스탠바이 티켓은 내게 여행 공포증을 남겼다.

공항에서 비행기를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도 10% 가격만 내고 타는 비행기의 뿌듯함은  유혹적이다.

  텅 빈 공항의 형광등 불빛 아래 함께 노숙을 하며 기다리던 여행객들과 길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왔다. 간단히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아침도 먹었다. ‘제발 내 이름을 불러줘~ Call me by my name~ ’

  다행히 자리가 났는지 지상 직원이 대기 중이던 내 이름을 불렀다. 여권을 들고 출국 심사대를 거쳐서 엉켰던 그물을 끊은 느낌이다. 스탠바이 큐를 외치며 비행기를 탔다.


  공항은 신비한 공간이다. 다른 시공간으로 가려면 공항에 가야 한다. 여기에서 저기로 내 인생을 바꿔줄 매혹적인 탈출구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은 욕망의 장소다. 비행기를 타려고 출발하는 항공편들의 목적지와 시간을 볼 때마다 심하게 설렌다. 멀리멀리 가고서도 더 멀리 가기를 즐겼다. 아직도 가보지 못한 곳으로 가고 싶었다.

  여권에는 나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정보만 들어있다. 친구, 나의 꿈, 경제 상황도 필요 없다. 양손에 여권과 가방을 든 나 자신만 남았다. 나 자신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은 나 혼자다. 대한민국 여권으로 대부분 나라의 경계를 통과했고, 거주지의 경계도 허물었다. 세계 어느 공항에서나 들어서는 순간부터 내 이름이 시작이었다. 내가 누구인지 아는 정체성은 어디나 중요한 문제였다.

  출국 심사대를 빠져나갈 때마다 계급장과 출신은 출국장 문이 닫힌 너머에 두고 오니 다른 존재가 된 착각이 든다. 한국의 입국장에 다시 돌아올 때까지 나는 주변 사람들의 관계 그물 속에서 허우적댈 일이 없는 홀가분함이 좋았다. 출국장으로 들어설 때, 한 번쯤 꼭 돌아보게 된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끝까지 응원하며 손을 흔들어줄 사람, 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결승선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내 삶의 모습이다. 환경이다.

우승이 아닌 완주만을 목표로 참가하는 스포츠가 마라톤이다. 글리코맨에 대한 자료를 찾다가 기사를 보니 일본 선수가 스톡홀름 올림픽 마라톤 중도에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스톡홀름 올림픽 개최 55주년 기념으로 75세가 된 그에게 그때 못 뛴 그거마저 뛰도록 초대했고, 그는 54년 후에 완주했다. 전 인생을 달려온 긴 코스였다.  공항을 생각하면 환상과 착각의 무대 뒤편이라는 생각을 했다. 마라톤에 비유하면 코스의 구성이다. 미국 대륙 횡단 대회, 전국 일주 울트라 마라톤 대회 등 비포장이나 경사길이 나올 수도 있고, 꽃길과 바다를 만날 수도 있다. 여행의 기간에 따라 원래의 나로 돌아와 세상이라는 현실의 진짜 무대에 서는 건 시간문제다. 외국에서 느꼈던 환상도 희망도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 제자리다.

남은 삶을 완주해야 한다. 내 인생을 행방불명인 체로 두어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스탠바이 미(Stand by me) 노래를 들으며 시드니 공항을 떠올린다.


When the night has come And the land is dark

밤이 오고 사방이 어두워진다 해도

And the moon is the only light we'll see

달빛만이 우리를 비추는 유일한 빛이라 해도

No I won't be afraid, no I won't be afraid

나는 두렵지 않아요, 두렵지 않을 거예요

Just as long as you stand, stand by me

당신이 내 곁에 머물러만 준다면 말이에요

(노래: Stand by me, Ben E.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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