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첫날의 늦은 저녁 숙소에서야 하루를 기록할 수 있었다. 동시에 숙소 밖에서 크로키북을 펼치는 건 아무래도 버거울 거라는 생각을 했다. 더군다나 둘째 날은 카우아이, 가이드와 함께하는 단체여행이었다. 괜히 어깨만 무거울 것 같아 펜도 종이도 챙기지 않고 숙소를 나섰다.
호놀룰루 공항에 도착, 탑승구로 가는 길에 있는 매장을 천천히 구경한 뒤 대기실에 앉았다. 창밖으로 전날에 그리지 못해 아쉬웠던 비행기가 보였다. 아, 맞다! 가방을 뒤져 보았다. 볼펜 한 자루, 종이 한 장 없었다. 한숨이 나왔다. 하필 이런 순간에 그릴 도구가 없고, 이런 순간에 간절히 그리고 싶은 마음은 또 뭐람.
Y에게 뭐라도 있는지 물었다. 볼펜은 확보, 종이는 없다고 했다. 바로 근처에 카페가 보였다. 저기에서 냅킨이라도 집어 올까? 커피 마시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종이 한 장 구하려다 좀도둑 되겠다 싶을 즈음 항공사 직원이 안내 데스크 앞에 나타났다. 넉넉한 풍채에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내가 가진 전자티켓을 종이로 인쇄해 달라고 해야지, 안 된다고 하면 메모지라도 한 장 얻어야지, 하는 심산으로 그녀 앞에 다가갔다. 그녀는 내 요청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비행기가 가장 가까이 보이는 창가쪽으로 돌아앉아 탑승권 뒷면에 쓱싹쓱싹 비행기를 그리고 있자니 행복했다. 삼색 볼펜이었기에 빨강과 파랑도 쓸 수 있었다. 한 어르신이 다가와 어쩜 이리도 빠르게 잘 그리냐고, 예술가냐고 물었다. 그냥 취미라고 대답하면서도 괜히 뿌듯했다. 비가 내리고 있는 상황도 적어 넣었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 탑승권에 적힌 문구를 읽어봤다. 상단에 SOUTHWEST AIRLINES, OPEN SEATING, 이렇게 적혀 있었다. 자리가 정해져 있지 않으니 들어가 앉을 자리를 정하는 방식이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운영되기도 하는군, 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단에는 이해할 수 없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EarlyBird Check-In®, if applicable. Priority and Express Lanes, if available." 해당하는 경우, 가능한 경우라니,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된다, 안 된다가 확실하지 않은 게 아무래도 낯설게 느껴졌다.
알 수 없는 채로 탑승 시간이 다가왔고 무리 없이 창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륙에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늘이 온통 흐리지만은 않았다. 맑은 하늘, 흰 구름, 먹구름이 뒤섞여 있었다. 물 빛깔은 연둣빛에서 짙은 파랑, 설핏 보라까지 어우러졌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었다. 진부한 말이 아니라 진짜로. 게다가 비가 내린 덕인지 이륙하는 짧은 시간에 커다란 무지개가 두 번이나 떴다.
창밖 풍경도 그림으로 남기고 싶었다. 뭐라도 있을까 하고 좌석 앞주머니를 뒤졌다. 하얀색 튼튼한 비닐이 손에 잡혔다. 별 설명은 없었지만 입구 부분에 테이프(아마도 양면)가 붙어 있는 걸 보아 멀미 봉투였다. 거기에 볼펜으로 선을 그어보았다. 볼펜이 지나간 자리로 비닐은 속절없이 늘어나기만 했다. 아쉽지만 바깥 풍경은 나중에 그려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사진만 찍어뒀다. 그래도 25분 남짓의 짧은 비행시간 내내 시시각각 변하는 바깥을 보는 재미가 좋았다.
착륙이 다가오자 승무원이 마이크를 잡았다. 빠른 영어로 후루룩 지나가서 거의 듣지 못했는데, 마지막 부분은 좀 들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들린 것으로 기억한다.
“Thank you for flying with us today. Whether or not you fly with us again, we never mind.”
엥? 오늘 함께 비행해 준 건 고맙지만 다시 함께하든 말든 그건 상관없다고? 승무원의 표정에 장난기가 있었지만 내가 들은 내용이 의심스러웠다. 대부분은 반응이 없었지만 몇몇이 큭큭거렸다. 농담이 맞는 모양이었다. 얼핏 탑승권에서 읽은 if applicable, if available과 비슷한 성격이 아닐까 싶었다. 혹시, 유난히 빨랐던 말도 탑승객이 듣든 말든 상관없어서? 나는 뒤늦게 피식 웃음을 지었다. 좀 엉뚱하고 유쾌한 항공사 측의 농담 한 마디가 여행의 덤인 양 느껴졌다.
만약 내가 그림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승무원의 농담을 듣지 못했을 터였다. 그저 함께 여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우리 항공사를 이용해 주세요, 그런 인사려니 했겠지. 문득 그림 도구를 가지고 나오지 않아 탑승권 뒷면에 그려야 했고, 종이가 없어 더는 그릴 수 없었던 상황이 큰 선물처럼 느껴졌다. '준비된 완벽함' 대신 '예상치 못한 결핍'이 오히려 더욱 또렷하게 남을 소중한 순간을 안겨줬으니 말이다.
카우아이섬의 리휴(LIHUE)공항에도 비 내린 흔적이 선명했다. 비를 머금어 그런지 유난히 청량한 초록빛에 눈이 부실 정도였다. 공항부터 숲에 쌓인 듯한 모습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방문할 호놀룰루 이웃섬으로 카우아이 섬을 선택한 것은 섬의 약 3%만 개발되어 태초의 자연을 감상할 수 있다는 문구때문이었던 것이다. 어떤 경험을 하게 될지 설레었다.
게이트를 나가자 유쾌한 목소리의 한국인 가이드가 우리를 맞았다. 그리고 다른 일행이 도착하길 기다리는 사이 나는 카우아이에서 발행한 관광 안내 책자를 들춰봤다. 한국에서 봤던 관광 안내서의 그림과 사진보다 훨씬 선명하고 멋있어서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