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들어, 극심한 무기력증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하는 일이 지지부진한 탓도 있었을 것 같은데, 그보다 더 큰 이유는, 한창 에너지가 넘치는, 아직 어린 두 아들들에 대한 미안함이었던 것 같습니다. 특히, 높은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 앞장서 나라의 뿌리를 뒤흔드는 상황이니, 과연 우리가 이 아이들에게 어떤 세상을 넘겨주게 될까 싶은 걱정이 가장 컸던 것 같습니다.
10월 8일, 한강 작가님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뒤통수를 강하게 얻어맞은 느낌이 가장 먼저 들었습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바깥에서 이런저런 핑계를 찾고 있던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그리고, 굳건한 소신과 그에 대한 성실함은 언젠가 어떤 형태로든 보상을 받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빠르게 다시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성과에 대한 우리나라 안에서의 반응이 참 의아합니다. 최순실의 딸 정유라와 작가 김규나는 한강의 소설을 역사 왜곡으로 폄훼했고, 이문열은 “무조건 반갑다”라면서도 결국 서사 구조가 있는 자신의 작품이 낫다는 얘기를 에둘러했습니다. 이들에게는 국가의 경사가 아닌 다른 사람의 경사일 뿐이고, 다른 사람의 경사를 축하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인가 봅니다.
공교롭게 우리나라의 두 노벨상은 5·18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연결됩니다. 2000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故김대중 전 대통령은 5·18과 관련하여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받았었고, 올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는 5·18과 관련한 소설 ‘소년이 온다’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에 올랐습니다.
5·18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1997년 대법원 판결을 통해 완결됐고, 더 이상 역사 왜곡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이 판결에서 전두환은 5·18의 책임자로 판시되었습니다만, 1999년 김대중 대통령의 사면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에 대해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는 것이 죽어도 할 수 없던 일이었나 봅니다.
한편, 금년 노벨 평화상은 일본의 원폭 피해자 단체인 '니혼 히단쿄’가 수상했습니다. 수상 이유는 지난 70여년 동안의 핵폐기 운동입니다. 지구에서 유일한 원폭 국가의 생존자들로서, 오랜 기간 이어온 핵폐기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은 최근의 가자지구가 80년 전 일본과 같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들은 이 불필요한 정치적 견해 피력을 통해, 그들이 오랜 기간 이루어온 성취와 그에 대한 세상의 찬사를 스스로 훼손해 버린 것 같습니다.
전범 국가인 일본은 여전히 자신들의 가해에 대해 반성하는 것 같지 않습니다. 물론, 사과도 했고, 배상금도 지급했으니 끝난 일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스쿠니 신사를 찾아 A급 전범들에게 참배합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사과는 유감이나 후회의 표현이었고, 그나마 1993년의 고노 담화 정도가 사과에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얘기하는 배상은 국가 간의 배상이었고, 민간의 문제는 진척의 기미가 없습니다.
사실 다른 사람의 기쁜 일을 축하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며 사과함으로써 많은 것들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얻게 되는 것들도 있겠지만, 잃게 되는 것들도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얻게 되는 것들보다 잃게 되는 것들이 훨씬 소중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지켜내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암만 봐도 얻게 될 수 있지만 굳이 포기하려는 것들의 가치가 훨씬 커 보입니다.
아이들은 아마도 자신과 나이가 비슷하거나 어린 사람들보다, 더 나이가 많은 사람들 틈에서 살게 될 확률이 높아 보입니다. 이 아이들에게 못난 어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고,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는 어른으로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꺼져가는 장작에 번개탄을 피워준 한강 작가님께 진심 어린 감사를 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