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도 나누면 반이 된다
마음 건강 검진 이후 첫 진료날, 뇌파 검사와 스트레스 검사를 받았다. 수십 장의 뇌파 사진을 들여다보던 선생님께서 우울보다는 오히려 불안이 강하게 보인다는 소견을 주셨다. 이제껏 우울해서 불안한 생각을 하는 줄 알았는데, 나의 경우에는 불안한 생각을 하다 보니 우울증세가 따라오는 것이었다.
무엇이 나를 불안하게 하는 걸까?
나의 불안이 최근 심해진 이유는 요즘 들어 내 주변의 많은 일들이 예측 불가능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담당 브랜드는 규모가 커져 내가 모든 것을 챙길 수 없어졌고, 프리랜서로 일하는 배우자의 벌이는 늘 오락가락하고, 새로운 동네로 이사 온 후부터 월 생활비는 늘 예산을 초과한다. 일도 사생활도 어느 것 하나 내 맘 같지 않지만 내가 잘 중심을 잡아야 모두에게 피해가 가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버티고 있었다.
버티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하루하루가 끝이 보이지 않는 긴 터널처럼 느껴졌다. 언제가 빛이 들어오는 끝이 있다는 걸 알지만,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른 채 끝까지 걸어가야만 하는 긴 터널. 걸어가는 날이 하나 둘 쌓일수록 마음속 불안은 깊어지고, 주저앉고 싶어도 주저앉아봤자 달라지는 게 없다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정신과에서는 진료를 통해 나의 불안함이 현실에서 해소될 수 있는 불안함인지를 물어보셨다. 하지만 회사 일에 대해서는 바꾸지 못하는 부분이 훨씬 컸기 때문에 우선은 약물치료를 통해 마음의 긴장도를 조금 낮춰보기로 했고, 그 외에는 나대로 불안함에서 멀어지는 방법들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우선은 재택근무로 전환했다. 정신과 약의 경우, 일반 내과 약처럼 바로 약효가 나타나지 않고 2주는 먹어야 조금씩 효과가 나타난다고 한다. 혹시라도 아직 마음이 우울한 상태에서 사무실에 출근했다가 동료들에게 나의 감정적인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재택근무를 시작하니 최소한 일을 하다가 불편하고 힘든 일이 생겼을 때 감정을 숨길 필요가 없어졌다. 그 자리에서 한숨도 쉬고 짜증도 내고 나니 오히려 답답함이 가셨다. 한 브랜드의 마케팅 리드가 되어 사무실에 앉아있는 동안은 나의 한숨 하나, 짜증 하나가 멤버들에게 미칠 영향을 생각하며 감정을 억누르는 게 습관이었다.
감정을 표출했음에도 불안함이 쉬이 가시지 않을 때는 집에서 근무하고 있는 배우자에게 잠시 내 불안함을 공유했다. 불안하다는 감정과 불안함을 느끼는 이유들까지. 나의 불안을 누군가와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답답함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가끔은 불안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가 있다. 머릿속으로 불안한 시나리오를 계속 그려나가는 것이다. 사실 이때가 정말 멈추기 어려운데, 겉으로 보기에는 깊은 생각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보통은 방해하지 않기 위해 말을 걸지 않는다. 이때 생각을 스스로 멈추는 것이 정말 어렵다. 혼자서 불안한 시나리오들을 나열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불안 시나리오들을 미리 예상해 해결방법을 고민 중이라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상태를 아는 남편은 이제 내가 오래 생각하고 있을 때, 시답지 않은 말 한마디를 툭 던진다. '여보 이것 좀 봐.' '우리 음악 들을까?' 의미 없는 한마디에도 나의 생각은 금세 멈추고, 불안한 감정 또한 망쳐진다. 한 번 망쳐진 불안은 다시 내 머릿속을 채우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다.
불안한 일은 늘 우리 주변에 있다. 하지만 불안하다고 해서 늘 불행한 결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내가 그걸 얼마나 불안하다고 느끼냐에 따라 불안에 잠식될 수도, 불안과 잘 지낼 수도 있다. 알면서도 또 불안한 생각에 손톱을 물어뜯고 있을 나에게 괜찮다고 한 마디 해줄 수 있는 배우자와 주치의 선생님이 있어 참 다행이다. 불안함에 힘들 때 나의 불안함을 주변과 꼭 나누어 보시길 바란다. 불안은 정말 반이 된다.
