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시작하는 날, 일곱 끼니를 먹었다. 한국에서 세 번, 기내식 두 번, 현지에서 두 번. 하와이가 한국보다 19시간 느리기 때문이었다. 한국에서의 세 번째는 인천공항에서였다. 출국 준비를 다 마친 뒤 라운지에서 느긋하게 저녁 식사를 했다. 그러고는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불현듯 비행기가 떠올랐다.
여행 스케치 로망의 백미는 아무래도 비행기가 아닌가. 탑승까지는 이십 분 남짓 남아 있었다. 먼저 탑승구에 가 있겠다고 말한 뒤 발걸음을 서둘렀다. 탑승구에 가서야 이미 늦은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어두운 창은 바깥의 비행기보다는 번들거리는 조명과 밝은 실내의 북적이는 인파를 그득이 담고 있었다.
애써 기내로 들고갈 가방에 챙긴 그림 도구가 민망했다. 역시 타이밍을 잡아 그리는 습관이 중요했다. 여행 드로잉, 과연 가능할까? 망연히 의자에 앉아있다가 벌써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광경이라도 그리기로 했다. 펜을 들고 선을 긋기 시작하는데 저 앞에서 S·Y 부부와 남편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남편은 면세점 쇼핑에 그다지 관심 없는 내가 서둘러 자리를 떠서 의아했나 보았다. 나는 셋 앞에서 선언했다.
“저 여행 중에 그림 그릴 계획이에요!”
색연필로 채색하는 와중에 탑승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드로잉 도구를 챙겨 가방에 넣었다.
좌석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았다. 짙은 어둠 속에 물 먹은 조명이 번졌다. 빗물은 창에 빗금을 그으며 흘러내렸다. 비행기 엔진에서 이는 바람 때문인지 젖은 바닥이 마치 바람결 아래 풀밭인 양 너울거렸다. 이륙 준비로 기체는 약하게 울렁거렸고 승무원들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런 구경도 지루해지려는 찰나, 창밖으로 노란 형광봉을 든 지상 유도사가 보였다.
우비를 입은 검은 실루엣의 그는 봉을 올렸다 내렸다 했다. 그에 따라 비행기가 뒷걸음질을 치기도 하고 진동이 살짝 바뀌는 듯도 했지만 동작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그 모습을 그리다가 다시 내다보니 어느새 봉이 보이지 않았다. 옆에 있는 작은 차량에 둔 모양이었다. 이어 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갔다. 둘은 나란히 서서 비행기를 향해 손을 흔들기 시작했다. 한 명은 왼손을, 다른 한 명은 오른손을. 안전한 이륙과 복귀를 기원하는 그들의 다정한 모습에 내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잠시 뒤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방향을 틀고 또 한참 숨을 고르다가 드디어 이륙했다.
어느 책에 소개된 맨체스터 대학에서 발표한 내용에 의하면, 기내의 낮은 습도와 기압, 소음이 후각과 미각을 둔화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단맛, 짠맛, 신맛, 쓴맛, 감칠맛’ 중에 감칠맛(쉽게 표현하자면 MSG 맛)이 높은 고도의 비행기 안에서도 변함이 없거나 도드라지는 경향이 있다고. 그 감칠맛이 토마토에도 있다고. 나는 그 사실을 안 뒤로 비행기를 타면 꼭 토마토 주스를 마신다.
그런데 이번에 승무원이 권하는 음료 중에 토마토 주스가 없었다. 사과주스, 구아바주스, 물만 있는 게 아닌가! 처음엔 그냥 물을 마셨다. 하지만 두 번째로 음료를 권할 때도 토마토 주스가 없었다. 나는 라운지에서 여행의 들뜬 기분에 일찌감치 토마토 주스를 마시긴 했다. 하지만 정작 기내에서 못 마시면 내내 서운할 것 같았다. 게다가 맛 비교도 해 보고 싶었다. 승무원에게 물었다. 혹시, 토마토 주스는 없나요? 결국 마시긴 했는데 아쉽게도 지상과 기내에서의 맛을 비교할 수는 없었다. 환경 차이라고 하기에는 맛이 영 달랐다. 그 정도면 제조사가 다른 거였다. 아무튼 나는 이번 기회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 ‘비행기=토마토 주스’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았다는 사실을.
비행기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잠을 자고 영화를 보고, 두 번의 기내식과 간식을 먹었다. 그런데 고기요리는 다시 데워져 나오는 상황이라 뻣뻣했고, 결국 절반 이상을 남겼다. 치즈와 쿠키도 양이 많아 다 먹지 못했다. 그때 문득, 이 비행기에 탄 승객이 남긴 음식을 다 더하면 얼마나 많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항공사 측에서는 승객이 뭘 선택할지 몰라 음식을 넉넉하게 준비했을 텐데, 그 역시 폐기할 수밖에 없을 터였다. 전 세계의 비행기에서 버려지는 양까지 생각하면 얼마나 많을까! 환경을 위해서라도 메뉴 사전주문 시스템을 더욱 활발하게 적용하면 어떨까 싶었다.
출발이 지연된 탓에 도착도 늦었다, 고 쓰려니 살짝 어색하다. 인천에서 24일 밤에 출발했는데 호놀룰루에서도 같은 날, 심지어 정오였으니까. 아무튼 24일에 이미 다섯 끼니를 먹었지만 렌트카를 찾자마자 또 식당으로 향했다. 요즘 핫한 곳이라는 ‘SALT 앳 아워 카카아코’로 갔다. 두리번거리며 돌아다니다가 닭 그림이 인상적인 MOKU에서 점심을 먹었다.
나는 끼니는 빠짐없이 챙기면서도 크로키북 펼칠 틈을 찾는 일은 소홀히 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와이키키 해변과 카피올라니 공원을 산책하는 동안에도 그림 도구는 내내 가방 안에 머물렀다. 내 감각은 주변을 탐색하느라 정작 내 안으로 착륙할 줄을 몰랐다. 잔뜩 들떠서 밀도를 잃은 채 떠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리기 워밍업은 이륙보다도 늦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