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부터 내 소울푸드
후토마키 자취생 현지화 버전
외식물가 비싼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하지만 바쁜 직장인에게 아침저녁으로 도시락 쌀 정신머리가 남아있을 리 없다. 요리가 취미가 아닌 이상 그 시간에 조금이라도 쉬고 싶으니까.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아침에 허겁지겁 외출, 점심에 대충 회사 근처 밥집에서 한끼, 저녁은 편의점 혹은 배달음식. 세끼 중 두끼만 챙겨도 잘 먹은 날이었다. 회사 사람들 성향도 별반 다르지 않아서 도시락을 '직접' 싸 오는 이는 드물었다. 물론 치솟는 외식비에 부담을 느꼈는지 저렴한 가격의 샐러드를 구독하는 사람부터 냉동 도시락을 점심마다 사료처럼 먹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업무 스트레스가 극심한 날이면 왕왕 점심을 거르기도 했다. 그런 내가 도시락을 만든다? 당치도 않은 일이다.
난 20대 초부터 이제껏 자취 생활 7년 이상 해왔지만 요리를 등한시해왔다. 맛있는 걸 좋아하나 끼니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진수성찬 마다하진 않는다만 굳이 차려먹을 애정까진 없는 수준이랄까. 그래서 졸업작품을 만들던 시기에는 늘 편의점 김밥을 먹었던 것 같다. 또 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요리를 잘했다. 친한 친구와 남자친구가 내게 극진한 요리를 대접할 때면 나는 늘 환한 웃음으로 화답했다(얘들아 이제와서 고마워). 그래, 요리 잘하고 좋아하는 이들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데 나 하나쯤은 못해도 되지 않을까..? 뭐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내 능력치를 요리 외의 것들에 쌓았다. "00아 너는 스탯을 일에만 몰빵해서 찍었니?“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기능이 없었다.
근데 나는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내가 완전한 요리 젬병이 아니란 것을. 제사 음식을 약 10여 년간 엄마와 단둘이 만들어 오면서 알게 모르게 요리 스탯을 찍어온 덕이다. 엄마는 두부전, 동태전, 버섯전, 산적 등 다양한 전을 부치고 요리를 보조하는 내게 "니가 참 마음먹으면 잘해? 마음을 안 먹어서 그렇지"라는 딜 같은 칭찬을 날리곤 했다.
그런 내가 최근 요리에 취미를 붙이게 됐다. 퇴사 후 줄어든 소득에 지출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다각도로 고민했는데 그 해답은 식비 절감에 있었다. 카드값 지출 내역을 보니 내 소비 습관은 그야말로 형편 없었다. 1달에 한두 번 플렉스랍시고 왕창 먹는 술값이 피부로 와닿았다. 개버릇 남 못 준다지만 개도 위기를 느끼면 변화를 꾀한다. 술은 집에서 마시고, 커피는 외출이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카누로 대체했으며, 쫄쫄 굶다가 끼니 생각나면 배달시켜 먹던 습관도 버렸다. 그러다 냉동식품이 질릴 때쯤 요리로 눈 돌리게 된 것이다.
계란말이와 김치볶음밥으로 돌려 막기 해온 내 조리 인생의 전환점을 가져다줄 메뉴는 무엇? 김밥으로 낙점했다. 사실 나는 김밥을 딱히 좋아하진 않았다. 다 먹으면 너무 든든한 느낌이 싫어서. 근데 남기면 어찌나 아깝던지. 무엇보다 나는 참치김밥이 아니면 취급하지 않는다. 참치가 진리다. 요즘 유행하는 오이김밥은 정서에 안 맞는다. 허나 연어김밥을 맛본 후로 참치김밥을 한동안 등한시하게 됐다. 후토마키의 현지화 버전 같은게 까다롭고 고약한 내 입맛을 완전 사로잡았다. 하지만 가격만큼은 외제였다. 김밥이 서민음식인 건 옛말이라지만, ‘이 돈이면 백반집에서 한끼 먹겠는데..?’라는 자각이 생길 무렵 김밥을 직접 만들어 먹어야겠다는 판단에 이르렀다.
내 무모한 도전은 이렇게 시작됐다. 일단 우리집엔 김밥 속재료는커녕 간단한 소스류도 없었기 때문에 재료 준비에만 3일이 걸렸다. 김치볶음밥은 밥이랑 김치만 있으면 끝인데 뭔 놈의 김밥은 속재료가 이렇게나 많은지. 손질도 겁나게 번거로웠다. 게다가 나는 보통 김밥 아닌 연어 김밥을 원했기 때문에 비린내와 잡내 제거를 위한 준비도 필히 필요했다. 얼음물에 뭘 어쩌라고? 소금을 뭐 어떻게 하라고?
하지만 나는야 뭐든 대충 하는 법이 없지. 뭘 할 거면 제대로 해야 않겠냐는 불굴의 집념을 발휘했다. 오이와 연어 손질은 유튜브와 블로거 선생님들의 비결을 FM처럼 따랐다. 주부들은 참으로 부지런하다. 가족 챙기랴, 요리하랴, 포스팅하랴 바쁘다 바빠 주부사회. 그들이 연구한 레시피를 법전 삼아 바지런히 손질한 재료를 차곡차곡 냉장고에 정리했다. 김밥을 제대로 말아버릴 그날만을 위하여. 그리하여 쿠팡에서 주문한 천연옻칠 위생김발을 활용할 때가 왔다. 잡내 제거를 위해 각종 집기들을 끓는 물로 소독한 후 유튜브에서 백종원 선생님이 알려준 김밥 제대로 마는 법을 참고해 연어 김밥을 뚝딱 완성했다. 다만 칼질하며 조금 주저한 나머지 김 양끝이 설붙었다. 그래도 어설픈 솜씨로 선방했다. 엄마한테 자랑도 했다.
그리고 다시금 느꼈다. 김밥은 서민음식의 탈을 쓴 귀족음식이란 것을. 먹는 게 간단할 뿐이지 만드는 데 어떤 음식보다 엄청난 정성이 든다는 것을. 또 특별한 구석 없어 보여도 내실만큼은 단단한 음식임을 깨달았다. 어쩌면 인심 좋은 우리 조상이 서민에게 가성비 좋은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 고안한 한식일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소울푸드로 모자람이 없구만. 역시 반짝 떠오르고 지는 프랜차이즈 음식과 비견할 수 없는 스테디셀러구만. 이제 재료도 갖췄으니 당분간 속재료만 바꿔서 이렇게 저렇게 바꾼 돌연변이 김밥을 만들어볼 계획이다. 요리인생 1막 시작이다.
주재료
김, 밥, 연어, 단무지, 계란, 우엉, 오이
보조
깨, 참기름, 마요네즈, 설탕, 소금, 간장
Point
• 연어 비린내 없애기(블로그 참고함)
• 김밥 안터지게 말기(유튜브 참고함)
• 데코(배달 음식 먹고 남은 밑반찬 활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