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반스케처의 작은 도전_하와이에서
여행을 떠나면 사진을 열심히 찍는다. 하지만 예전에 인화해 앨범으로 만들어 놓았을 때와 달리 디지털 데이터만 쌓일 뿐 다시는 들여다보지 않을 때도 있다. 렌즈에 담기지 않는 공기와 감정, 그 순간의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아 아쉬움도 남았다. 그래서 우연히 어반스케치를 만났을 때, 꿈을 하나 품었다. 언젠가 여행 드로잉을 해 보는 것. 그러다 하와이 여행이 결정되고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열심히 그렸다’고 하기는 어렵지만, 그래도 어반스케치를 한 지 이 년도 넘었으니 이제 도전해 봐도 괜찮지 않을까?
#1. 짐은 가볍게, 기록은 생생하게
여행을 한 달 앞두고 어떤 재료를 챙겨갈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고려한 건 세 가지였다.
첫째, 그림 그리는 사람과의 스케치 여행이라면 몰라도 동행자가 있는 여행에서는 그림 도구 꺼내는 일조차 쉽지 않다.
둘째, 걷고 이동하는 일이 많은 여행의 특성상 짐은 가능한 한 가벼워야 한다. (나는 원체 짐이 무거운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셋째, 무엇보다도 동행자에게 폐가 되지 않으려면 재빨리 그려야 한다.
나는 평소에 펜으로 그린 뒤 수채물감으로 채색을 해왔다. 그래서 익숙한 재료 중에서 최소한만 챙기기로 했다. 펜, 손바닥 크기의 팔레트, 물을 넣어서 쓰는 붓, 작은 수채화 노트, 화장지 몇 장과 여타 자잘한 도구들. 하지만 부피와 무게를 더 줄이고 싶었다. 그림 옆에 보고 느낀 것도 많이 적고 싶은데 그러기에는 수채화용 두툼한 용지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공항과 기내를 비롯해 어떤 장소에서는 물감 쓰는 사람을 보는 관계자들 심기가 불편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얇은 용지가 묶인 크로키북에 미니 색연필 12색, 펜, 풀, 미니 가위, 작은 마스킹 테이프와 연필깎이. 짐을 최소화하고 기록에 집중하자는 마음이었다. (막상 여행지에서는 더 줄여서 펜 하나만 들고 나가기도 했고 색연필 2~3개만 챙기기도 했다. 연필깎이는 가져가기만 했지 한 번도 쓰지 않았다.)
#2. 어설퍼도 괜찮아, 그날의 내가 중요하니까
나름 고심해서 챙겨갔지만 재료 짊어지고 나가서는 꺼내 보지도 못하고 숙소로 돌아온 날도 있다. 그래도 현장에서 몇 장이나마 그렸다. 잠들기 전에는 그날의 감흥이 사라질까 후다닥 그리고 써 놓았다.
내가 그려온 그림을 보면서 혼자 밖에서 그리다니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분도, 그리는 모습이 멋져서 다가갔다가 그림 보고 실망한 사람도 있겠다는 뼈있는 농담을 던진 분도 있었다. 모두 맞는 말이다. 나도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그림의 완성도에 신경이 쓰이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여행 드로잉의 진정한 가치는 그림에 담기는 그날의 바람, 햇살, 감정, 이야기 등을 담는 과정의 현장감이다. 현장에서 멋지고 완성도 높은 그림을 휘리릭 그려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언젠가는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지금의 나도 괜찮다. 드로잉은 잘하는 사람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누구나 그 특별한 경험을 누릴 수 있다.
#3. 나만의 여행 기록을 만들다
여행에서 돌아왔지만 손때 묻은 크로키북을 펼치면 당시의 공기와 감정이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잊기 전에 더 남기고 싶어서 찍어온 사진을 보며 그림을 채워 넣고 현지에서 있었던 일을 바탕으로 짧은 에세이도 몇 편 덧붙였다. (약 한 달이 걸렸다) 맨 마지막에 자세히 쓰겠지만, 여행 드로잉은 강력 추천한다. 완벽을 기대하지만 않는다면, 그리고 스스로에게 맞는 방법과 개선점을 찾을 수 있다면 여행마다 성장하는 재미난 드로잉 노트가 차곡차곡 쌓일 것이다. 사진만 찍고 다니는 여행과는 확실히 다르다.
내가 여행을 통해 엮은 그림과 이야기를 여기에 하나하나 펼쳐 보이고자 한다. 초보의 여행드로잉 기록을 보면서 당신도 당신만의 여행저널북을 만들 용기를 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와이에 가 있는 동안 잠깐씩 비가 내렸고 햇빛은 당연히 강했지만 양산을 사용할 틈이 없었다. 카우아이에서도 잠깐 펼쳤다가 접었을 정도로 우산을 가방 안에 모셨다. 정말 umbrella protection이었던 셈이다. 모자도 가지고 다니긴 했지만 몇 번 못 썼다. 바람이 꽤 거셀 때가 많았는데 그때마다 모자를 손으로 잡기가 귀찮아 가방에 넣어두고는 잊기 일쑤였다. 당연히 피부는 까무잡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