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드로잉을 하기로 마음먹었기에 챙겨가는 짐과 캐리어, 배낭까지도 그려보려 했다. 하지만 실제로 남긴 건 ‘두근두근 첫 여행 드로잉’ 편에 실린 게 전부다. 핑계같지만 이유는 있었다. 바로 소설 때문이었다. 나는 소설 습작을 하고 있다. 이 역시 그다지 열심히는 아니어서 민망하지만, 영감이라는 게 떠오르면 감사히 여기며 쓰는 편이다. 하필, 아니 고맙게도 여행을 앞두고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생겼다. 여행 전에 어지간히라도 완성하지 못하면 여행에 집중하기 어려울 듯했다. 여행 기간 몸과 마음을 오롯이 하와이에 쏟기 위해서라도 소설을 써내야만 했다.
시작은 하와이 여행 계획을 위해 읽은 책이었다. ‘하와이 렌터카 여행’의 마카푸우 전망대 부분(p126)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이랬다.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 같은 토끼섬이 그림 같다’. 책자의 작은 사진으로 봐서는 어찌하여 토끼섬인지 알 수 없었고 작가 성석제 님이 쓴 <무인도의 토끼>라는 소설이 얼핏 떠올랐을 뿐이었다.
다음날 어반스케치 모임을 나갔는데 생태학자이신 봄벌 님으로부터 개구리의 포접에 얽힌 이야기를 들었다. 흥미로워서 절로 집중이 됐다. 그날 저녁 문득, 토끼섬-무인도의 토끼-개구리를 이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무인도의 토끼>를 다시 찾아 읽었다. 풍자적인데 은근히 유머가 있고 무슨 말인지 딱 알아듣기는 어렵지만 매력적인 글이었다.
오마주라는 전제하에 <무인도의 개구리>를 시작해 출국하는 날 오전까지 틈틈이 썼다. 점심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씻고 짐을 꾸렸다. 며칠간 책상 앞에 자주 앉아있어 그랬는지 허리가 아팠다. 파스를 붙이고 허리를 어루만지며 공항으로 향하는 길, 마음은 이미 토끼섬에 가 있었다. 여행 직전에 초단편이나마 소설을 썼듯 여행하는 동안에도 영감을 많이 얻을 수 있다면 더할나위 없겠다는 소망도 품었다.
기다려라, 하와이. 이제 너를 눈과 마음에 담으러 간다.
제목: 무인도의 개구리
* 이 소설은 <무인도의 토끼/성석제>의 오마주임을 밝혀둔다.
『그 섬에 가야 한다』
평생학습관 건물에 길쭉하게 걸린 현수막의 강연 제목이었다. 나는 다리가 아프고 목도 탔다. 어떤 내용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 몸은 절로 건물 입구를 향했다. 마침 강연이 시작될 시간, 장소는 바로 1층 강연장이었다. 유리문 너머 접수대 위의 티백 몇 가지와 나란히 세워둔 생수병이 보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 그리로 갔다. 나른한 표정의 접수대 청년이 참석자 명단을 적는 종이 위의 펜을 들어 내게 내밀었다. 명단에는 스무 명 남짓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청중을 많이 모으지 못했나 보았다. 따분한 강연이리라 짐작하며 명단에 이름을 적었다. 뜨거운 햇빛을 피해 쉴 의자와 물을 얻을 수 있는 데다 집에 들어갈 때까지 시간을 때우기에 좋을 듯했다.
강연장에 들어서자마자 에어컨 바람이 나를 휘감았다. ‘아, 이제 살 것 같네.’ 때마침 강연자인 생태학자의 인사말이 끝난 모양이었다. 박수 소리가 들렸다. 나를 반기는 게 아니란 걸 알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좋았다. 생태학자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연단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희끗희끗한 아담한 체구의 남자였다. 지루한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법한, 말하자면 꼰대 스타일의 윤리 선생 같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구석에 앉아 넥타이를 풀었다. 생수병을 열어 단번에 절반을 들이켰다. 눈을 감고 등을 의자에 기대었다. 나로서야 강연이 끝날 때까지 자면 그만이었다. 모든 조건이 완벽했다.
그때였다. 생태학자의 목소리가 강연장에 울렸다. 돈을 벌려면 그 섬에 가야 합니다. 의외로 경쾌한 톤이었다. 나는 눈을 떴다. 내가 잘못 들어온 건가? 연단 뒤에 걸린 현수막을 살폈다. 분명 생태학자의 강연이라고 적혀 있었다. 연단 위에 선 그의 얼굴은 아까 앞에서 본 현수막의 인물과 같았다. 머리를 긁적였다. 대체 무슨 수작일지 의심스러웠다. 벌써 눈을 감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을 깨우려는 의도라면 일단 성공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미심쩍었다. 학자라고 돈과 멀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생태학자라면 돈보다는 자연을 강조해야 어울릴 것 같았다. 혹시 생태 자본주의자? 그런 낱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첫마디가 돈이라니 너무했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내 처지에 그런 걸 따지는 건 우스웠다. 생태학자의 강연이 그저 농담인지 진짜 돈벌이 정보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나의 마지막 희망일지도 몰랐다. 불현듯 그의 주변으로 몽롱하고 환한 빛마저 어리는 듯했다. 물을 한 모금 더 마신 다음 반듯하게 앉았다.
...(이하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